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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 경험한다면

 『리스본행 야간열차』영혼의 떨림을 따르지 않는 자는 불행할 수밖에 없다

『리스본행 야간열차』/ 파스칼 메르시어( (Pascal Mercier/Peter bieri) 

        

이 소설의  처음 부분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라이문트 그레고리우스의 삶을 바꾸어놓은 그날은 어느 날과 다름없이 시작됐다. 8시 십오 분 전, 그는 분데스테라세에서 시내를 가로질러 김나지움과 연결되는 키르헨펠트 다리로 들어섰다. 학기 중에는 그리고 주 중에는 언제나 똑같았다. 늘 8시 15분 전이었다. 언젠가 한 번 다리가 막혀 돌아가야 했던 날, 그는 그리스어 수업 시간에 실수를 했다. 그가 실수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 소설의 결말 부분이다.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오면 어쩌지요? “

“나를 잃어버릴 병이라면?”그레고리우스가 물었다 독사이데스가 그를 바라보았다. 차분하고 굳건한 눈길이었다

“나한테 처방전이 있어요.”

어두워지는 길을 운전하여 병원으로 가는 동안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이라. 프라두가 썼던 글이었다.

독시아데스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아마 별일 아닐 겁니다. 그 의사는 최고입니다.”

그레고리우스는 병원 출입구에서 독사이데스를 돌아보고 손을 흔든 다음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등 뒤에서 문이 닫히고 서서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레고리우스가 들어간 문 뒤의 풍경은 서서히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대개 소설에서 '비'는 일종의 복선으로 불행을 암시하지만 이 소설의 끝 장면에 내리는 비는  그렇게 비극적인 느낌으로 와닿지 않는다. 그것은 아마도 그레고리우스가 적어도 진짜 자기 다운 삶을 살아보았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 때문일 것이다.


라이문트 그레고리우스는 스위스 베른에서 ‘문두스(Mundus : 세계, 우주, 하늘의 뜻을 지닌 라틴어) ’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고전문헌학 선생이다. 반복되는 일상 속 김나지움으로 출근하던 중, 키르헨필트 다리에서 자살을 시도하는 포르투갈 여자를 다리에서 떨어지지 않게 붙잡고, 그녀를 학교로 데려온다. 비에 젖은 채.... 그녀의 입에서 발화되는 ‘포르투게스’라는 말에 홀린 듯 빠져들었다.     

그레고리우스가 라틴어를 좋아하는 이유는 과거의 모든 침묵을 자기 안에 품고 있기 때문이었고 뭔가 대답하라고 강요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라틴어는 그레고리우스에게 있어서 온갖 소란스러움에서 떨어져 있었고 확고부동하며 아름다운 언어였다.         

 동네 책방에서 우연히 '아마데우 드 프라두'라는 포르투갈 의사가 쓴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책을 발견한다. 책방 주인이 포르투갈어로 된 서문을 읽어준다

우리는 많은 경험 가운데 기껏해야 하나만 이야기한다. 그것조차도 우연히 이야기할 뿐. 그 경험이 지닌 세심함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침묵하고 있는 경험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책에 매료된 그레고리우스는 그 책을 사고 지금까지의 익숙한 세계를 떠나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몸을 싣는다. 


김나지움의 교장에게 아우렐리우스 『명상록』에 나오는 문장을 인용 편지를 쓴다

‘ 내 영혼아, 죄를 범하라. 스스로에게 죄를 범하고 폭력을 가하라. 그러나 네가 그렇게 행동한다면 나중에 너 자신을 존중하고 존경할 시간은 없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인생은 단 한 번뿐이므로 네 인생은 이제 거의 끝나가는데 너는 살면서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았고 행복할 때도 마치 다른 사람의 영혼인 듯 취급했다.... 자기 영혼의 떨림을 따르지 않는 자는 불행할 수밖에 없다.’

영혼의 떨림을 쫓아 떠난 여행이었다. 도수 높은 안경, 검버섯이 피기 시작한 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자기 인생으로부터 도망쳐 온 리스본에서 그레고리우스는  의사 프라두 삶의 궤적을 찾아 헤맨다. 

파편처럼 여기저기 흩어진 아마데우 드 프라두를 제대로 알기 위해, 그의 여동생 아드리아나, 멜로디, 마리아 주앙, 주앙 에사, 그의 친구 조르지, 바르톨로메오 신부, 에스테파니아 에스피노자.... 프라두의 글을 통해... 글에 남겨진 흔적들을 더듬어 아마데우 드 프라두라는 개인 삶의 퍼즐을 완성해 나간다.    

           


기가 속해있던 세계 -너무도 익숙한-를 떠난 낯선 곳으로 떠난다. 우연히 손에 넣은 매력적인 책의 저자 아마데우 프라두의 인생을 따라가 보기로 결심한 것. 이것은 사실, 그레고리우스 안에 감추어진 다른 삶의 방식에 대한 열망을 좇는 일이다

저자는 그레고리우스의 입을 빌어 “ 그게 가능할까?” “ 자기 삶과는 완전히 달랐고 자기와는 다른 논리를 지녔던 어떤 한 사람을 알고 이해하는 것이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일까?     

외면상으로 그레고리우스는 비밀스럽고 긴장감 넘치는 프라두의 인생을 추적한다. 프라두의 글을 번역하는 과정을 통해  프라두가 구축해 놓은 사유에 머무르면서 그의 인생을 산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깊은 사유를 함축하고 있는 은유적 표현들이 주를 이룬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건가?” “두 번째로 오는 느낌은 처음 것과 같지 않다. 그것은 반복을 의식함으로써 퇴색된다.” “천박한 허영심은 우둔함의 다른 형태죠. 우리의 모든 행위가 우주 전체로 봤을 때 얼마나 무의미한지 몰라야 천박한 허영심에 빠질 수 있어요. 그건 어리석음이 조야한 형태로 나타난 거예요.” 이 책은 영혼과 이성. 그리고 가슴을 위한 교과서다

                                                                                                        군터 니켈       

우리는 현재를 산다. 예전의 모든 일과 장소는 과거이며, 대부분 잊힌다.

우리 앞에 놓인 시간으로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할까?

무한한 가능성이 있고 깃털처럼 가볍고 자유로우며 불확실함으로 버거워하던 때 그저 꿈같은 소망일 뿐인가?                                                                                                    -리스본행 야간열차 중-


정치적 격변기의 포르투갈, 선망의 대상이었던 프라두는 ‘인간 백정’이라고 까지 불리는 비밀경찰의 목숨을 살려주었다는 이유로 사람들의 지탄을 받는다. 사람을 살려야 하는 의사로서의 의무와 수많은 사람을 정치적 이유로 살해한 인간 백정, 어쩌면 죽어 마땅한 그를 죽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수많은 사람을 살리는 길이 아니었을까로 갈등하고...

그런 양심의 갈등으로 지하 혁명을 돕는 일에 가담한다.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에스테파이나 에스피노자로 인해 평생을 함께한 친구 조르지와의 관계가 무너진다. 사랑과 신의 사이의 갈등이 깊어진다.  

    

 중등학교에서 두 사람을 가르쳤던 바르톨로메우 신부는 "조르지는 여러 가지 점에서 아마데우와 완벽하게 반대였소. 난 아마데우가 완전해지기 위해 조르지를 친구로 선택했단 생각을 하곤 했지. 조르지는 아마데우가 맹렬한 속도를 늦추고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게 해주는 친구였소."라고 그레고리우스에게 말해 준다.     

 


프라두는 파란 병원에서 낮에는 진료를 보고 밤에는 불면증에 시달리며 글을 썼다. 그레고리우스는 프라두의 여동생인 아드리아나를 찾아가는데 아드리아나는 프라두가 죽고 난 후에도 30년 간이나 그의 흔적을 보존하고 있었다.      

"'글을 쓰지 않으면 사람은 결코 깨어 있다고 할 수 없어. 자기가 누구인지 알지 못해. 자기가 어떤 사람이 아닌지는 더욱 알지 못하고.' 하지만 오빠는 아무에게도 글을 보여주지 않았어요."       

아드리아나는 그 책의 출판사가 ‘붉은 삼나무’인 것에 대해 설명한다.

"오빠가 목을 찌르기 직전에, 창밖에 있던 삼나무가 붉게 물들었어요. 핏빛으로.. 그리고 난 정신을 잃었어요."

식사 도중 기도가 막혀 죽을 뻔한 순간 의사시험공부를 하던 오빠가 식사를 하다 말고 식사용 나이프로 아드리아나의 목을 찔러 기도를 확보해 주었던 기억을 더듬는다.     


오빠의 영혼은 다른 그 무엇보다 언어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기에 아드리아나는 오빠의 글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낸 것이리라.      

“오빠는 누군가 지나가가, 흘러가다, 흘러가 없어지다 등과 관련이 있는 단어를 말할 때마다 깜짝 놀랐어요. 말에 격렬히 반응, 말이 사물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듯이, 오빠는 언어에 강박관념을 지닌 것처럼 보였어요.”

두 번이나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오빠에 대한 고마움으로 오빠 병원에서 평생을 간호사로 헌신한 아드리아나는 여전히 파란 병원에서 오빠의 모든 흔적을 유물처럼 지키고 있다. 그가 마지막으로 앉아있었던 의자의 삐딱한 방향까지도 그대로 둔 채..       

자기 고백, 양심 성찰, 갈등과 번민의 흔적들이 담긴 글을 통해서 그레고리우스는 아메데우 프라두의 진짜 모습을 만난다. 


공포는 새로운 인식 때문이 아니야, 무엇에 대한 인식인지가 문제야. 미래의 것이긴 하지만 현재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내 인생의 불완전함. 지금 이미 결핍이라고 느끼는 이 불완전함.  이 결핍이 너무 커서 늘 알고 있었던 사실이 내 안에서 공포로 변해, 완전한 삶, 그게 뭘까? 단편적이고 변덕스러운 날씨처럼 변하기 쉬운 우리 인생을 생각해 볼 때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완전한 삶을 구성하는 건 과연 무엇인가?     


인생이 불완전한 상태로, 토르소로 머물 것이라는 공포, 원하던 모습이 되지 않으리라는 자각, 우리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결국 이렇게 정의했다. 그러나 나는 언젠가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이 될 삶의 불완전함과 부조화를 사람이 경험할 수 없는데 어떻게 그것을 두려워하겠냐고 물었다.      


신의. 난 조르지에게 신의라고 말했다, 우리의 조화는 그 안에서 찾을 수 있다고. 에스테파니아. 우연의 파도는 그녀를 왜 다른 곳으로 밀어가지 않았을까? 왜 하필이면.. 그녀는 왜 우리를 시험대에 세워야 했나?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시험대에? 우리가 통과하지 못한 시험대에. 각자 자기 방식대로 실패한 시험대에..

     


비밀조직의 모든 것을 암기하고 있는 에스테파니아 에스피노자.. 경찰의 추격망이 좁혀오자

조르지는 그녀를 살해하기로 결심한다. 아마데우 드 프라두는 그녀의 탈출을 도우며 그녀와 함께할 설레는 인생을 생각한다.  마리아 주앙, 그리고 아내와는 너무도 다르고 너무도 강렬하게 자신의 영혼을 뒤흔든 여자였기에...

하지만 에스테파이나 에스피노자는 뜻밖의 말을 한다

‘당신, 너무 허기졌어요. 당신과 함께 있어서 행복하지만 당신은 너무 허기졌어요. 그건 당신의 여행, 오로지 당신 혼자만의 여행이에요. 우리의 여행이 될 수 없어요.’ 

에스테파니아 그녀가 옳았다. 타인을 자기 삶의 건축용 석재로, 자기 구원의 경주를 위한 일벌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피니스테레. 그곳에서처럼 정신이 또렷하게 깨어 있었던 적은, 그렇게 차분했던 적은 일찍이 없었다. 그때 이후로 나는 알고 있다. 나의 경주가 끝났다는 것을... 내가 언제나 달리고 있었으면서도 알지 못했던 경주. 경쟁자도 목표도 상도 없는 경주, 완전함? 에스파냐 사람들은‘ 에스페히스모’라고 한다. 그때 읽은 신문에서 유일하게 기억하는 단어 신기루, 환영

우리 인생은 바람이 만들었다가 다음 바람이 쓸어갈 덧없는 모래알, 완전히 만들어지기도 전에 사라지는 헛된 형상이라고... 프라두는 생각하고 그녀를 국경에 남겨두고 파란 병원으로 돌아온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동맥류의 질환을 앓고 있던  프라두, 

작열하는 태양 아래 빠른 속도로 직진하는 삶을 살던 프라두에게 조르지는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쉴 수 있는 나무 그늘 같은 존재였다. 둘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균열이 생긴 뒤 그늘을 잃은 프라두는 열기를 견디다 못해 조르지의 약국에서 도보로 15분이면 갈 수 있는 '아우구스타(Augusta)' 거리에서 쓰러진다.      

아마데우 드 프라두의 묘비명은 

  ˝독재가 하나의 현실이라면, 혁명은 하나의 의무다.˝    

            


그레고리우스는 에스테파니아 에스피노자를 만난다..

팔꿈치를 교탁에 대고 팔을 쭉 뻗고  주제가 바뀔 때마다 교탁을 감싸 쥐는 여자

우체국에서 일했던 여자. 저항 운동의 모든 비밀을 외우고 있던 놀라운 기억력의 소유자

파란 집 앞에서 운전석에 앉아 목숨을 걸고  이 세상의 끝으로 달렸던 여자,  프라두의 여행에 동행하지 않았던 여자. 아마데우 프라두의 생에 가장 크고 가장 아픈 실망과 모욕이 된 여자. 구원을 향한 질주에서 이제 완전히 패배했다는 자각을 준 여자, 막 시작한 뜨거운 인생의 불이 꺼지고 재로 변했다는 느낌을 준 여자..                              

˝죽음에 대한 공포는, 자신이 원하는 사람이 되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공포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이다          

자신에 대해 정말 알고 싶은 사람은 쉬지 말고 광신적으로 실망을 수집해야 한다

실망스러운 경험의 수집이란 그에게 중독과도 같은 것, 삶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중독

실망이 독이 아니라 긴장을 풀어주는 향유, 우리 스스로의 진정한 윤곽이 무엇인지 눈을 뜨게 해주는 향유     

프라두는 자신에 대해 정말 알고 싶은 사람은 쉬지 말고 광신적으로 실망을 수집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실망이라는 말은 실패라는 말과는 다르지만... 실망의 감정은 실패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그러하다면 자신에 대해 정말로 알고 싶은 사람은 광신적으로 ‘실패’의 경험을 수집해야 한다는 의미일까.

우리는 실패가 두려워 몸을 사린다. 나이를 먹을수록 실패의 경험은 가급적 피하고 싶은 두려움이고 그 실패의 결과물은 단지‘ 실망’이라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균일한 삶을 뒤흔드는 강력한 비수가 되기도 한다. 그러하기에 두려운 것이다. 다시는 삶을 이기지 못할 것 같아서...

 남들이 보기에는 흠하나 없는 완벽한 존재였지만 프라두 자신의 내면은 늘 실망과 실패의 감정으로 가득 차 있었으리라. 강압적인 판사 아버지와 자동인형 같은 어머니... 질식할 것 같은 기대와 자신의 열망과 욕구들 사이에서 그는 날마다 실패하고 실망하였을 것이다. 그가 남긴 글은 실패와 실망의 흔적들 인지도 모른다.

     


p316

우리는 시간상으로만 광범위하게 사는 것이 아니다. 공간적으로도 눈에 보이는 것들을 훨씬 넘어서 살고 있다. 우리는 어떤 장소를 떠나면서  우리의 일부분을 남긴다. 떠나더라도 우리는 그곳에 남는 것이다. 우리 안에는, 우리가 그곳으로 돌아와야만 다시 찾을 수 있는 것들도 있다. 단조로운 바퀴 소리가 우리가 지나온 생의 특정한 - 그 여정이 아무리 짧더라도 - 장소로 우리를 데리고 가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가까이 가고 우리 자신을 향한 여행을 떠난다. 우리가 낯선 정거장의 플랫폼에 두 번째로 발을 디디면  그래서 확성기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다른 곳과 확연히 구별되는 냄새를 맡으면 우리는 외형상으로만 먼 곳에 도착한 것이 아니라 마음속 먼 곳에도 이른 것이다.... 승무원이 지명을 크게 외치고 기차가 멈추느라고 내는 끼익 소리를 들으면 역 건물의 그림자가 우리를 삼키기 시작하면 왜 그렇게 가슴이 뛰고 숨이 차는가?.. 낯설면서도 낯설지 않은 플랫폼에 첫 발자국을 디딘 순간부터 그 옛날 기차의 첫 덜컥임을 느꼈을 때 중단하고 떠났던 삶이 다시 시작되기 때문이다. 중단된 삶, 온갖 약속으로 가득한 인생을 다시 시작하는 것보다 더 흥분되는 일이 또 어디 있으랴.

‘지금’과 ‘여기’가 본질적이라는 확신으로 이것에 집중하는 행위는 오류이며 또한 불합리한 폭력이다. 중요한 것은 확실하고 느긋하게, 알맞은 유머와 멜랑콜리로 ‘우리’라는 시간과 공간상의 내적인 경치 속에서 움직이는 일이다. 여행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연민을 느끼는 이유는... 스스로를 향한 먼 여행을 떠나 지금의 자기가 아닌 누구 또는 무엇이 될 수 있었는지 발견할 가능성을 박탈당한 채 살아가기 때문이다.         


수많은 책들에 언급된  carpe diem! 은 파스칼 메르시아의 『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 거침없이 반박을 당한다. '지금’과 ‘여기’가 본질적이라는 확신으로 이것에 집중하는 행위는 오류이며 또한 불합리한 폭력이다. 스스로를 향한 먼 여행을 떠나 '지금의 자기'가 아닌 '누구' 또는 '무엇'이 될 수 있었는지 발견할 가능성을 박탈당한 채 살아가기 때문이라고... 

현재에 충실한다는 이유만으로 지금의 자기 아닌 다른 누구 혹은 다른 무엇이 되었을지도 모를 가능성을 박탈당한 채 살아가고 있다는 그의 말은 프라두의 말이면서 그레고리우스의 말이면서 저자인 파스칼 메르시아(페테 비에리)의 말이기도 하다.

약속으로 가득한 인생을 다시 시작하라고. 설령 그것이 두려움으로 다가오더라도... 프라두가, 그레고리우스가 말한다. 

              


  

P. 543     

그레고리우스가 에스테파니아 에스피노자를 찾아가는 동안 만난 어부에게 삶이 만족스러운지 물었다. 베른의 고전문헌학자인 문두스가 세상의 끝에서 갈리시아 어부들에게 삶에 대한 견해를 묻고 있었다…. 그는 이 상황을 즐겼다. 불합리함과 피로, 과장된 쾌감과 경계를 넘어서, 지금까지 모르던 해방감이 섞인 이 상황을 그는 한껏 즐겼다.

어부들이 질문을 잘 이해하지 못해서 그는 더듬거리는 에스파냐어로 두 번 더 물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한 명이 큰 소리로 대답했다.

“만족하냐고? 다른 삶은 모르는걸!”

어부들의 웃음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나중에는 그칠 줄 모르는 웃음바다로 변했다. 그레고리우스도 얼마나 흥겹게 따라 웃었던지 눈물이 흐를 지경이었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만족하냐고? 다른 삶은 모르는걸.... 다른 삶을 살아보는 일은 어렵다. 그러나 내 안의 수많은 나를 끄집어내어 살아볼 수는 있지 않은가?  그 마저도 쉽지 않다.      

우리 안의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내 안의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항상 누군가의 무엇이 아닌 ‘나’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지금은 나로 살고 있는가? 오롯이 ‘나. 순도 100%의 ’나‘로?

그렇지 못하다는 것은 스스로가 누구보다 더 잘 안다. 나는 적당히 타협해 버리곤 했으니까..

오롯이 나로 살기 위해서는 프라두가 말한 ‘타인은 너의 법정이다.’는 말에 의연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으니까. 타인의 시선을 늘 의식할 수밖에 없는, 타인의 입맛에 맞출 수밖에 없었노라고 이야기한다면 너무 구차한 변명일까?

일관되게 ‘나’로 살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나는 내 안의 ‘나’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내 안의 아주 작은 부분의 ‘나’. 그것을 바라보고 ‘나’로 자각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원작과 비슷한 듯하면서도 결말이 다르다.

리스본의 안과의사 마리안나 주앙이 스위스로 돌아가려는 그레고리우스에게... 여기 리스본에 남는 것도 새로운 인생을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홀연히 그가 교탁에 책을 두고 리스본으로 떠나온 것처럼 인생은 때로 '우연의 힘'을 따라가는 것도 중요하다는 말처럼 들린다. 영화 속 그레고리우스는 아마도 리스본으로 돌아오지 않았을 것만 같다. 무언가 보이지 않은 흥분과 설렘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아갈 의무가 남아있으니까. 

그레고리우스가 리스본으로 떠나기 전 교실 안의 아이들의 모습을 찬찬히 바라보며 아이들에게는 아직 남아있는 날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무수히 많은 것을 경험하게 될 아이들을 생각한다... 그러나 졸업 후 거리에서 마주친 학생들(이제 학생이 아닌 성인이 된)은 삶에 찌들려있다. 찬란한 가능성은 어디로 가고 하나같이 일상에 지친 초라한 어른의 모습이다.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결정적인 순간은 격렬한 내적 동요를 동반하는 요란스러운 순간이 아니라고 프라두는 적고 있다. '소리 없는 우아함'이라고....


우리는 스스로의 인생을 다시 한번 제대로 살아볼 의무와 권리를 동시에 지닌다. 소리 없는 우아함 속에서 

아직 다 타오르지 않은 자신의 일부를 꺼내어야 한다는 것을.... 파스칼 메르시아는 이야기한다.

저마다의 리스본으로 가는 야간열차는... 아직 출발하지 않았다고... 기차역으로 달려가기만 하면 된다고..

 /려원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도서 선정

나는 나를 다 써버리고 싶다....


내가 존재하는 것은 삶이 나에게 묻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나 자신은 세상을 향해 던져진 하나의 물음이며

나는 그 물음에 대해 해답을 제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단지 세상이 주는 답에 따라 살뿐이다/ 칼융


 니체는 자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그대들은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라고 묻는다. 온전히 나로 살아보는 일과 자신을 극복하는 일은 전혀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같은 의미다.... 나를 극복하지 못하고 적당히 타협해 버린 시간이 얼굴에 원하지 않는 자화상을 그려버린지도 모른다. 내 속에서 솟구쳐 올라오는 '나'를 온전히 다 써버린 순간이 찾아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거울 속에 도착한 자신을 기쁨으로 맞이할 때가 오기를...  p 34(삶은 하나의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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