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용기를 내보는 건 아직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봄볕에는 눈물도 찬란하게 빛난다. 영화 <69세> 임선애 감독
영화 <69세> 임선애 감독 / 예수정. 기주봉 출연
제 애기가 여러 사람을 불편하게 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용기를 내보는 건
아직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후회하는 시간도 많았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뒷걸음질 치며 살아왔습니다
그늘에 숨어 잊혀지기를 바라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이제 전 어려운 고백을 시작으로
봄 볕에 눈물도 찬란하게 빛난다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참으로 살아가보려 합니다
한 걸음 한 걸음
햇빛으로 나아가보려 합니다.
69세 심효정
영화 < 69 세>
임선애 감독의 장편데뷔작으로 성폭력의 사각지대에 놓인 노인의 현실과 여성의 부조리한 현실을 영화에 담아내고 있다.
69세 심효정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29세 남자 간호조무사에게 성폭행 일을 당한다.
“안 되겠어요. 그 간호조무사를 신고해야겠어요.”
긴 고민 끝에 효정은 동거 중인 남동인(시인이자 책방주인)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경찰에 신고하지만 간호조무사가 효정과 합의한 성관계라고 주장하자, 효정과 동인은 충격에 빠진다.
심지어 담당 경찰마저도 “(남자 간호조무사)의 친절이 과했네.”라는 농담을 하기도 하고
함께 온 남동인에게 법적인 부부관계가 아니면 어떤 관계인지를 묻는다.
동인은 큰 소리로 “ 그래요. 우리는 동거하는 관계요.” 하자
경찰은 마치 ‘나이 먹어서도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구나.’ 하는 표정을 짓는다.
‘동거’라는 말이 같은 아파트에서 공간을 나누어 쓰는 SHARE HOUSE의 개념인데도 상당히 나이 들어 보이는 두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은 ‘동거’라는 원래의 의미보다는 세속적인 의미(부정적인 뉘앙스)의 ‘동거’로 해석하는 것이다.
가해자나 경찰은 일단 69세의 효정이 치매기가 있어서 가해자를 오해하는 것으로 몰아가기도 한다.
거짓말 탐지기 결과는 피해자에게 유리하게 나왔지만 법원도 나이 차이를 근거로 사건의 개연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를 들어 구속영장을 자꾸 기각한다.
“ 형사님, 만일 고소인이 69세 노인 여자가 아니라 젊은 여자였다면 가해자는 구속되었을까요?”
효정의 외로운 싸움이 시작된다.
효정은 가해자가 누구인지 모두가 아는 상황에서 이제 자신이 피해자임을 스스로 증명해야 한다.
“CCTV에 성폭행 장면이 찍혔어도 성폭행당한 것을 증명해야 했을 것이다”라는 심리치료사의 말은 효정이 처한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친절이 과했다느니, 몸매가 처녀같이 늘씬하다느니, 그 나이에 옷을 잘 입는다느니, 조심 좀 하지 그랬냐느니, 효정은 영화 내내 노인 여성을 무성적인 존재로 보는 사회적 편견과 끊임없이 부딪친다.
효정에게 유리한 진술을 해줄 수 있는 병원의 수간호사조차도 병원 이미지 때문에 자신이 그런 사건에 연루되는 것을 두려워하며 “좀 조심하지 그러셨어요?”라고 말한다
효정은 이에 “ 조심이요? 무엇을요? 어떻게요?”
수간호사의 말은 어쩌면 우리도 흔히 내뱉는 말이기도 하다
누가 어떤 피해를 당했을 때 아무 생각 없이 ‘좀 조심하지 그랬어?’
생각해 보면 잔인한 말이었음을 이 영화를 통해 실감한다
담당 형사는 “그 나이에 옷을 참 잘 입으시네요.”
“네? 잘 입는 다고요?. 나이 들어서 옷을 잘 입지 않으면 추해 보여요. 아무나 집적대고요”
“ 그래요. 이 정도 입고 다니면 제가 안전해 보입니까?”
남들에게 추해 보이지 않고 무시당하지 않고 공격당하지 않을 정도의 안전한 옷차림을 고민해 본다.
영화 <69>는 2012년 8. 12 경기도 평택 어느 병원에서 발생한 60대 여 환자를 30대 남자 간호조무사가 성폭행한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젊은 남자가 뭐가 아쉬워서 노인을 건드려. 늙은 여자가 꼬신 거겠지...
극심한 2차 가해. 악의적 모욕과 조롱 속에 여러 차례의 현장 검증, 당시 상황 재현이 반복된다.
결국 ‘ 만일 내가 아이였거나 젊은 여자였다면 사람들은 나를 믿어주고 그놈은 구속되었을 것’이라는 유서를 남기고 투신 자살한다.
다행히 영화 <69세>에서 효정은 자살하지 않는다.
성폭행을 당한 상황에서 자살을 생각하고 병원 옥상까지 올라갔었지만 이제 효정은 달라졌다.
가해자 이중호를 처벌하기 위해 먼저 그의 여자 친구 부모 펜션에 ‘고발문’을 둠으로써 이중호의 두 얼굴을 알린다. 이중호와 결혼할 여자가 만삭의 임산부인 것을 보고 마음이 흔들리지만 그러하기에 더욱 진실을 알려야 했다. 아이가 세상에 나왔을 때 성폭행 범죄자를 아빠로 만나서는 안 되는 일이니까.
돌아오는 길 이중호와 마주치는데 “인생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아..”라는 말로
더 이상은 뒤로 물러서지 않을 거라는 의지를 표현한다.
한 걸음 한 걸음 햇볕으로 나아가는 길.
진실은 묻히고 2차 가해에 시달리고
어느 누구도 효정의 편이 되어주지 않더라도...
그녀의 손으로 그녀의 억울함은 알려야 한다
병원 옥상에서 투신하는 대신 효정은 자필로 쓴 고발문을 복사해서 날린다. 하얀 종이들이 날개가 달린 것처럼 날아간다. 그녀는 죽지 않았다. 그렇게 날아간 진실이 세상 어딘가에 반드시 내려앉을 것이다
성폭력 가해자를 처벌하는 내용인 줄 알았던 영화는 여자이면서 노인인 효정이 존엄을 지키는 과정으로 변화한다. 마침내 효정은 모든 치욕과 부조리의 터널을 통과한다. 아무도 인정하지 않더라도.
영화 <69세> 예수정이라는 연기자를 새롭게 만날 수 있었다.
하얀 백발, 꾸미지 않은 얼굴. 담담하고 진지한 어조.... 심효정 역할에 잘 어울리는 배우였다.
나이 들어서 잘 입고 다녀야 하는 것은 ‘안전해지기 위해서’라는 말이 가슴을 울렸다
“형사님, 이 정도 입고 다니면 제가 안전해 보입니까?”
그녀의 말이 오래도록 남았다.
누구나 노인이 된다. 69세 요즘 기준으로 하면 69세는 노인(?)의 나이도 아니다
끝없이 무언가를 해야 하는 나이, 먹고살기 위해서, 여가를 위해서, 건강을 위해서... 자식에게 의지하지 않기 위해서.... 69세까지 살 수 있을까. 살 수 있을지 살 수 없을지 장담할 수 없다.
인생의 시간을 돌아보면 아홉으로 끝날 때마다 새로운 시기가 펼쳐진 듯하다.
19는 십 대의 끝이었고 대학생활의 시작. 29는 어쩌면 결혼이라는 단어가 심각하게 다가오는 나이. 39... 49... 59.. 69... 79... 89...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위로를 하지만 사실은 숫자에 불과하지 않다
오래도록 거울을 들여다보면 예전의 나와는 다른, 전혀 다른 사람처럼 낯설어 보일 때가 있다.
영화 < 69세 > 개봉되었을 때 여성 중심적인 시선으로 전개되고 남성들을 잠재적 가해자(?)로 몰아간다는 비난도 있었지만 이 영화는 페미니즘 영화는 아니다.
여자 사람과 여자 노인, 남자 사람과 남자 노인
노인이 된다고 해서 여자가 아닌 것은 아니다. 노인이 된다고 해서 남자가 아닌 것은 아닌 것처럼....
여자 사람도 남자 사람도 누구나 ‘노인’이 된다....
영화 속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 “세상에는 버려야 할게 쓰레기만 있는 게 아니라니까”
라는 대사가 나온다. 언젠가는 폐기(?) 될 운명의 사람. 그래도 살아있는 동안은 존엄을 지키며 살아야 한다
영화 속 심효정이 “ 제 애기가 여러 사람을 불편하게 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용기를 내보는 건 아직 살아있기 때문”이라는 말처럼 우리는 아직 살아있다.
살아있기에 우리는 누구나 낡아가고 늙어간다.
늙어가고 낡아갈 기회조차 갖지 못하고 환갑도 되기 전 세상을 떠난 나의 아버지를 생각하면 아쉬운 마음이 들다가도 지금 살아계신다면 어느 요양병원 병실에 누워계시거나... 아니면 치매에 걸려 딸마저도 몰라볼 수 있을 상황을 염두에 두면 ‘늙지 않은 나이’에 돌아가시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란 생각도 든다. 늙음은 건강과 제일 먼저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더 자신이 없어지고 두려운 마음도 든다.
어제와 오늘의 나는 다르다.
내일의 나는 또 얼마나 달라져있을까?
결국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를 만들었고 오늘의 내가 내일의 나를 만들어간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여자이며 언젠가는 노인이 될..... 어쩌면 노인이 되지 못할 수도 있는.....
그럼에도 오늘 나는 살아있기에.... 오늘을 살아야 한다. / 려원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도서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선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