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19문반의 신발이 왔다

고흐의 신발과 아버지의 신발 그리고 박목월의 시 <가정>

“나는 가난할 테고, 그림을 계속 그릴 것이며, 한 사람의 인간, 자연인이 될 것이야. " 

  

고흐는 왜 신발을 그렸을까.     

프랑스 초기 인상주의 화가들은 작품 습작시 신발이 연습하기 용이한 대상이었을 수도 있고

고흐의 경우는 모델료가 부담되는 경제적 형편 때문에 신발을 그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이유만으로 고흐가 신발에 그토록 천착한 것을 온전히 설명할 수는 없다.     

신발을 그린다는 것은 그 신발을 신는 이의 인생을 그린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어떤 신발을 즐겨신느냐는 그 사람의 직업이나 현재 상황이나 취향, 삶의 모습 등을 반영한다.     


그림 속 어둡고 낡은 신발은 당시 노동자들이 즐겨 신는 구두이며 고흐 자신이 100킬로미터도 넘는 먼 거리를 걸었던 구두라고도 한다. 어떤 목적으로든 걷는 일은 고독하고 괴로운 작업이다. 


빈센트 반 고흐의 신발에 대해 하이데거는 <예술 작품의 근원>에서     


“반 고흐의 그림은 농부에게 이 신발 한 켤레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신발이 닳아빠진 내부 어두컴컴한 틈으로 노동의 고단한 발걸음이 응집되어 있다. 이 단단하고 묵직한 낡은 신발 안에는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끝없이 펼쳐진 채로 언제나 변함없는 밭두렁 위를 걸었던 힘겨운 발걸음이 쌓여있다. 가죽 위에는 촉촉하고 기름진 진흙이 묻어있다. 황혼이 내려앉을 무렵 이 신발은 밭 사이로 난 오솔길을 타박타박 걸으며 집으로 향한다. 신발 안에는 대지의 소리 없는 외침이 울리고 있으며 잘 여문 곡식에게 선사하는 대지의 선물이 드러나있다.  또한 

한가로운 겨울 황폐해진 전원 속에서 잠든 대지의 나른한 겨울잠을 암시한 이 신발에는 양식을 걱정하는 농부의 근심과 함께 궁핍함을 이겨낸 무언의 희열, 출산으로 고통스러워할 때의 떨림, 죽음이 다가올 때의 전율이 담겨있다. 이 신발은 대지에 속하는 것이다....”     


신발을 모티브로 한 정물화는 총 7점으로 주로 프랑스와 아를 시기에 그려졌는데 프랑스 시기에 그려진 그림으로는 '구두 한 켤레'(1886년 ), '구두 세 켤레'(1886년 12월) 등 5점이고, 아를 시기에는 '나막신 한 켤레'(1888년)와  '구두 한 켤레'(1888년) 2점이다.     

고흐의 신발 그림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의 삶이 보인다.

궁핍하고 고독하고... 그럼에도 삶의 의지와 예술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않았던 고흐의 모습을 그려본다

  “나는 가난할 테고, 그림을 계속 그릴 것이며, 한 사람의 인간, 자연인이 될 것이야."라는 그의 독백이 들리는 것만 같다. 


 박목월의  '가정(家庭)'이라는 시가 있다. 나는 늘 이 시의 제목을 ‘신발’로 착각하곤 한다.

아마도 

“굴욕(屈辱)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구문반(十九文半)의 신발이 왔다. “라는 구절 때문일 것이다.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강아지 같은 자식을 위해 19문반의 신발이 걸어왔다는 표현이 가슴을 친다.               


가정(家庭)

                                    - 박목월


지상(地上)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

아니 현관(玄關)에는 아니 들깐에는

아니 어느 시인(詩人)의 가정(家庭)에는

알 전등(電燈)이 켜질 무렵을

문수(文數)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십구문반(十九文半).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육문삼(六文三)의 코가 납짝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얼음과 눈으로 벽(壁)을 짜올린

여기는

지상(地上).


연민(憐憫)한 삶의 길이어.

내 신발은 십구문반(十九文半).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屈辱)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구문반(十九文半)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 「박목월 시 전집」(이남호 엮음·해설, 민음사) 중에서     


박목월 시인의 시 '가정(家庭)'은 1961년 작품으로 당시 시인의 나이가 46세 무렵이라고 한다. 

 '지상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이  있다.  아홉 켤레의 신발을 위해 시인의 십구문반 신발은

눈과 얼음의 길,  얼음과 눈으로 벽을 짜올 린... 지상의 힘든 길을 걸어온다.


지상에서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어설픈 아버지 역할.... 어설픈 부모의 역할....

세상에서 어떤 역할을 하며 살아가기란 참 어렵다. 그러하기에 나는 그의 오래된 시 '가정'에 구구절절 공감하는 것이다. 의무와 책임의 무게....육문삼의 코가 납작한 막내둥이 신발 때문에 십구문반의 신발은 쉴 수가 없다. 사랑해서, 귀여워서, 가여워서.... 어떤 형태로든 살아야 하기에....


아버지의 검은 구두 생각이 났다.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 구두를 차마 버리지 못하고 댓돌 위에 오래도록 놓아두었던...  아무도 신을 이 없었던 아버지의 구두.

구두코가 햇살에 반짝였다. 구두 안에 드러누운 햇살, 먼지와 바람... 기다림과 고독. 뒷굽이 그의 걸음걸이에 따라 닳아있었던 구두. 오래도록 기억 속에 남아있는 그의 숭고하고 거룩한 구두를 생각한다.

밥벌이를 위해, 박목월의 시에서 처럼 어설픈 아버지 노릇을 하기 위해.... 부단히 움직여야 했던 구두를...오래된 기억 속에서 소환한다. 

고흐의 낡은 신발과 아버지의 검은 구두와... 박목월의 시 <가정>

이 땅에 누군가의 아비로 산다는 것은 참 버거운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수많은 신발들이 날마다 집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간다. 결국 삶이란 신발의 궤적인 셈이다.  / 려원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 2022 아르코 문학나눔 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


작가의 이전글 외로운 늑대가 울면 또 다른 늑대도 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