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눈먼 자들의 도시-실명 연습

가장 두려운 것은 오직 나만이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주제 사라마구 

『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가장 두려운 것은 오직 나만이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p 461                

왜 우리가 눈이 먼 거죠. 모르겠어.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어요. 응. 알고 싶어. 나는 우리의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눈은 멀었지만 본다는 건가.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의사의 아내는 일어나 창으로 갔다. 그녀는 쓰레기로 가득 찬 거리, 그곳에서 소리를 지르며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이어 그녀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모든 것이 하얗게 보였다. 내 차례구나. 그녀는 생각했다. 두려움 때문에 그녀는 눈길을 얼른 아래로 돌렸다. 도시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는 '만약에 세상 사람 모두가 눈이 멀어 단 한 명만이 볼 수 있다면'을 전제로 도시 전체에 백색 실명이라는 전염병이 창궐해 사회가 붕괴하는 과정을 그려낸 작품이다. 볼 수 없는 자들의 세계에서 악이 발화되고 점화되며 정당화되는 과정을 신랄하게 드러내는 한편 가장 추악하고 절망적인 순간에서도 휴머니즘이 건재함을 보여준다.  


이 소설은 시간적 공간적 배경이 확실하지 않으며,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 또한 따로 없다.  ’첫 번째로 눈이 먼 남자‘, '안과의사의 아내', '안과의사', '첫 번째로 눈이 먼 남자의 아내', '검은 색안경을 쓴 여자'... 모두 익명성으로 표현된다. 나라, 도시를 설정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세상 어디에서든 충분히 일어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이며, 사람을 익명으로 표현한 것은 팬데믹 하에서는 누구든 예외가 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수용소에 강제 격리된 상황에서도 각자의 이익을 계산하고 욕망을 버리지 못하는 눈먼 사람들,  무차별 총격을 가하는 군인들의 폭력, 전염을 막기 위해 격리 수용 조치를 내린 냉소적인 정치인, 눈먼 상황을 이용해 범죄를 정당화하는 폭도들이  등장한다


 이 소설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잃었을 때에야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비로소 깨닫게 된다는 사실을 날카롭게 풍자하면서 동시에 최악의 상황에서도 함께 고통을 나누고, 의지하는 진정한 인간의 모습을  우병동 1호실의  인물들을 통해 보여준다. 


줄거리를 요약하면

     

 한 남자가 운전하며 귀가하던 중 갑작스럽게 눈앞이 하얗게 보인다. 첫 번째로 눈이 먼 남자를 집으로 데려다준 남자는 선의를 베푸는 척하면서 그의 차를 훔쳐 달아나고 퇴근 후 집으로 돌아와 놀라운 상황을 알게 된 그의 아내는 남편과 안과를 방문하지만 안과의사도 알 수 없는 병이었다. 그때부터 첫 번째 눈먼 남자와 관련된 모든 이들이 차례대로 우윳빛 바다에 빠져든다. 

실명의 속도가 빨라지자 당국은 실명 사태를 초기에 진압하기 위해 첫 번째 눈먼 남자와 접촉한 모든 사람을 폐기된 정신병원에 격리하여 보균자와 눈먼 자로 구분한다. 의학 자료를 찾아보다 눈이 먼 안과의사를 태우러 차가 도착했을 때 안과 의사의 부인은 눈이 멀지 않았으면서 자신도 눈이 방금 멀어버렸다고 말하며 남편과 동반한다. 정신병원의 우병동 일호실에는 첫 번째로 눈이 먼 남자의 아내, 차 도둑 남자, 검은 색안경을 낀 여자, 한쪽에 안대를 한 노인, 사팔뜨기 꼬마, 택시 운전사, 안과의사, 의사의 아내가 격리되어 있다. 의사의 아내는 모든 것을 볼 수 있지만 눈이 보인다는 사실을 숨기고 안 보이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군인들의 감시하에 주기적으로 식량 등을 지급받지만 수용자가 점점 늘어나자 정부는 전염병으로 간주하고 감염 방지를 위해 격리 장소를 벗어나는 환자는 사살해도 좋다는 명령을 내린다. 실명한 사람 근처에만 있어도 전염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병원을 지키는 군인들은 공포에 질려 경계선에 접근하는 환자들을  마구 사살한다.

도시에 무서운 전파력으로 퍼지며 병원의 수용 능력이 한계에 달하면서 수용자들 사이에 갈등과 욕망이 드러나 순식간에 무법의 아수라장으로 변한다. 다만 우병동 일호실만은 안과의사와 의사의 아내 지휘 아래 겨우겨우 질서를 유지하고 있지만 차 도둑 남자가 검은색안경 낀 여자를 성추행하는 일이 벌어지고 그 과정에서 상처를 입은 차도둑 남자는 약을 구하러  밖으로 나가다가 군인의 총에 사살된다.

눈먼 사람들은 수없이 늘어났고 수용인원을 넘어서면서 사상자도 늘어 갔다.  먹을 물, 씻을 물도 없는 상황, 아무 곳에나 싸놓은 배설물로 최악의 환경에서 식량 배급 문제로 갈등이 심화되는데 그 과정에서  좌병동 깡패들은 다른 병동에 공급될 식량들을 착취하고 배급받으려면 금품, 귀중품, 돈 등을 바칠 것을 요구한다. 눈먼 자들은 만일을 대비해 감춰둔 물건들을 모두 깡패들에게 상납하고 식량을 타오지만 병실 인원의 배를  채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양이다. 깡패들은 물품 요구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병동 여자들의 성상납을 요구한다.  좌병동부터 시작하여 차례대로 눈먼 깡패들이 머무는 방으로 보내진 여자들은 그 가치에 따라 식량과 교환된다.

우병동 1호실, 그나마 질서가 유지되던 방에서도 성 상납 문제로  갈등이 생기고, 심지어 이미 이렇게 눈도 안 보이는 데 몸 하나 주는 게 뭐가 문제냐는 의견을 내세우는 남자들까지 등장한다.

결국 깡패들의 방으로 여자들이 가야 하는 날이 다가오는데  1 병동 눈먼 사람들 사이에 욕망을 억제하지 못하고 성적인 행위들이 벌어진다. 눈이 멀었기에 자신의 침대로 넘어오는 눈먼 자가 누구인지 알 수도 없고,  아무도 이를 제지하지 않지만 오직 한 사람, 눈이 멀지 않은 의사 부인은 이런 참담함을 보며 절망한다. 심지어 그녀의 남편 안과의사 역시 몸의 욕망을 참지 못하고 검은 색안경을 쓴 여자의 침대로 들어간다.

우병동 1호실의 여자 7명은 서로의 어깨를 잡고  깡패들의 방으로 건너가 처참한 성폭력을 당하고 여자들의 희생의 결과에 따라 식량을 받아온다. 깡패들의 요구는 점점 정도를 넘어서고  의사의 아내는 더 이상 여자들이 희생양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깡패 두목의 얼굴을 철저히 기억하고 또 그들을 다시 부르는 날이 오기 전 숨겨둔 가위로 깡패 두목을 살해한다.

두목이 누구의 손에 죽은지도 모르면서 그 방의 질서는 무너지고 우병동 1호실의 남자들은 안대를 한 노인을 중심으로 깡패들을 공격하지만 눈이 먼 그들끼리의 싸움은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다.  결국 의사의 아내는 라이터로 깡패들의 방 매트리스에 불을 붙이고  전체 건물로 불이 번지자 1호실 사람들과 탈출한다.


병원을 벗어났지만 이미 도시 거리에는 시체가 즐비하다. 격리되었던 수용소와 같은 상황이다. 의사 아내는 같이 탈출한 사람들을 위해 먹을 것을 구하러 도시 곳곳을 다니지만 약탈당한 곳, 텅 빈 가게들만 보인다. 그들의 도시는 말 그대로 '눈먼 자들의 도시'가 되어 있었다. 식량과 물을 확보하기 위해  눈먼 자들이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약탈을 하고 기력이 다해 쓰러져 죽으면 거리의 개들이 그들의 시신을 뜯어먹으며 배를 채웠다.     

이 모든 것을 오직 한 사람, 볼 수 있는 눈을 지닌 의사의 아내만이 목격한다. 도시가 거대한 무덤으로 변한 상황, 그녀가 처음 먹을 것을 챙겨 왔던 지하 슈퍼에 다시 간 순간 계단에서 서로 뒤엉켜 죽은 시체들, 시체들의 몸 위로 피어오르는 푸른 인광을 보고 의사의 아내는 오열한다. 우연히 거리의 개 한 마리가 의사 아내의 눈물을 핥아주고 그들과 일행이 된다. 

우병동 1호실의 수용자들은 차례대로 자신이 살던 집에 가보지만 이미 약탈당한 뒤라 먹을 것 하나 얻을 수 없고 마침내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남아있는 의사의 집에 도착해 모처럼 안식을 취한다. 하늘에서 천둥 번개가 치더니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여자들은 베란다로 나가 오염된 몸을 씻어낸다.  세 여인(의사아내, 검은색안경을 낀 여자, 처음 눈먼 남자의 아내)이 세상에 처음 왔을 때의 벌거벗은 모습으로 비를 맞으며 몸을 씻는 장면은 오염된 것들을 던져버리고 잃어버린 것들을 회복하는 장면이다.  안대를 한 노인에게 연민을 품게 된 검은 색안경을 낀 여자는 노인과 함께 살 생각을 한다.      

삶을 위한 마지막 시도로 시골로 떠날 것을 고려하는 순간, 첫 번째로 눈이 먼 남자의 눈이 보이게 된다. 이후 눈이 멀었던 순서대로 다시 시력을 되찾고, 밖은 눈이 보여, 눈이 보여하는 소리로 가득 찬다. 의사의 아내는 모든 것이 하얗게 보이는 하늘을 올려 보다 이제 자신의 차례일 것으로 생각하고 두려움 때문에 눈길을 아래로 돌리지만 "도시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라는 문장과 함께 이야기가 끝난다.

                    


* 등장인물

-첫 번째로 눈이 먼 남자 :재앙의 시작을 알린 인물. 도로에서 운전을 하고 있을 때 눈이 멀어 차 도둑에게 집까지 배웅받는다.

-의사 :첫 번째로 눈이 먼 남자와 똑같이 눈이 먼 다른 사람들이 방문한 안과의 의사. 처음 보는 증상에 서적을 뒤져가며 정보를 찾다가 눈이 먼다.

-의사의 아내 :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은 인물이며, 남편이 격리 장소로 끌려갈 때 본인도 눈이 멀었다고 순간적인 거짓말을 해 남편과 함께 격리 장소로 간다. 문제를 해결하는 핵심

-자동차 도둑 :첫 번째로 눈이 먼 남자를 집까지 데려다주고서는 그의 차를 훔치는 도중에 눈이 먼다.

-검은 색안경을 낀 여자 :가벼운 결막염을 앓고 있는 매춘부. 호텔에서 벌거벗은 채로 눈이 멀었다.

-검은 안대를 댄 노인 :백내장을 제거하기 위해 의사의 안과를 방문했던 노인. 이후 눈이 멀어 의사와 같은 병실을 쓰게 된다.

-사팔뜨기 소년 :의사의 안과에 엄마와 함께 앉아있었던 소년. 눈이 멀어 의사와 같은 병실에 배정되었지만 소년의 엄마는 같이 오지 않았고 내내 엄마를 찾는다.

-좌병동 3호실의 사람들 : 총을 가지고 있는 두목을 선두로 모든 식량을 차지하고 다른 병동 사람들에게 식량 분배를 대가로 귀중품과 성상납을 요구한다.          


P467

사라마구의 따뜻한 시선 - 실명에 대한 연습 -  작품 해설 중에서 (인용) 


『눈먼 자들의 도시』는 인간 본성에 대한 강한 의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우리의 일상을 완전히 뒤바꿔버릴 상황, ‘ 만약 이 세상에서 우리 모두가 눈이 멀고 단 한 사람이 보게 된다면’이란 설정에서 시작한다.

어떠한 국가, 어떠한 민족이 아니라 이 세상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다. 그 어떤 특정한 시간에도 위치하지 않는, 바로 과거일 수도, 오늘일 수도, 내일 일 수도 있는 시간 속에 위치한 이름이 부여되지 않은 인물을 통해 인간이란 종(種)이 지니는 모순된 세계가 하나의 알레고리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 알레고리를 통한 사라마구의 새로운 상상력은 현대 사회에 만연한 무책임한 윤리 의식과 이에 대한 무지의 고발이다. 그렇기 때문에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중요한 것은 이름이 아니라 ‘눈이 멀었다’는 사실 자체이다.     

 ‘눈이 멀었다’는 사실은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눈이 멀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많은 것을 잃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소유는 현대 산업 사회에서 기본적인 생존 양식으로 우리는 일상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자신의 가치와 존재를 확인한다. 그러나 이 소설을 다 읽고 난 후에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잃었을 때에야 가지고 있는 것이 정말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물질적 소유에 눈이 멀었을 뿐 아니라 그 소유를 위해 우리의 인간성조차 쉽게 말살하는 장님이기에 눈을 비벼 눈곱을 뗀 후 세상을 다시 보아야 한다는 필요성을 새삼스레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 내 목소리가 바로 나요. 다른 건 중요하지 않소.”라고 절규하는 텍스트의 목소리가 가슴에 와닿는다.  이 소리는 단순히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아니라 볼 수 없기에 더욱 강한 여운을 남기는 목소리, 바로 세상에서 일어나는 재앙에 대한 놀람과 공포,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드러내며 우리의 무지를 질타하는 사라마구의 목소리인 것이다.     

『눈먼 자들의 도시』는 이렇게 봄(시각), 말함(청각)과는 정반대로 실명과 침묵이란 장치를 통해 무책임한 윤리의식과 붕괴된 가치관,  폭력이 만연한 현대 사회를 보여준다. 눈먼 사람들의 수용소 격리, 이들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하는 군인들의 폭력, 전염병 억제 방안을 내놓은 냉소적인 정치인, 눈먼 사람들 각자가 보여주는 이기주의, 눈먼 깡패들의 악마적 행동들....     

그러나 『눈먼 자들의 도시』는 인간의, 현대 사회의 어두운 면만 보여주고 있지는 않으며 인간에 대한 신뢰와 연대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총으로 무장한 집단 (군인 혹은 나중에 들어온 눈먼 자들)이 저지르는 폭력은 계층화, 파괴되어 가는 도덕과 체념에 대한 갈등은 인간의 모순과 비인간성을 보여주지만 처음 눈이 멀어 수용소에 들어간 집단(우병동 1호실)은 함께 고통을 나누고 의지하며 인간관계를 지속해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은 ‘의사의 아내’는 ‘눈먼 자들의 도시’를 따뜻한 인간 사회로 만드는 연대 의식의 축으로 그려지고 있다.          


우병동 1호실의 여인들이 좌병동 3호실 깡패들로부터 집단 성폭행을 당하고 식량을 받아왔을 때... 그 식량을 그저 살기 위해 꾸역꾸역 목구멍에 처넣을 때... 의사의 아내는 결심한다. 이 모든 것. 이 모든 악을 끊어야 한다고. 그녀에게 남은 유일한 무기 '가위'로 깡패두목의 목을 찌름으로써 보이는 악을 종결시키지만 범인을 색출하여 보내야 한다는 목소리에 절망한다.  범인을 색출하여 좌병동 깡패들의 방으로 보내지 않으면 그나마 공급되던 식량이 중단될까 두려워하는 자들의 목소리에 맞서 안대를 한 노인이 목소리를 낸다.          

 

 p275

누구든 항복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자를 내손으로 죽여보리겠소. 왜요. 원을 그리고 앉은 사람이 물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지옥에서. 우리 스스로 지옥 가운데서도 가장 지독한 지옥으로 만들어버린 이곳에서. 수치심이라는 것이 지금도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하이에나의 굴로 찾아가 그를 죽인 용기를 가졌던 사람 덕분이기 때문이오. 그 말이야 맞이만 수치심이 우리에게 먹을 걸 주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누가 한말인지는 몰라도 맞소. 늘 수치심이 없어 배를 채울 수 있었던 자들이 있었소. 하지만 우리는  우리 분수에 맞지 않은 마지막  한 조각의 존엄성 외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소. 이제 우리에게도 마땅히  우리 것이어야 하는 것을 찾기 위해 싸울 능력 정도는 있다는 것을 보여줍시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겁니까. 우리는  마치 비열한 기둥서방들처럼 여자들을 깡패 소굴로 들여보냈고, 그 대가로 배를 채웠소. 이제 그곳으로 남자들을 들여보낼 때가 왔소 여기 남자들이 있다면 말이오. 가서 우리 손으로 먹을 걸 들고 나오자는 말이오. 저 사람들은 무장을 했어요. 내가 아는 한 저자들에게는 총이 한 자루밖에 없고 조만간 총알이 떨어질 거요. 그래도 우리 몇 명을 죽일 총알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보다 작은 일에도 목숨을 걸었소. 나는 다른 사람들의 배를 불려주기 위해 내 목숨을 내놓을 생각은 없어요. 그럼 당신은 누군가 당신에게 먹을 걸 주기 위해 목숨을 잃었을 때, 그걸 먹지 않고 굶을 생각은 있소. 검은 안대를 한 노인이 신랄하게 쏘아붙였다. 상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p 276

우리는 그들이 우리를 모욕한 곳으로 돌아갈 거예요. 모욕이 하나도 남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 자신에게서 모욕의 흔적을 없애버리기 위해서. 남자들만이 아나라 여자들도 가겠어요. 검은 안대를 한 노인이 웃음 지었다. 행복한 웃음 같았다. 다른 눈먼 남자들의 얼굴에 나타난 놀란 표정들을 관찰하는 것이 더 재미있다. 마치 머리 위로 뭐가 지나간 것 같았다.  새 한 마리가, 구름 한 점이, 머뭇거리며 나온 아침의 첫 희미한  빛이...        

안대를 한 노인의 목소리는 곧 작가 주제 사라마구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지옥에서. 우리 스스로 지옥 가운데서도 가장 지독한 지옥으로 만들어버린 이곳에서. 수치심이라는 것이 지금도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하이에나의 굴로 찾아가 그를 죽인 용기를 가졌던 사람 덕분이기 때문이오...."하지만 우리는 우리 분수에 맞지 않은 마지막 한 조각의 존엄성 외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소."


결국 인간이란 어떤 상황에 처하면 수치심과 존엄성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 존엄을 지키기 위해 수치심을 버리는가. 수치심을 느끼지 않기 위해 존엄마저도 버리는가.... 

양심에, 이성에 눈먼 자가 되어버리는가...


 다른 개들이 썩어가는 시신을 향해 달려갈 때, 눈물을 흘리는 인간의 얼굴을 핥아주는 개는.... 얼마나 삶의 본질을 알고 있는 개인가...

대화체마저도 따옴표 하나 없이  온점과 반점으로만 이어지는 읽기 어려운 소설.

누구의 목소리인지, 누구의 말인지 굳이 따지지 않으며 읽어내기를 의도적으로 바란 것일까.


눈먼 자들이 넘치는 도시를 바라본다. 타인의 고통에 눈감고.... 그런 고통이 나만 비껴간다면 된다는 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타인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라고 까지 비약한다면 너무 잔인한 말일까..

참담하고 먹먹하고 잔인하고... 읽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지만..

그래도 한 번은 정신의 통과 의례 같은 이 책을 주기적으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책꽂이 한 구석에서 내가 무언가를 망각하고... 세상의 가치를 외면하고, 본질에 눈 감고... 눈먼 자로 살아갈 때... 이 책은 조용히, 그리고 집요하게 나를 바라본다.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눈은 멀었지만 본다는 건가.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     

/ 려원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도서 선정


작가의 이전글 에바 브라운의 연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