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솟구치는 말들, 가장 용감한 단어는 여전히 비겁하고..

정신을 차리고 길을 걷는다 빗방울 까지도 두려워하면서


<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베르톨트 브레히트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당신이 필요해요.”  

   

그래서

나는 정신을 차리고

길을 걷는다

빗방울 까지도 두려워하면서

그것에 맞아 살해되어서는 안 되기에     

김난주 옮김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남풍, 1988)          


이 시를 신형철의 『인생의 역사』 (P22~23)에서 읽었을 때는 베르톨트 브레히트와  루트 베를라우의 연시(사랑 시)로 생각했다. 누군가 내게 ‘당신을 사랑한다’의 표현을  ‘당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면 당연히 정신을 차리고 길을 걸을 수밖에 없을 테니까. 지구상에 ’ 사랑‘이란 이름으로 불릴 사람을 위해 하늘에서 내리는 빗방울마저도, 눈송이마저도.... 심지어 불어오는 바람마저도 위험 요인으로 다가올 수 있으니까. 나를 필요로 하는 누군가를 위해서 ’함부로‘ 죽어서는 안 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작년 이 책을 읽던 때와 전혀 다른 느낌으로  요즘 이 시가 읽히는 이유는 날마다 전해지는 소식들이 참혹한 것들이어서일까? 특히 

"나는 정신을 차리고

길을 걷는다

빗방울 까지도 두려워하면서

그것에 맞아 살해되어서는 안 되기에" 

    

이 부분을 읽다 보면 최근 벌어진 무차별 흉기 난동이나, 성폭행, 살인 사건 등이 연관되어 떠오른다. 뇌에 본능적으로 “정신을 차리고 빗방울까지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이 마치 각인되어 있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걷던 산책길, 산길... 그렇게 위험한(?) 시간이 아님에도 자꾸만 뒤돌아봐지고 뒤따르는 누군가, 혹은 마주 오는 누군가를 잠재적으로 위험을 줄 수 있는 사람처럼 두려운 마음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 감정은 아마도 마주 오거나 뒤따르는 상대방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불신 시대다....     

 


결국 사건 발생 이틀 만에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는 30대의 그녀를 생각하며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시 <단어를 찾아서>를 떠올린다.    

어떤 단어로 그녀의 죽음을 위로할 수 있을까.

어떤 단어로 이 사회의 악을 표현할 수 있을까

또 어떤 단어로 그 불행한 순간을 설명할 수 있을까

어떤 단어로도..... 아무리 뒤져보아도 타인의 생명을 앗은 자를 이해할 단어를 찾을 수 없다

개인의 광기, 개인의 문제, 개인의 질환, 개인의 사정, 개인의 악...

사회의 광기. 사회의 문제, 사회의 질환. 사회의 사정, 사회의 악....

‘개인’이란 단어에 ‘사회’라는 말을 집어넣어도 하나도 어색하지 않다     

어떤 단어로... 이런 무자비하고 추하고 두려운 사회를 설명할 수 있을까..


그저 건강을 위해 산길을 걸었고 누구보다 열심히 살고자 했던 한 사람이

낮 11시 40분이라는 도무지 위험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시간에 참혹한 일을 당했다.

어떤 단어로 그 참담함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 어떤 단어로 그녀의 마지막 외침을 설명할 수 있을까....          


<단어를 찾아서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솟구치는 말들을 한마디로 표현하고 싶었다

있는 그대로의 생생함으로

사전에서 훔쳐 일상적인 단어를 골랐다

열심히 고민하고, 따져보고, 헤아려보지만

 그 어느 것도 적절치 못하다     


가장 용감한 단어는 여전히 비겁하고

가장 천박한 단어는 너무나 거룩하다

가장 잔인한 단어는 지극히 자비롭고

가장 적대적인 단어는 퍽이나 온건하다     


그 단어는 화산 같아야 한다

격렬하게 솟구쳐 힘차게 분출되어야 한다

무서운 신의 분노처럼

피 끓는 증오처럼     


나는 바란다. 그것이 하나의 단어로 표현되기를

피로 흥건하게 물든 고문실 벽처럼

내 안에 무덤들이 똬리를 틀지언정

나는 정확하게. 분명하게 기술하고 싶다     


그들이 누구였는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지금 내가 듣고 쓰는 것, 그것으로 충분치 않다

터무니없이 미약하다     


우리가 내뱉는 말에는 힘이 없다

그 어떤 소리도 하찮은 신음에 불과하다

온 힘을 다해 찾는다

적절한 단오를 찾아 헤맨다

그러나 찾을 수가 없다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                



         

<크나큰 고통을 겪고 나면 형식적인 감정들이 온다>

                                                                   Thomas H  Johnson

     

크나큰 고통을 겪고 나면, 형식적인 감정들이 온다. 

신경은, 마치 무덤에서처럼. 의식을 치르듯 가라앉고

뻣뻣한 심장은 묻는다. ‘견뎌낸 게 그인가요?’

어제인가요 아니면 수천 년 전 일인가요?     


발은, 기계적으로 돌고 돈다.

마치 나무인양

굳어진 발길이

땅, 하늘, 혹은 그 어디로 향하건

돌덩어리 같은, 석영의 만족에 이른다.     


이것은 납덩어리의 시간,

고통에서 살아남으로면, 되돌아볼 테지

얼어가는 사람이 눈을 생각하듯이

처음에는 냉기, 다음에는 혼미, 그러고는 방기,          


크나큰 고통 뒤 형식적으로 무뎌지고 싶지 않다

그저 나 아니면 다행이라고 치부할 일인가...

납덩어리 같은 마음으로.... 나는 살아남았으니 다행이라는 조악한 단어로.... 

그렇게 세상을 살아가고 싶지 않다

냉기와 혼미와 방기와.... 집단 무의식... 냉담... 무덤덤...     

8월도 끝을 향해간다.  그 찬란한 태양, 

무더위의 절정에서 나는 나의 심장이 형식적으로 무뎌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살아 움직이기를 끝없이 애도하고 끝없이 기억하기를..... /려원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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