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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루누이는 세상과 자신, 그리고 향수를 비웃었다.

파트리크 쥐스킨트 < 향수 >

향수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장편소설『향수』는 냄새에 대한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으나 정작 자신은 아무런 냄새도 가지지 못한, 광기 어린 남자 장 바티스트 그루누이에 대한 이야기다.

18세기 프랑스를 배경으로 한 이 소설에는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아마도 노스탤지어의 느낌을 주는 ‘향수’라는 제목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향수’와 전혀 다르기 때문에 독자에게 혼돈을 주지 않기 위한 배려일 것이다. 

 최고의 향기를 얻기 위해 스물다섯 번의 살인을 저지르지만 전혀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다만 당연히 할 일을 했다는 듯한 그루누이의 모습은 태생적인 결핍을 타인의 것으로라도 채워야 한다는 비정상적인 강박처럼 보인다.     

후각을 통해 세계를 인식하고 타인을 지배한다는 독특한 발상에서 시작된 이 작품에 대해 

프랑스의『르 피가로』는 <지금까지의 어떤 것과도 다른, 유례없는 작품으로 동시대의 문학에서 하나의 사건으로 남을 것>이라고 평하였다고 한다.    

구성은 총 4부로 되어있다. 1부는 암울한 탄생과 성장, 무두장이 조수로서의 삶, 향수 제조자 조수로서의 삶 

2부는 동굴에서의 7년과 몽펠리에서의 시간  3부는 그라스에서 향수제조의 절정, 살인, 인간의 냄새 4부는 냄새를 통한 지배욕의 구체화, 그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다.   

  


1738년 7월 17일 프랑스에서도 가장 악취가 심한 곳, 페르 거리의 생성 좌판 뒤에서 대구를 손질하던 그루누이의 어머니에게 진통이 찾아왔다. 그녀는 단지 진통이 빨리 끝나기를... 구역질 나는 출산의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소망했다. 벌써 다섯 번째였다. 이미 죽었거나 반쯤 죽은 상태로 태어난 아기들은 주변에 널려있던 생선 내장과 함께 쓰레받기에 담겨 묘지나 아래쪽 강가에 버려졌다.     

이제 막 20대 중반에 접어든 그루누이의 어머니. 한 번쯤은 결혼해서 홀아비 수공업자의 존경할만한 부인이 되기를 바라기도 했던 그녀는.... 네 번의 경우처럼 생선칼로 핏덩이를 자른 뒤 빨리 모든 것이 끝나기를 바랐지만 무언가 참을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의식을 잃고 쓰러진다. 비명 소리에 사람들이 몰려와 그녀의 피투성이 옷을 바라본다. 모든 것이 사소하게 끝날 수도 있었을 상황에서 생선도마 아래 생선 내장과 잘린 대가리들 사이에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그루누이는 보모에게 맡겨지고 수차례에 걸친 영아 살인죄의 판결을 받은 그루누이의 어머니는 그래브 광장에서 참수되었다.

       


아기 냄새가 나지 않는, 섬뜩한  아기 그루누이의 생명력은 질겼다. 가장 냉혹한 보모 가이아르 아래서도 살아남은 그는  세 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걷고 네 살이 되어서 처음 내뱉은 말이 ‘생선’이라는 단어였다. 모든 단어들을 그는 냄새로 습득해 나갔다. 3월 햇살 아래  딱딱 소리가 나던 너도 밤나무 장작더미 위에 앉아 있을 때... 나무의 몸에서 풍기는 이끼냄새와 송진 끓는 냄새가 그로 하여금 ‘나무’라는 말을 하게 하였다.     

그가 익히기 어려운 단어는 냄새가 없는 추상적 단어들이었다. 예를 들면 권리, 양심, 기쁨, 책임, 겸손. 감사 등의 말이 그에게는 혼란스러웠다. 냄새로 인지할 수 있는 세계의 풍부함과 언어의 빈곤함 속에서 그는 늘 갈팡질팡하였다.          

가이아르 부인은 후원금이 끊기자 가장 악명 높은 무두장이 그리말에게 그루누이를 팔아버리는데 그루누이는 냄새로 조금이라도 말을 듣지 않으면 자신을 죽일 수도 있는 사람이 그리말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무조건적으로 복종한다. 무두장이들이 앓는 병을 이겨내기고 하고, 타고난 성실함 탓에 능력을 인정받아 휴식 시간도 갖게 된 그루누이는  1753년 9월 1일 파리의 루아이얄 다리 위에서 왕위 계승일을 알리는 불꽃놀이가 있던 날 산책을 나간다.     


참을 수 없는 향기. 이 향기를 소유하지 못하면 자신의 인생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것 같은 확신을 가진 그는 이 냄새의 마지막 한 조각까지 소유하고 싶었다.


P. 64

극히 짧은 순간 은근한 암시처럼 아주 미세한 향기 한 조각이 나타났다가는•••••• 곧 사라져 버렸다. 그르누이는 고통스러웠다. 그것을 갖고 싶다는 욕망으로 인한 괴로움 때문에 정말로 심장까지 아픈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      

P. 70

그르누이는 이 향기를 소유하지 못하면 자신의 인생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진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가장 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가장 부드러운 마지막 한 조각까지 그는 이 냄새를 속속들이 알아야만 했다. 그냥 단순하게 복합적인 상태로 기억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그는 이 성스러운 향기를 뒤죽박죽 상태인 자신의 검은 영혼 속에 각인해 두고 아주 정밀하게 연구하고 싶었다. 그래서 앞으로는 이 주문(呪文)의 내적인 구조에 따라 생각하고 살고 냄새 맡을 작정이었다.       


붉은 머리, 하얀 피부를 지닌 여인의 모든 냄새를 다 빨아들여 자신을 채우고  자신의 내부에 있는 모든 방에 빗장을 걸고 그곳에서 벗어난다. 최초로 살인을 저지른 날이었다.  자신의 미래를 이끌어 줄 나침반을 발견한 밤이었다. 향기의 제조자가 되어야 할 목적이 분명해진... 거대한 냄새의 폐허.. 수많은 냄새들을 분류하고 저장해 가며.... 그녀의 가장 좋은 것을 빼앗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버린 것에 대해 한 치의 죄의식도 갖지 않았다. 오직  향기의 법칙을 따랐을 뿐이므로...    

 


그리말에게서 벗어나 향기 제조자 주세페 발디니의 집에서 향기 제조의 기본을 배운다. 거의 망해가던 주세페발디니의 가게를 다시 초고의 호황상태로 돌려놓은 그루누이에게 주세페 발디니는 25프랑을 주며 파리에 다시는 발을 들여놓지 말라는 계약을 제시한다.

곱사등이처럼 자그마한 몸집의 그루누이는 향기의 도시 그라스를 향해 남쪽으로 간다.

오베르뉴 산맥의 한가운데 1756년 8월...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인간들로부터 격리된 그곳에 둥지를 튼다.

동굴 안에서.. 돌바닥에 담요를 깔고 등을 기댄 채 미동도 하지 않고 고독을 누린다.

단지 자신에 좀 더 가까워지기 위해, 단지 자신의 만족감을 위해 은둔을 즐겼다.

그렇게 7년의 은둔 생활이 끝난 것은 자신의 냄새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자신의 냄새를 맡을 수 없었던 꿈 속에서 느낀 증오와 분노 때문이었다.


P. 198

그렇다! 그건 자신의 왕국이었다! 위대한 그르누이의 왕국! 위대한 그르누이가 창조하고 통치하는 곳,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 부쉈다가 다시 세울 수도 있는 나라, 끝없이 영토를 확장하기도 하고 불의 칼로 모든 침입자에 맞서 싸우기도 해야 하는 그 자신의 왕국 말이다. 여기서는 그의 의지, 위대하고 위엄 있고 비범한 인물 그르누이의 의지가 곧 법이었다. 과거의 나쁜 냄새들을 모두 물리친 그르누이는 이제 자신의 왕국에 향기가 넘쳐 나기를 원했다.     



7년 전 이 동굴에서 나던 냄새와 7년이 지난 지금 동굴에서의 냄새는 변화가 없었다.

바위 냄새. 축축한 냉기, 그 어떤 생명체의 냄새도 없었다. 누더기를 걸치고 플롱 뒤 강탈 산을 뒤로한 채 남쪽을 향해 걸었다.

몽펠리에서 라 타이아드 에스피나스 후작에게 발견되어 <치명적 유동체> 효과의 모델로 이용되면서 외모도 변하고 비로소 사람다운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었지만 그루누이는 향수 제조자인 뤼펠의 가게에 가서 새로운 야망을 꿈꾼다. 마침내 그는 기분 좋은 향기가 아닌 ‘인간의 냄새’를 지닌 향수를 제조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냄새가 나는 향기를 온몸에 바르고 거리를 거닐던 그는 말할 수 없는 만족감을 느꼈는 데 산에서 무아지경을 느끼던 때의 만족감과는 다른 자신의 능력을 정확하게 인식하는 데서 오는 냉정하고 명료한 만족감이었다.

인간의 냄새일 뿐만 아니라 초인간적인 냄새, 훌륭하고 활력 넘치며 그 냄새를 맡은 이는 누구나 그 냄새의 주인을 마음속 깊이 좋아할 수밖에 없는 천사의 냄새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인간의 가슴속으로 들어간 냄새는 관심과  무시, 혐오와 애착, 사랑과 증오의 범주에 따라 분류된다. 결국 냄새를 지배하는 자는 인간의 마음을 지배할 것이라는 생각에 이른다.   


  P. 242

위대한 것, 끔찍한 것, 아름다운 것 앞에서도 눈을 감을 수는 있다. 달콤한 멜로디나 유혹의 말에도 귀를 막을 수는 있다. 그러나 결코 냄새로부터 도망칠 수는 없다. 냄새는 호흡과 한 형제이기 때문이다. 살기 원하는 사람이라면 냄새가 자신의 형제와 함께 그들 사이에 나타날 때 그것을 도저히 막을 수 없는 법이다. 그렇게 인간의 가슴속으로 들어간 냄새는 그곳에서 관심과 무시, 혐오와 애착, 사랑과 증오의 범주에 따라 분류된다. 냄새를 지배하는 자, 바로 그가 인간의 마음도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에스피나스 후작의 집에서 몰래 빠져나와 그라스로 간 그는 아르뉠피 부인이 운영하는 향수 작업실에서 도제일을 시작한다. 4월에는 금작화와 오렌지꽃을 침지해 향기를 추출, 5월에는 장미, 7월에는 제스민, 8월에는 밤히야신스.....  도제 드리오가 아르뉠피 부인의 침대에서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동안노새처럼 열심히 일하며 점점 드뤼오를 능가하며 영향력을 넓혀갔다.     

인간의 냄새가 나는 향기를 여럿 개발했다. 동정심을 유발하는 드뤼오의 정액냄새를 모방한 남성적인 냄새. 동정심을 유발하는 냄새,.... 옷을 갈아입듯 향수를 갈아 뿌리며 사람들에게 주목받기도 하고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나지 않게 하기도 하였다.

바위처럼 생명이 없는 것들로부터도 향기를 추출해내려 했다. 그의 궁극적 목표는 ‘향기사냥’이었다.  살아있는 인간의 냄새를 채취하는 일. 향기를 소유한 후, 그것을 상실하는 것에 대핸한 아쉬움이 남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쉽게 사라지는 향기를 오래도록 붙잡아두려면 오래 지속되는 향기를 혼합하는 것. 자유를 향한 향기의 열망에 족쇄를 채우는 일을 터득했다.


P. 233

그르누이가 그날 만들어 낸 것은 이상한 향수였다. 더더욱 이상한 점은 그런 향수가 그때까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기분 좋은 향기가 아니라 〈인간의 냄새〉를 지니고 있는 향수였다. 그래서 어두운 곳에서 그 향수의 냄새를 맡으면 자기 말고 또 한 사람이 근처에 있다고 믿게 되는 그런 향수였다.     

P. 291

인간의 냄새 그 자체는 그에게 아무런 관심거리도 아니었다. 자신의 대용품 향수만 갖고도 인간의 냄새는 충분히 흉내 낼 수 있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특별한〉 사람들, 즉 아주 드물지만 사람들에게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그런 사람들의 냄새였다. 그 사람들이 바로 그의 제물이었다.     


장미 화원에서 열다섯 살 소녀가 벌거벗은  시신으로 발견되었고 옷과 머리카락이 사라졌다

그 후에도 계속  검은 머리, 우수 어린 타입의 소녀들이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앙트안느 라쉬의 딸  로르,  진홍색 머리카락과 초록색 눈을 지닌 16세 로르가 그루누이의 스물다섯 번째 희생자였다.

스물네 명의 소녀들과 마찬가지로 향기를 빨아들이는 과정을 깨어서 기다리는 일은 행복했다.

스물다섯 명의 소녀의 향기로 만들어질 미래에 대한 기대가 아닌 과거로 돌아갔다.

가이아르 부인의 집에서 맡았던 축축하고 따뜻한 장작더미의 냄새, 생선 비린내가 풍기는 이곳 라나풀르에 오기까지의 여정을 떠올렸다.

무두장이 그리말과 주세페 발디니, 라 타이아드 에스피나스 후작,  파리의 냄새와  마레 거리의 빨강 머리 소녀, 오베르뉴 산. 동굴,  그 모든 기억에서 달아나지 않았다.  스스로 대견했다.      

그루누이는 악명 높은 소녀 살인범 그루누이는 체포되었다. 스물다섯 벌의 옷과 스물다섯 개의 그루누이에 대한 재판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증거가 명백했으며 피고인 그루누이가 모든 혐의 사실을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단 하나 범행동기에 대해서 그는 다만 “소녀들이 필요했다”는 말만 반복했다.


1766년 4월 15일 장 바티스트 그루누이의 사형선고

“향수 제조인 도제 장 바티스트 그루누이는  성문 앞 광장에서 얼굴을 하늘로 향한 채 나무 십자가에 묶어놓고 필, 다리, 엉덩이, 어깨 등 그의 사지와 관절들이 다 떨어져 나갈 때까지 쇠몽둥이로 12대 내리친 후 죽을 때까지 십자가에 매달아 놓는 형벌에 처한다”

5시 사형 집행 예정. 푸른색 상의와 흰색셔츠, 흰 비단양말, 버클 장식이 달린 검은 구두를 신은 그루누이 그는 묶여있지 않았다.  기적이 일어났다. 그곳 에 모인 사람들의 마음에  미묘한 변화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갑자기 대규모 환락의 향연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쾌락의 땀내로 공기는 무거워졌고 만여 명 짐승이 내지르는 괴성과 신음소리가 진동했다. 그곳이 바로 지옥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악취가 심한 곳에서 냄새도 없이 태어난 그가 쓰레기와 배설물 부패 속에서 성장한 그가 인간적 영혼도 없이  오로진 반항심과 역겨움만을 지닌 그가, 작은 키에 구부정한 모습, 절름발이에 추한 외모를 지닌 그가 모든 이들에게 추앙받고 있었다. 그는  위대한 그루누이였다.     

문득 그루누이는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멍청한 욕망 더 어리 들을 일시에 치워버리고 싶었다.

그에게 있어 유일하게 진실한 감정인 ‘증오심’, 이런 증오심에 대해 그들로 증오로 답해주기를 바랐다

원래의 계획대로 처형시켜 주기를... 인생에서 단 한 번만이라도 자신을 표현하고 싶었다.

단 한 번만이라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사람이 되어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가장 , 좋은 향수의 가면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항상 갈망해 왔던 일,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사랑하게 만드는 일에 성공한 이 순간에 그 일이 참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 자신은 그 향기를 사랑하기는커녕 증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갑자기, 자신은 사랑이 아니라 언제나 증오 속에서만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증오하고 증오받는 것에서.     


향락에서 깨어난 그라스 사람들은 자신들의 치욕을 덮기 위해 사형 집행을 서둘렀다.

살인범이 체포되었다. 루브 거리의 향수 제조인 도미니크 드뤼오, 희생자의 옷과 머리카락이 그의 작업실에서 발견되었고 열네 시간의 고문 끝에 그는 죄를 인정했다. 아침해가 뜨기 전 교수형을 당했고 그라스는 평정을 되찾았다. 햇빛을 따사롭게 도시를 비추고 곧 다시 5월이 왔고 사람들은 장미꽃을 수확했다.      


그는 밤에만 걸었다. 마음만 먹으면 못할 일이 없었다. 그의 손에는 힘이 들어있었다. 돈이나 테러, 죽음보다 더 큰 힘을 갖고 있었다.  이것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 꼭 한 군데 있었는데 바로 그루누이 자신이었다.

향수를 바르기만 하면 그는 신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자신은 향수를 느낄 수 없었다.

그걸 바르고도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는 세상과 자신, 그리고 향수를 비웃었다.     


1767년 6월 25일 새벽 6시에 셍 자크 거리를 지나고 있었다. 퐁뇌프 다리를 지나 이노셍 묘지로 향했다. 매장하는 사람들이 떠난 자리에 도둑, 살인자, 무법자,  창녀, 탈영병, 불량배.. 온갖 천민들이 몰려들었다. 

푸른 옷을 입은 작은 남자 그루누이가 병마개를 열었다. 병의 내용물을 이리저리 흩뿌리기 시작하자 환한 불길에 휩싸인 듯 아름다움이 퍼져나갔다. 순식간에 그의 주위로 동심원이 만들어졌고 그를 만지기 위해 사람들이 달려들었다. 깃털, 머리카락, 옷, 몸뚱어리가 뜯겨나갔다. 단검을 이용해  찔러대고 도끼와 칼로 그를 서른 조각으로 잘라버렸다. 그의 몸을 움켜쥐고 먹기 시작했다. 반 시간쯤 지나자 장 바티스트 그루누이는 형체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만족스러운 식사 시간이 끝나고 다시 불옆에 모여든 이들은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갈기갈기 찢긴 푸른 옷 한 조각을 말없이 불속에 던졌다. 그들의 얼굴에 수줍은 아가씨 같은 행복의 빛이 서렸다. 서로를 마주 보지는 않았지만 은밀히, 공공연하게 서로를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상할 정도로 당당한 기분이었다. 그들이 사랑에서 비롯된 행동을 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스물다섯 번의 살인을 저지른 그는 어린아이처럼 천진하고 때로는 가련하고 때로는 혐오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루누이는 생선비린내 나는 시장의 좌판에서 태어났고 생선 비린내가 진동하는 도시 라나플르에서 최고의 향기를 수집하기 위해 스물다섯 번째 살인을 저질렀다. 향기 제조에 있어 최고인 ‘그라스’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향기를 이용해 위기에서 벗어나고 마침내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공동묘지에서 평생을 모은 향기와 더불어 스스로의 몸도 향기처럼 사라진다.     


냄새 없이 세상에 온 그는 권력, 명예, 부를 가져다줄 수 있는 힘을 향수를 통해 얻을 수 있었다. 스물다섯 번의 살인을 통해.... 그러나 정작 본인에게는 그 냄새가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않는다는 섬뜩한 사실을 깨닫는다.  단 한 번도 사랑을 받아본 적 없는 그는 살아남는 법, 생존 본능을 먼저 배웠다.

그는 후각을 통해 자신을 지켰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사람들을 끌어당길 수 있었다.

그에게는 스물다섯 명의 여자들이 오직 향기 사냥을 위해 필요했을 뿐이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이 책에는 수많은 죽음들이 등장한다. 어머니의 죽음에서 시작하여 그루누이의 죽음으로 끝난다.

     

그누루이의 탄생이 가져온 어머니의 죽음

냉혹한 유모 가이아르 부인의 죽음

비정한 무두장이 그리말의 죽음 : 강물이 그를 삼켜버린 죽음

이기적인 주세페 발디니의 죽음 :시체도 금고도 6백 가지 제조법이 적힌 책자도 사라지고 유럽에서 가장 위대한 향수 제조인인 주세페 발디니가 남긴 것은 사향, 계피, 식초, 라벤더  그리고 수천 가지 원료들이 뒤섞인 냄새뿐이었다.

공명심에 붙타는 라 타이아드 에스피나스 후작의 죽음

그라스의 향수 제조 도제 도미니크 드리오의 죽음 : 연쇄 살인범의 누명을 쓴 억울한 죽음

그루누이의 죽음 : 스스로의 몸이 향수처럼 공중분해되기를 바랐던 의도적인 죽음

      

장 바티스트 그루누이에게 어떤 기술을 전수해 준 장인들, 생존을 터득하게 한 유모, 자신의 이익을 위해 베르누이를 이용한 향수 제조인, 공명심에 불탄 에스피나스 후작 등은 모두 저주라도 받은 듯 죽음을 맞이한다.  그루니에는 생선 좌판 아래서 태어났고 최초로 말한 단어는 생선이었으며 가장 추한 냄새가 나는 공동묘지에서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다. 

사실 나는 3부 광란의 향기로 도취된 그라스의 사형장에서 소설이 끝나기를 바랐다.

향기로 사형 집행 순간에 목숨을 구하게 되고 살인을 저지르지도 않은 도제 도미니크 드리오가 억울하게 죽긴 하였지만.....     

4부 그루누이의 죽음이 25명의 목숨을 빼앗은 연쇄 살인마의 죽음에 대한 인과응보적 의미는 있지만 평생 스스로 모은 향기로 자신이 누군가의 먹이가 되는 결말이 조금은 섬뜩했다.  식인의 결말이라니....

       


파트리크 쥐스킨트가 『향수』에서 보여주려는 것이 무엇인가?

탁월한 후각 하나로 끝없이 생명의 불꽃을 지켜온 한 악마적 광기를 지닌 남자 그루누이.

태어나자마자 보모의 손에 길러지고 단  한 번도 제대로 사랑받지 못한 그루누이는 어느 누구도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타고난 후각으로  세상의 언어와 질서와 의미를 취득했고 타고난 후각으로 사람들을 분류했고 타고난 후각으로 위험와 안전을 터득했고 타고난 후각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할 수 있었다. 타고난 후각 때문에 25명의 목숨을 빼앗았고 타고난 후각 때문에 마침내 목숨을 잃었다. 


향수는 쁘와종, 영어로는 posion이다. poison의 의미에는 ‘독’이라는 뜻도 담겨있다.

무엇이든 지나치면 ‘독’이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나는 가끔 어떤 사람을 후각으로 기억하곤 한다. 물론 장 바티스트 그루누이만큼의 감각은 아니더라도

내게 익숙한 공간의 냄새... 내게 익숙한 사람의 냄새를 잊지 않고 있다.     

아주 깊숙이 잠복되어 있다가 어느 순간 튀어나오는 씨즐스러은 냄새들이 있다....

                                        

내 유년의 집은 장미 덩굴의 향기로 기억한다. 붉은 벽돌 담장에 흐드러진 작은 장미들...

책꽂이의 눅눅한 책냄새와.... '베토벤'이라는 고전음악감상실의 커피 냄새와.... 갓구은 빵냄새와....

대학 도서관 앞 자판기 커피 냄새와.... 회색 병실에서 뇌쇄적 향기를 발산하던 프리지어 냄새와 옷장의 나프탈렌 냄새와..... 오래된 집.... 창문을 열 때  밀려들어오는 낯 선 도시의 냄새들과...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을 정도로 섬뜩한 작품이지만 파트리크 쥐스킨트 『향수』을 읽을 때면 온 후각이 열리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작품은 어느 작품 하나 평범한 것이 없다.

비둘기, 깊이에의 강요, 콘트라베이스, 좀머 씨 이야기....

그의 작품에는 그만의 '향수'같은 것이 있는 듯싶다. 그는 비밀스러운 매력을 지닌 작가다.

천재적인, 광기 어린, 탁월한, 흡인력 있는............/ 려원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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