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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여인과 사자 그리고 움켜쥔 지팡이

앙리 루소 <잠자는 집시 여인>

앙리 줄리앙 펠릭스 루소(Henri Julien Félix Rousseau), Henri Rousseau     

출생 1844년 05월 21일

사망 1910년 09월 02일

국적 프랑스     

입체파의 선구자로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환상과 사실이 교차된 작품 세계가 특징이다.


“이국의 낯선 식물을 볼 때면 나는 꿈을 꾸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원시 정글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려낸 앙리 루소.

어떤 유파에도 속하지 않는 그의 그림은 후일 (Naive Art)로 불리기도 한다. 미술에 대한 어떤 교육도 받은 적이 없는 그는 원근법이나 인체 비례 등의 기법과는 상관없이 모든 요소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묘사했다.     

생계유지를 위해 파리의 세금 징수소에 취직했고 40대에 이르러서야  루브르 박물관에서 그림을 모사하며 독학으로 그림 공부를 한다.

병에 걸린 아내와 7명의 아이들을 위해  주 60시간씩 일하며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당시 화가들의 관심사였던 빛이나 색채 표현, 이미지의 왜곡 등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스스로를 사실주의자라고 생각했던 만큼 대상을 꼼꼼히 묘사했으나, 현실 속 대상과 닮지 않았다는 평을 들어야 했고  전시회에 출품한 뒤에도 오래도록 화가 루소가 아닌 ‘두아니에(le douanier, 세무공무원)’라고 조롱을 받았다. 

작품을 직접 손수레에 싣고 돌아다니며 팔기도 했던 그에게 예술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비웃음, 궁핍, 인정받지 못함, 아내와 아이 네 명을 결핵으로 먼저 떠나보낸 슬픔.....

그 모든 것을 딛고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열정’이었을까? 49이라는 젊지 않은 나이에 전업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그에게 세상의 시선은 어떠했을지....

               


우리에게 친숙한 작품 〈잠자는 집시〉는 단순한 구성, 섬세하게 표현된 색과 선, 현실과 비현실, 초현실이 공존하는 느낌을 준다.        

                 

사막으로 보이는 공간. 갈기를 휘날리고 꼬리를 사자 한 마리가 있다

검은 피부의 집시여인 지팡이와 토기 물병과 만돌린. 지팡이. 무지갯빛 줄무늬 옷.

여인은 잠들어 있다.

걸어온 길, 걸어가야 할 길.....

지금은 잠시 잊는다.

다만 잠을 자는 도중에도 지팡이를 움켜쥔 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무장해제된 잠이 아닌 것... 만돌린이라는 유희와 아마도 물이 담겨있을 토기는 옆에 놓아두더라도

끝없이 걸어야 할  방랑자에게 필수인 지팡이는 자면서도 놓을 수 없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을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지키기 위한 수단이었을까.     

꿈을 꾸고 싶다. 억지로라도, 지어서라도, 거짓으로라도... 

그러나 꿈을 꿀 수 없는 현실. 그녀에게 실재한 것은 움켜쥘 수 있는 지팡이뿐

움켜쥘 수 없는 꿈의 덧없음과 움켜쥘 수 있는 지팡이......     


편안함과 안락함과는 거리가 먼 곳. 그러나 그녀가 몸을 누인 곳은 그곳이 어디든 그녀의 침실이다. 그녀의 방이다. 그녀의 부엌이다. 그녀의 거실이다. 그녀의 집이다. 그녀의 천국이다     

무지갯빛 꿈을 꾸길 바라는 것일까?

검은 피부와 도드라져 보이는 화사한 줄무늬옷..

동그란 달. 검푸른 하늘. 여인에게 다가와 속삭이는 사자 한 마리.

떠돌이 사자와 떠돌이 여인.. 사막 한 복판, 잠든 집시여인과 사자. 루소는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을까? 


 루소는 평생을 가난했고 작품으로 성공하고자 했던 그의 꿈은 후대에 이루어진다.

그의 초상화.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드러나는 그의 초상화

때론 사람은 그런 무모해 보일 정도의 열정이 있어야 할까?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사자와 집시여인은 몽환적이고 어딘지 모르게 이야기가 숨어있을 것만 같다.

온전한 의미는 오직 그림을 그린 루소 자신만이 알고 있을 것이고 지금의 우리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일 뿐이다. 

    


<여름 소묘 >

                    프리드리히 헤벨

여름의 마지막 장미가 피어 있는 것을 나는 보았다

그것은 마치 피를 흘릴 듯 붉은 빛깔이었다

그 옆을 지나가면서 나는 몸서리치며 말했다

삶에서 이렇게 멀리 왔으니 이토록 죽음에 가까이 왔구나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뜨거운 한낮에

하얀 나비 한 마리가 아주 조용히 날아갔다

그러나 날갯짓이 대기를 살짝 스치기만 해도

대기는 그것을 알고 사라져 버렸다



어느새 8월의 마지막 날이다. 햇살의 강도가 약해졌다. 여름 하늘을 가르며 새 한 마리 날아간다.

마지막 장미가 피 흘리듯 붉게 피어있는 뜰을 지난다

한 여름을 뜨겁게 보냈음을 온몸으로 입증하려는 장미... 

대체 나는 무엇을 하며 이 여름을 보낸 것일까. 맹렬하지도 치열하지도 무모하지도 않은 채로

부끄럽고 게으른 시간을 보내버린 것은 아닌가.

여름이라는 이유만으로.. 해야 할 모든 것들을 슬그머니 뒤로 미룬 채로

공백이 되어버린 8월이다.

무엇을 했을까 나는... 달력을 바라본다

메모 가득한 달력........... 이루어진 것은 별로 없다.

잠을 자면서도 지팡이를 움켜쥔 집시 여인을 생각한다. 이 뜨거움의 끝에서...

끝내 놓아 버려서는 안 되는 것들을. 그 어떤 변명이나 핑계를 댈 수 없는 소명 같은 것들을 생각한다. 이천 이십삼 번째의 여름을 건넌다./ 려원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아르코 문학나눔 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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