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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그대 쪽으로 불어온다

이스트먼 존슨 < 내가 두고 온 소녀> 1872년경


바람은 그대 쪽으로     


 어둠에 가려 나는 더 이상 나뭇가지를 흔들지 못한다. 단 하나의 영혼을 준비하고 발소리를 죽이며 나는 그대 창문으로 다가간다. 가축들의 순한 눈빛이 만들어내는 희미한 길 위에는 가지를 막 떠나는 긴장한 이파리들이 공중 빈 곳을 찾고 있다. 외롭다. 그대, 내 낮은 기침 소리가 그대 단편의 잠 속에서 끼어들 때면 창틀에 조그만 램프를 켜다오. 내 그리움의 거리는 너무 멀고 침묵은 언제나 이리저리 나를 끌고 다닌다. 그대는 아주 늦게 창문을 열어야 한다. 불빛은 너무  약해 벌판을 잡을 수 없고, 갸우뚱 고개 젓는 그대 한숨 속으로 언제든 나는 들어가고 싶었다. 아아, 그대는 곧 입김을 불어 한 잎의 불을 끄리라. 나는 소리 없이 가장 작은 나뭇가지를 꺾는다. 그 나뭇가지 뒤에 몸을 숨기고 나는 내가 끝끝내 갈 수 없는 생의 벽지를 조용히 바라본다. 그대, 저 고단한 등피를 다 닦아내는 박명의 시간, 흐려지는 어둠 속에서 몇 개의 움직임이 그치고 지친 바람이 짧은 휴식을 끝마칠 때까지.      

                                                                                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 』   

                 



이스트먼 존슨, <내가 두고 온 소녀>, 1872년경, 캔버스에 유채, 106.7 ×88.7㎝, 

워싱턴 DC 스미스소니언 미국미술관 소장.     


미국 화가 이스트먼 존슨(Eastman Johnson·1824~1906)은 워싱턴 DC에서 유명인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는 화가였다. 유럽으로 유학을 떠나 뒤셀도르프, 헤이그, 파리 등지에서 미술학교를 다녔고, 특히 17세기 네덜란드 미술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 내가 두고 온 소녀>라는 작품명은  미국 남북전쟁 당시 군인들이 고향에 두고 온 여인을 그리며 부르던 민요 ‘내가 두고 온 소녀’에서 따왔다고 한다. 이스트먼 존슨은 남북전쟁이 끝난 뒤 48세 때(대략 1872년 무렵) 이 그림을 그렸는데  그림을 통해 그가 전하려는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바람은 그대 쪽으로 불어온다. 희미한 길 위에는 가지를 막 떠나는 긴장한 이파리들이 

공중 빈 곳을 찾고 있다. 내 그리움의 거리는 너무 멀고 침묵은 언제나 이리저리 나를 끌고 다닌다.     


검은 망토와 모자, 검은 구두... 망토 아래 붉은빛의 원피스를 입은 긴 머리 소녀가 책을 품에 안고 바람 부는 언덕에 서있다. 금세 폭우라도 쏟아져 내릴 것 같은 회색하늘... 바람이 소녀의 머리카락을 제 멋대로 매만진다

어딘가를 바라보는 소녀는 팔찌와 반지를 끼고 있다. 반지를 낀 것으로 보아 기혼녀이거나 약혼녀인 듯싶은데 참전하는 연인의 모습을 먼발치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인지.... 소녀가 서  있는 곳이 평지는 아닌 듯싶다.


한국식으로 작품명이 '내가 두고 온 소녀' 혹은 '내 뒤에 남기고 온 소녀'로 되어 있다.     

'두고 오는 것'과 '뒤에 남기고 오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중요한 것은 ‘나를 기다리는 소녀’가 아니라는 점이다.    

나(참전 군인)는 약혼녀인지 아내인지 모를 그녀를 고향에 두고 떠나왔지만 길고 긴 전쟁의 끝을 알 수 없다. 소녀의 기다림의 끝이 언제인지, 그의 죽음, 그의 귀환...     

어쨌든 나는 그녀를 두고(혹은 뒤에 남기고) 떠나왔다. 무사히 살아서 돌아갈지... 그렇지 못할지 알 수 없다     


반지를 낀 손으로 소녀는 책을 안고 있다. 검은 망토가 바람에 휘날리고 소녀의 긴 머리카락도 바람에 날린다.

소녀가 안고 있는 책이 성경인지, 소설책인지, 시집인지.... 철학서인지 알 수 없다.

단호하고 결연해 보이는 소녀의 옆모습에서 의지가 느껴진다     

삶에의 의지.......

바람이 불어도 바람을 피하지 않으려는......

땅을 딛고 서있는 그녀의 다리를 보면 왼발은 시선 방향을 향하지만 오른쪽 발은 정면을 향하고 있다. 왼발은 과거와 그리움과 연민, 기다림이라면 오른발은 현재와 현실 직시다. 

책을 안고 바람 부는 언덕에 서있는 그녀는 더 이상 바라볼 풍경이 없다고 여겨지면 시선을 정면으로 향할 것이고.... 그리고 또 시간이 흐르면 몸을 돌려 걸어내려 가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해가 비치는 넓은 창가에서 책을 펼쳐 읽을 것이다.

     


그는 두고 왔거나 뒤에 남기고 욌다고 생각하지만 소녀의 표정으로 볼 때 그녀는 수동적으로 남겨진 인물이 아니다.      

내가 이 그림을 좋아하는 이유는 바람이 느껴지기 때문이고 책이 있기 때문이고 영민해 보이는 소녀의 결연한 의지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내가 두고 온’이라거나 ‘내가 뒤에 남겨둔’이라는 작품명 와 어울리지 않게 능동적인 몸짓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어느 한순간을 포착한 그림에서 소녀는 바람에 내 맡긴 수동적인 존재처럼 보이지만.......     

소녀가 검은 망토 속에 입고 있는 붉은 드레스가 시선을 붙잡는다. 어쩌면 검은 망토는 1800년대 미국 여성들이 드레스 위에 보편적으로 걸치는 외투였겠지만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검은 망토에 검은 모자가 미망인을 연상시키는 패션일 수도 있다. 게다가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그려진 작품이기도 하니까.     

그러나 나는 붉은 혀처럼 드러난 붉은 드레스에서 어떤 삶의 열망을 본다.

검은 망토와 검은 모자와 붉은 드레스.......

나를 싸고 있는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해체한다면 나는 어쩌면 붉은색 물감으로 존재할지도 모른다.

그러하기에 소녀의 붉은 원피스에서.... 니체가 말하는 ‘Amor Fati'를 보고 있는 것이다     

두고 오고, 남기고 온 것은 떠난 이의 생각일 뿐 

바람 부는 언덕 위의 소녀는 품에 끌어안은 책이 있고 검은 망토 아래 붉은 드레스가 있으니

뒤에 남겨진 가련한 소녀가 더 이상 아니다.     


나는 가끔 저 그림 속 소녀의 모습에 나를 집어넣는 상상을 해보곤 한다. 만일 내가 누군가에게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부탁했다면(부탁한다면) 아마도 저런 모습이 아니었을지.... 사자 갈기처럼 머리카락이 흩날리는 자유로움과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지식, 인식에 대한 욕구와 버릴 수 없는 붉은 열망....

누워있지도 않고 다소곳이 앉아있지도 않고 땅을 딛고 서 있는 소녀는...

‘내가 두고 온 소녀’도 ‘내가 뒤에 남기고 온 소녀’도 아니다.

그녀는 발길을 돌려 언덕을 내려가 자신이 인생을 살아갈 것이다.

바람이 그대 쪽으로 불어오더라도 그녀에게 세상은 더 이상 두려운 것이 아니다. /려원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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