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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희이자 상실이며 일탈이고 완전한 결핍인 빨간 풍선

이미, 또 언제나 출발하고 있어야 한다/ 파울클레의 빨간 풍선

“ 이 세상이(바로 오늘날처럼) 점점 끔찍해질수록, 예술은 점점 추상적이 된다. 반면 행복한 세상은 지금, 여기를 지향하는 예술을 만들어낸다.”

                                                                                                                    파울 클레          

 

     빨간 풍선 - 1922. (31,7 x 31,1 cm). 파울클레 Paul Klee 


회색 벽과 벽사이... 기하학적이 도형들이 있다. 회색의 꿈을 꾸는 도시.

서로 맞물린 것들, 겹쳐

진 것들.. 나무처럼 보이는 것도 있고 무언가를 바라보는 푸른 눈처럼 보이는 것도 있다...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살아있는 것은 없다. 

작품의 중앙에 위치한 빨간 풍선만 살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누군가가 하늘로 쏘아 올린 작은 공처럼..

화가의 작품을 이해하기란 늘 어렵다. 미술에 대한 전문적 지식도 없거니와 해석하는 안목도 높지 않다

그러하지만 화가의 마음에 다가가고 싶다. 저 그림을 그리던 1922년의 파울 클레의 마음속으로 나는 빨간 풍선을 타고 날아간다.

쉼 없이 솟구치는 것들, 빨간 것들, 스며드는 것들, 비상하는 것들

환희이자 상실이며 일탈이고 완전한 결핍이기도 한,

바람의 춤이며 가학적인 태양의 유희이기도 한 저 빨간 풍선 안에는 대체 무엇이 담겨있을까?


경직에서 벗어나 꿈틀거리는 것을 표현하려는 클레의 마음속으로, 내 유년의 빨간 풍선 속으로

꼭 붙잡고 있었지만 놓쳐버린 빨간 풍선에게로... 팽팽하게 부풀어있던 것이 왜소해져 가는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하던 어리석음의 시기로... 날 것의 순진함 속으로....

나는 수없이 많은 빨간 풍선을 잃어버렸다.

길을 잃어버리고 방향을 잃어버리고  목표를 잃어버리고..

하늘이 꿀꺽 삼켜버린 내 빨간 풍선들을 무력하게 바라보기만 했던 어느 시절로...     


볼을 부풀리며 숨을 불어넣던 시간이 있었다.

납작하게 누워있던 풍선이 비로소 살아있는 ‘몸’을 갖게 되는 순간 사람의 숨이 풍선의 숨이 된다. 

팽팽해진다. 터지기 직전의 긴장 같은 팽팽함

하지만 사람이 불어넣은 숨은 오래가지 않는다. 고무입자와 입자사이 보이지는 않는 미세한 구멍들 사이로 숨이 스멀스멀 빠져나온다. 생각해 보면 팽팽한  유희의 사물이 점점 사그라드는 시점은 관심이 사라져 가는 시점과 일치한다.

어린 시절 나는 유독 빨간 풍선에 집착했다. 색색의 풍선이 있더라도 빨간 풍선이 없으면 내겐 풍선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처럼 여겨졌다.  그 빨간 풍선들... 그 안에 담아놓은 것들... 열정, 욕망, 꿈, 설렘,  기대... 아직 오지 않은 수많은 미래들....



< 빨간 풍선 >

      

언젠가 내게도

빨간 풍선 같은 소녀가 하나 있었지     

......    

빨간 풍선은 높이 올라갔지

내 심장의 꼭 쥔 주먹이

종이처럼 스르르 

펼쳐졌을 때


    너는 얼마나 멀리 날아갈까

    네 몫의 어리석음으로부터     


언젠가 풍선은 팡 터지겠지

.....

늘 쏟아지는 나의 하늘

풍선 조각이 떨어진, 빨간 구석     


언젠가

내게도 빨간 풍선 같은

소녀가 있었지

아니 소년? 빨간 풍선이었던가?     

   너는 얼마나 멀리 날아갈까

      네 몫의 아름다움으로부터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 / 문학과 지성사/ 진은영     


얼마나 멀리 날아갈까. 네 몫의 어리석음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날아갈까. 네 몫의 아름다움으로부터...


우리 안의 빨간 풍선과도 같은 소년 혹은 소녀... 

" 나는 이미 한 때 소년이었고 소녀였으며 덤불이었고 새였고, 바다에서 뛰어오르는 물고기였으니."

엠페도 클래스.


나는 이미 한 때 소년이었고 소녀였으며 부유하는 빨간 풍선이었으며, 심장이 찢진 빨간 풍선이었으며 다하지 못한 말들로 팽창한 빨간 풍선이었으며... 부끄러움으로 가득한 빨간 풍선이었으며.... 언젠가는 터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어리석은 빨간 풍선이었으며...... 그리하여 준비 없이 터져버린 빨간 풍선이었으며... 


< 작은 풍선이 있는 정물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죽음의 순간에 이르면

추억을 되돌리기보다

잃어버린 물건을 되찾고 싶다

......

바람이 빼앗아 달아났던

작은 풍선을 다시 찾을 수 있었으면

내가 한 번쯤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쯧쯧, 여기엔 이제 풍선을 가지고 놀 만한 어린애는 없단다.”     

자, 열린 창문으로 어서 날아가렴

저 넓은 세상으로 훨훨 날아가렴

누군가 제발 큰소리로 “저런” 하고 외쳐주세요!

바야흐로 내가 와락 울음을 터뜨릴 수 있도록              

 

                      <끝과 시작> / 문학과 지성사/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죽은의 순간에 이르면 추억을 되돌리기보다 잃어버린 물건을 되찾고 싶다는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말에 공감한다.  아마도 잃어버린 물건의 리스트에는 빨간 풍선도 있을 테니까...

바람이 낚아채서 달아나버리던 그 작은 빨간 풍선을....

이제 풍선을 가지고 놀 어린아이는 없다. 그러나 가슴 안에는 여전히 터지지 않은 빨간 풍선 하나가 있다


빨간 풍선에 집착하는 어린 날의 내가 아직 내 안에 존재한다. 

잃어버린 빨간 풍선이든.. 아직 날려 보내지 못한 빨간 풍선이든.. 가슴 안에서는  온전한 풍선이다.

빨간 풍선 하나 지키기 위해..... 

이제는  큰 소리로 와락 울음을 터뜨리는 어린아이가 되고 싶지 않기에..


나는 여전히 이곳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을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

지속적으로 해야 할 바로 '그것'이 무엇인지 나는 명확히 알지 못한다. 

다만 '생'이라는 주어진 시간에 

이미, 또 언제나 출발하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만을 기억할 뿐.....   /려원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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