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그러므로 그래서

가을입니다

그러므로 그래서  가을입니다

그러므로 그래서 장맛비 같은 가을비가 옵니다

그러므로 그래서 베르디 오페라 <나부코> 중에서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가라 그리움이여 금빛 날개를 타고)'이 듣고 싶어 집니다

그러므로 그래서 쇼팽의 빗방울 전주곡도 떠오릅니다

그러므로 그래서 나의 젊은 흔적이 남아있을 베토벤(고전음악 감상실)에 적힌 낙서들을 보고 싶어 집니다

그러므로 그래서 기차가 떠날 때까지 손 흔들 주던 누군가의 손을, 멀어져 가던 누군가의 등을 보고 싶어 집니다.

그러므로 그래서 어린 시절 홈통을 타고 흘러내리던 그 빗소리와 젊은 아버지의 타자 소리를 듣고 싶어 집니다

그러므로 그래서 해 저물 무렵 들려오던 개 짖는 소리가 듣고 싶어 집니다

그러므로 그래서 누군가의 부엌에서 풍기던 고등어구이 냄새가 맡고 싶어 집니다.

그러므로 그래서 나의 이름을 세 번 외치겠다고 했던 기린처럼 키 큰 친구의 뒷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그래서 심장의 언어를 외면했던, 외면하고 말았던 아쉬움을 품어주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그래서 이른 새벽 동전을 들고 대학 자판기 앞을 서성이던 젊은 나를 만나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그래서 널따란 창을 가진 아무도 없는 카페에 가서 

그러므로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쓴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그래서 낡은 수첩 속 지나간 이들의 전화번호를 다시 찾아보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그래서 햇살이 내리비치던 어느 집 담벼락에 기대 서있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그래서 ‘생의 한가운데’에 나오는 니나 붓슈만의 대사를 다시 읽어보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그래서 늘 생의 한가운데에 있지만 늘 생으로부터 결핍을 느끼고 늘 생에 대해 묻고 싶은 것이 많은 나를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그래서 커다랗고 맑고 깨끗한 거울 앞에서 ‘나’를 생전 처음 사람 보듯 자세히, 꼼꼼히 관찰하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그래서 책을 한 아름 빌려 내려오던 도서관의 돌계단을 다시 걸어보고 싶어 집니다

그러므로 그래서 샛노란 은행잎들의 군무를, 

그러므로 그래서 자동차가 달릴 때마다 뒤따라가며 깔깔대던 낙엽들의 모습을 다시 보고 싶어 집니다

그러므로 그래서 이목마을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푸른 시절 임시교사의 모습으로도 돌아가고 싶어 집니다.

그러므로 그래서 아무 걱정 없이 재잘거리던 교복 입은 학생들의 발랄한 모습을 다시 보고 싶어 집니다.

그러므로 그래서 공중전화에서 누군가가 걸어주던 딸깍거리던 소리를 

그러므로 그래서 공중전화의 동전이 떨어지기 전까지 쉼 없이 빠르게 말해야 했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집니다

그러므로 그래서 도서관 유리창에 꿈을 그리던 

그러므로 그래서 글을 쓰던 어느 날을 기억합니다

그러므로 그래서 책은 내게 가장 인간적인 사물 있었던 때를

그러므로 그래서 병실에서 내려다보던 마크로스코 그림 같은 가을을

그러므로 그래서 울음소리와 웃음소리와 새소리와...

그러므로 그래서 흔들리는 그네에 앉아 바라보던 빈센트 반 고흐의 밤을 

그러므로 그래서 빈약한 경험을 지닌 

그러므로 그래서 부족하고 그저 그런

그러므로 그래서 늘 결핍 속에 허덕이는

그러므로 그래서 늘 겸손할 수밖에 없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고 책을 읽고 하루를 살아갑니다. 

무엇을 위해서 인지도 나 자신도 모르면서 무언가를 적어 내려갑니다

가슴의 말이겠지요

잠복되어 있던!!          


그러므로 그래서 비가 옵니다

그러므로 그래서 비가 그치지 않고 옵니다

그러므로 그래서 비가 소리 내어 옵니다

그러므로 그래서 그 많은 새들은 어디에 가서 비를 피할까요     

그러므로 그래서 가을입니다

그러므로 그래서 9월입니다

그러므로 그래서 조금은 고독한 계절입니다./려원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


작가의 이전글 그루누이는 세상과 자신, 그리고 향수를 비웃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