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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란 끝없이 오는 것, 현재에도 미래에도 여전히...

책 읽어주는 남자 / 베른 하르트 슐링크./ 배반과 사랑 때문에  유죄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 베른 하르트 슐링크    

 

 15세 소년과 36세 여인의 파격적인 사랑 이야기 속에 역사와 인간의 죄의식, 사랑, 윤리에 관한 깊은 통찰을 담은 소설이다. 출간 당시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며 독일어권 문학작품으로는 처음으로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했을 뿐 아니라, 독일의 한스 팔라다 상과 디 벨트 문학상, 이탈리아의 그린차네 카부르 상, 프랑스의 로르 바타이 옹 상, 일본의 마이니치신문 특별문화상,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부케 상 등 각국의 문학상을 수상함으로써 그 문학적 성취를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

현재 48개국에 번역 출간된 세계적 베스트셀러인 이 작품은 여러 대학의 독일 문학과 홀로코스트 문학 과정에 커리큘럼으로 포함되어 있을 만큼 대중성과 작품성을 탁월하게 성취한 수작이다.

          

제1부

다음 날 그녀와 만났을 때 그녀에게 키스를 하려고 하자, 그녀는 몸을 뺐다. “그전에 먼저 내게 책을 읽어줘야 해.” 그녀는 진지했다. 나는 그녀가 나를 샤워실과 침대로 이끌기 전 반 시간 가량 그녀에게 <에밀리아 갈로티>를 읽어 주어야 했다. 이제는 나도 샤워를 좋아하게 되었다. 내가 그녀의 집에 올 때 함께 가져온 욕망은 책을 읽어주다 보면 사라지고 말았다. 여러 등장인물들의 성격이 어느 정도 뚜렷이 드러나고 또 그들에게서 생동감이 느껴지도록 작품을 읽으려면 집중력이 꽤 필요했기 때문이다. 샤워를 하면서 욕망은 다시 살아났다. 책 읽어주기, 샤워, 사랑 행위 그러고 나서 잠시 같이 누워있기 - 이것이 우리 만남의 의식이 되었다     


제2 부

나는 내가 그녀를 배반하고 부정했기 때문에 그녀가 내게서 떠나버렸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실 그녀는 단지 전차 회사에서 자신의 약점이 노출될 까 두려워 도망친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그녀를 쫓아버린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바꾸어 놓지는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여전히 유죄였다. 그리고 범죄자를 배반하는 것이 죄가 되지 않으므로 내가 유죄가 아니라고 해도, 나는 범죄자를 사랑한 까닭에 유죄였다.     


제3 부

나는 단 한 번도 한나에게 편지를 쓰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를 위해 책을 낭독하는 일은 계속했다. 일 년 동안 미국에 가 있을 때에도 그곳에서 카세트테이프를 보냈다. 나는 특별히 기간을 정해놓지는 않았다. 어떤 때에는 카세트테이프를 일주일이나 보름마다 부쳤으며, 어떤 때는 3주나 4주 만에 부치는 경우도 있었다. 한나가 이제 혼자서 글을 읽는 법을 읽혔으므로 내가 보내는 카세트테이프가 더 이상 필요 없을 거라는 우려 따위는 전혀 하지 않았다. 그녀가 이것 외의 책을 읽으면 그만이었다. 내가 책을 읽어주는 것은 그녀에게 이야기하는 그리고 그녀와 내가 이야기하는 내 나름의 방식이었다.

          


  사랑은 어쩌면 비겁과 회피의 얼굴을 지닌 것인지도 모른다. 베른 하르트 슐링크의 ‘책 읽어주는 남자’에 등장하는 15살 소년 미하엘 베르크와 36살의 성숙한 여인 한나 슈미츠. 1950년대 독일의 작은 소도시. 급성 간염에 걸린 소년 미하엘이 학교에서 돌아오던 중 구토를 하고 이를 본 여인이 소년을 집으로 데리고 가서 씻겨준다. 여인의 사소한 도움은 두 사람의 운명적인 만남으로 이어지고 미하엘은 그날 이후부터  핑계를 만들어 한나의 집으로 찾아간다. 두 사람은 책 읽어주기, 샤워, 사랑 나누기, 그리고 나란히 누워있기를 반복한다.      

P. 63

해가 길어지기 시작했을 때 나는 황혼 속에서 그녀와 함께 침대에 머물고 싶어서 더 오랫동안 책을 읽었다. 그녀가 내 몸 위에서 잠이 들고, 마당의 톱질 소리도 잠들고, 지빠귀의 노랫소리가 들려오고 그리고 부엌에 있는 물건들의 색깔 중에서 약간 밝거나 약간 어두운 잿빛 색조만이 남게 될 때면,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했다.     


사춘기에 접어든 미하엘은 한나에게서 느끼는 성적인 유희를 즐기며 불안한 날들을 이어가는데 어느 날 갑자기 한나가 도시를 떠나자 모든 것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정상으로 돌아온다. 


 미하엘의 가슴에 남겨진 한나는 사랑이었는지, 단지 사춘기 소년의 성적인 충족감을 채워주는 수단이었는지 종잡을 수 없는 채 시간은 흐르고 미하엘은 대학에 들어가 법학을 전공한다. 법학 세미나의 일환으로 일주일에 한 번 법정을 방문해야 했는데 우연히 한나 슈미츠의 재판을 참관하게 된다. 한나는 나치 수용소의 감시원이었으며 수용소에 수감된 유대인들이 사망한 사건에 대한 혐의를 갖고 있었다. 화재로 사태가 심각하였으니 적극적으로 탈출을 도왔어야 했는데 돕지 않았다는 것. 게다가 5명의 피고인들이 모두 한나가 주동 자였노라고 한결 같이 주장하는 바람에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서류 작성 또한 한나 혼자서 했다는 진술로 다른 피고인은 가벼운 금고형을 선고받지만 한나는  종신형에 처해진다.   검은색 정장에 흰 블라우스 차림의 한나는 친위대를 위해 일했던 여자, 기소된 내용의 모든 것을 행한 여자가 그곳에 있었다. 판결 이유문의 낭독은 몇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재판이 끝나고 피고인들이 끌려나갈 때  한나가 자신을 쳐다보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그녀는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거만하고 상처받고 길 잃은 그리고 한 없이 피곤한 시선이었다. 그것은 또한 아무도, 아무것도 보지 않으려는 시선이었다.               


 p181

나의 주변 사람들이 저질렀고 또 그로 인해 비난받을 행동들은 한나가 저지른 행동에 비하면 훨씬 덜 나쁜 것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사실 한나에게 손가락질을 해야 했다. 하지만 한나에게 한 손가락질은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던 것이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를 선택했다. 나는 스스로에게 그녀를 선택할 당시에는 그녀가 과거에 무슨 일을 했는지 전혀 몰랐다고 말하려고 해 보았다. 나는 그렇게 해서 아이들이 그들의 부모를 사랑할 때의 그 순진무구한 상태 속으로 나를 위치시켜보려고 했다. 부모에 대한 사랑은 우리가 책임지지 않아도 도는 유일한 사랑이다. 그러나 어쩌면 우리는 우리의 부모에 대해서 느끼는 우리의 사랑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할지 모른다...     



  미하엘은 그 과정에서 한나가 ‘문맹’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그런데 왜 한나는 재판장 앞에서 ‘저는 글을 읽고 쓸 줄을 모릅니다. 그러니 서류 또한 작성할 수가 없어요.’라는 단 한마디의 진술도 하지 못한 것일까? 미하엘은 재판장을 만나보지만 한나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 한마디 꺼내지도 못하고 한나와의 과거로부터 달아나려 몸부림치려는 비겁한 모습을 보인다. 법정에서 한나가 우연히 방청석에 앉은 미하엘을 돌아보아 서로 눈이 마주쳤을 때조차도...... 한나와 이어진 과거를 잊지 못하면서도 그 과거를 거부하는 아이러니 속에서 그는 어쩔 줄 모른다.  한나의 범죄를 이해하고 싶었고 동시에 또 그에 대해 유죄판결을 내리고 싶었다. 하지만 너무 두려웠다. 범죄에 합당한 유죄 판결을 내리려고 하면 그녀의 범죄를 이해할 한 뼘의 공간도 남지 않았다.  한나를 이해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그녀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또다시 그녀를 배반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이해와 유죄판결 두 가지를 동시에 할 수는 없었다. 

    

P. 173

내가 그녀를 쫓아버린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내가 그녀를 배반했다는 사실을 바꾸어놓지는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여전히 유죄였다. 그리고 범죄자를 배반하는 것이 죄가 되지 않으므로 내가 유죄가 아니라고 해도, 나는 범죄자를 사랑한 까닭에 유죄였다.   

  


사법관 시보일 때 법학도인 게르트루트와 결혼했지만 미하엘은 한나와 게르트루트를 무의식적으로 비교했다. 그녀의 손길, 감촉, 냄새와 맛... 한나로부터 벗어나고 싶었지만 벗어날 수 없었기에 결국 율리아가 다섯 살 나던 해 이혼했다. 미하엘은 만나려는 여자들에게 한나와 같은 손길과 감촉, 약간은 그녀와 같은 향내와 맛을 가져야 한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사법관 시보 기간이 끝나자 법과 관련된 직업을 선택해야 했다. 게르트루트는 판사 일을 시작했지만 미하엘은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기소하는 일, 특히 판결을 내리는 일은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지독한 단순화였다. 잿빛과 삭막함과 황량함.... 법제사 일을 선택한 그를 보고 게르트루는 인생의 도전과 책임으로부터의 도피라고 했지만 미하엘은 도피는 멀리 다른 곳으로 도망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았으며 그 어딘가에 안착한다는 의미도 갖고 있다며 스스로 안도한다.

     


 종신형 선고를 받고 감옥에 수감된 한나에게 자신의 목소리로 녹음한 테이프를 10년 동안 보낸다. 편지한 줄 쓰지 않고, 안부 또한 묻지 않고  녹음테이프에 문학작품을 읽고 녹음해서 보내주거나 혹은 자신의 글을 보내주는 것, 미하엘은  한나를 과거 속의 한나로 한정 지으려 한다. 도피이자 정신적 배반이다.    

 

한나에게 책을 읽어 녹음테이프를 주기적으로 보내기 시작했다. 직접 쓴 글을 보낼 때도 있었는데 한나는 다시 한번 나에게 있어서 나의 모든 힘과 나의 모든 창의력과 나의 모든 비판적인 상상력을 묶어서 바치는 재판관이 되었다. 카세트테이프에 어떤 사적인 말도 결코 담지 않았고 한나의 안부를 묻지도 않았으며 나 자신에 대한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이 많으면서도 말이 없는 접촉이 시작된 지 4년째 되던 해 한나에게서 편지가 왔다

“꼬마야, 지난번 이야기는 정말 멋졌어. 고마워. 한나가.”

드디어 그녀가 문맹에서 탈출한 것이다.

한나의 글씨체를 보면서 그것을 쓰느라고 그녀가 얼마나 많은 힘을 소모하였으며 또 얼마나 투쟁을 해야 했을지 깨달았다. 그녀가 자랑스러웠고 동시에 불쌍했다. 너무나 지연되고 실패한 그녀의 인생이 불쌍했고 그녀 인생 전체의 지연과 실패가 가엾게 여겨졌다.

 

어느 누가 제때를 놓쳤을 경우 어느 누가 무엇을 오랫동안 거부했을 경우, 또 어느 누구에게 무엇이 너무 오랫동안 거부되었을 경우 그것이 나중에 설사 힘차게 시작되고 또 환희에 찬 환영을 받는다고 해도  나는 그것은 이미 때가 너무 늦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너무 늦은’이라는 것은 없고 ‘늦은’이라는 것만 있는 것인가, ‘늦은’것이 ‘결코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것인가 나는 모르겠다.....               

  


사면위원회의 사면이 이루어지면 한나는 18년 동안의 교도소 생활을 마치게 될 것이므로  한나의 일자리와 집을 마련해 달라는 교도소 소장의 편지를 받는다. 미하엘은 이 모든 일이 가능했지만 이 모든 일이 점점 다가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나를 찾아가고 싶지 않았다. 거리를 두는 것만이 과거의 한나를 간직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한나의 사면. 석방 결정이 이루어졌고 일주일 있으면 나온다는 교도소장의 편지를 받았다.


  오랜 세월이 지나 미하엘과 한나의 만남. 교도소 앞 벤치에 나란히 앉은 한나에게선 이제 노인의 냄새가 났다. 한 여자가 벤치에 앉아있었다. 하얗게 센 머리카락, 이마와 뺨, 입 주위에 깊은 세로 주름이 간 얼굴. 무거운 몸. 담청색 원피스.. 미하엘은 그녀의 얼굴에서 기대감을 보았으며 기쁨으로 환하게 빛나는 것을 보았고, 다가가자  얼굴을 어루만지는 그녀의 두 눈을 보았고 무언가를 찾고 묻는 그녀의 두 눈에 불안과 아픔의 빛이 서리는 것을 보았으며 그녀의 얼굴빛이 꺼지는 것을 보았다.

 예전의 그녀에게서는 신선한 냄새가 났다. 향수냄새와 어둡고 떫은 또 다른 냄새, 하루의 시간과 노동의 향기, 차표의 인쇄 잉크 냄새, 개찰기의 금속 냄새, 양파냄새, 불에 튀긴 기름 냄새, 세탁비누 냄새, 다리미의 열기 냄새 등..  하루의 일과와 노동의 독특한 향기, 하루 일과와 노동의 종결의 향기, 저녁의 귀가와 집에서 맞는 안온함의 향기 등과 뒤섞여 은은하게 다시 돌아왔다.     

그런데 벤치에 앉은 한나에게선 노파의 냄새가 났다. 양로원의 방과 복도마다 저주처럼 드리워진 냄새... 한나는 아직 그 냄새를 풍기기에는 아직 젊었다. 공허한 말들이 오가는 사이, 벨이 두 번이나 울렸고 그녀의 두 눈은 다시 나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나는 그녀를 두 팔로 안았으나 그녀의 감촉을 제대로 느낄 수 없었다

“잘 가, 꼬마야”

“당신도 잘 있어요.”

그렇게 우리는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우리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 정말로 헤어지기 전에     

한나의 석방일이 다가오는 동안 일에 쫓기면서도


한나에 대한 기억의 방아쇠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두 눈을 고정시킨 채 벤치에 앉아 있는 한나, 내쪽으로 얼굴을 돌리고서 수영장에 서 있는 모습,.. 그때마다 자꾸만 그녀를 배반하였으며 그녀에게 죄를 지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그때마다 그런 느낌에 분연히 저항하면서 그녀를 비난하고 또 자신의 죄에서 빠져나오는 그녀의 방식을 너무 천박하고 너무 단순하다고 생각했다. 죽은 자들에게만 해명을 요구할 권리를 주고 죄와 보상을 불면증과 악몽에다 국한시킨다면 살아있는 자들의 자리는 어디인가? 그러나 사실 살아있는 자들이 아니라 바로 나였다. 나 역시 그녀에게 해명을 요구할 권리가 있지 않은가?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그녀를 데리러 가기로 되어있는 전날 오후에 한나를 벤치에서 다시 만났다. 정말 늙은 여자처럼 보였고 또 늙은 여자처럼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젊었지만...........          

미하엘은 역시나 친절한 자선가와 같은 느낌으로 한나를 마주하는데 석방되는 날 아침 한나가 목을 매고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한나는 동틀 녘에 목을 맸다. 교도소장의 안내로 한나의 방을 들여다본다

침대, 옷장, 책상과 의자, 책상 위쪽 벽에 달린 책꽂이, 세면대와 화장실, 창문을 대신한 유리벽돌, 책상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책꽂이에는 책들, 자명종, 곰인형, 잔 두 개, 분말 커피, 차깡통, 카세트 녹음기, 내가 낭독해서 보낸 카세트테이프들. 책꽂이에는 강제수용소와 관련돈 책들이 있었다.... 신문에서 오려 낸 사진.

검은 양복차림으로 악수를 나누고 있는 중년의 신사와 소년의 모습이 있었다.  미하엘의 고등학교 졸업사진이었다. 글을 읽을 줄 모르던 그녀가  그 사진이 실린 지역신문을 정기구독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나는 15살 미하엘 베르크를 처음 만난 이후 단 한 번도 그와의 사랑을 배반하지 않았던 것이다.    

 

한나의 얼굴은 특별히 평화롭거나 고통스럽지 않았다. 굳어있었다. 오랫동안 들여다보고 있자니 죽은 얼굴에서 살아있는 얼굴이 떠올랐다. 연보랏빛 차 깡통 속에 든 돈을 교회 화재에서 살아남은 미하엘 베르크에게 전해 달라는 유언이 있었다. 한나의 돈을 ‘문맹퇴치를 위한 유대인 연맹’ 앞으로 송금하고, 연맹으로부터 한나 슈미츠 여사 앞으로 보낸 편지를 들고 한나의 무덤을 향한다.   

                        


  15살 소년과 36살 여인의 관능적인 사랑이야기가 아니라 나치독일, 사랑과 죄의식, 학살과 용서, 배반, 그리움과 수치심과 같은 수많은 감정과 사건들의 이야기다. 미하엘은 한나가 유언으로 남긴 돈을 유대인 소녀에게 전달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자신과 한나와 맺었던 관계를 밝힌다.   사랑은 기억하고 싶은 것만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기억하게 한다. 반대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는 철저히 자신으로부터 배제시키려 한다. 미하엘의 한나에 대한 감정과 한나 슈미츠의 미하엘에 대한 감정이 어떠한 것인지는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미하엘이 한나와의 그 무거운 사랑을 좋아했으면서도 그 무거운 사랑으로부터 언제든 도피하려는 이중적인 갈등을 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P 23

나는 생각을 해서 결론을 이끌어낼 결정을 내리고 나면 그 결론에 집착한다. 그러고 나서 깨닫는다. 행동은 별개의 것이며 결정은 따를 수도 있지만 반드시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하기 않기로 내린 결정을 행동으로 옮긴 경우도 많았고 또 하기로 내린 결정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것’이 행동한다.     


‘그것’은 무엇일까. 15살 미하엘을 움직이는 ‘그것’처럼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그것’이 작동한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행동하게 만들고, 때로는 ‘그것’이 행동을 제지하고... 우리들의 ‘그것’과 미하엘의 ‘그것’은 같으면서도 다를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법률의 역사에는 진보가, 즉 가끔씩 엄청난 퇴보와 후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아름다움과 진리, 합리성과 인간성을 향한 발전이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믿음이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확연하게 느낀 후로 나는 법률의 역사가 취하는, 지금까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형태를 떠올리기 시작했다. 물론 법률 역사의 행보는 뚜렷이 목표점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수많은 충격과 혼란 그리고 미혹 끝에 도달하는 곳은 원래 출발했던 그 장소이다. 법률의 역사는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출발해야 하는 것이다.

          

법률의 역사가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출발해야 하는 것처럼

사랑도, 인생의 의무도, 삶도.... 저마다의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날마다 다시 출발해야 할 것이다.

      


미하엘에게 한나는 해체될 수 없는 완전한 그리고 온전한 것이었다.

17살의 눈에 비친 36살 한나의 모습, 젊은 채로 박제되어 있기를 바랐던...    

한 사람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모습, 나는 어떤 한 사람은  '전체'로 기억하지 못한다.

아니 어쩌면 '전체'로 기억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전체'를 기억하는 일이 두려워서인지 모른다. 

젊음을 관통했던 시간. 나를 스쳐간 사람들은  종이비행기를 날리던 손이었거나, 쌍계사 입구 벚꽃을 바라보던 눈이었거나  목련이 창가로 들어오던 날 마주 보고 앉아있던 누군가의 실루엣이거나 끝내 전해주지 못한 보라색 셔츠이거나, 함께 바라보던 창가의 햇살 같은 것이거나..... 뒤돌아서던 등이었거나... 가로등이 만들어낸 비정상적인 그림자였거나...    

그렇게 해체된 낱낱의 단편으로 기억하는 것은 마음의 부채를 망각하기 위한 회피일지도 모른다. 사람을 안다는 것, 이해한다는 것, 마주한다는 것, 그리고 돌아서는 것...... 마음의 빚이 작동하는 일이다. 그 부채를 평생 지고 살아간다. 기억 속에 흐린 풍경으로 남아있다 해도...  마음의 부채로부터 도망치려는 심리와 마음의 부채를 갚아야 한다는 심리가 동시에 작동한다. 



미하엘 안에는 수많은 모습의 한나가 존재한다

    

p157

불타는 교회 옆에 준엄한 표정으로 검은색 제복을 입고 채찍을 손에 든 채 서있는 한나는 본다, 책을 읽어주는 것을 듣고 있는 한나는 보았다. 낭독이 끝나자 그녀는 책을 읽어주던 여자에게 내일 아우슈비츠로 후송될 것이라 말한다. 소녀가 울기 시작하자 두 여자 들어와 소녀를 끌어낸다. 집 짓는 현장을 감독하는 한나는 보았다. 준엄한 표정과 차가운 눈초리, 꽉 다문 입술. 수감자들에게 채 짝질을 한다     

또 다른 모습의 한나도 있다. 부엌에서 스타킹을 신고 있는 한나, 욕조 앞에서 커다란 타월을 두 손에 받쳐 들고 있는 한나. 치맛자락을 날리며 자전거를 타는 한나, 아버지의 서재에 서있는 한나.  사랑을 나누는 한나...

수많은 한나 속에 그리움과 수치와 분노로 가득 찬 채 깨어나곤 했다. 그리고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하는 불안감으로.     


미하엘 안에 존재하는 한나 슈미츠는 관능적인 것에서 터 준엄하고 차가운, 냉철한, 슬픔 어린, 자존심 강한  그러나 한나 슈미츠 안에 존재하는 미하엘은 오직 같은 미하엘이다. 법과 대학생이든 법률가든, 누군가의 남편이었던 누군가의 아빠였든 간에 한나는 오직 같은 미하엘을 본다. 책 읽어주는 꼬마, 15살의 미하엘.          

어떤 시기에 어떤 사람을 만나는가에 따라 사람의 삶이 달라진다.

미하엘은 한나를 관통함으로써 삶의 방향을 찾을 수 있었다. 한나에게 빚은 진 셈이다. 그러하기에 한나로부터 벗어날 수도 없다. 미하엘은 과거를 극복하기 위해 이 소설을 썼다고 소설이 말미에 밝히고 있지만

과거는 극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과거는 끝없이 온다.

현재에도 미래에도.... 과거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또한 미하엘의 개인적 삶뿐만 아니라 독일의 과거를 여전히 현재의 독일이 품고 있듯이 과거란 현재의 얼굴 속에 혼재한다.


미하엘은 한나 슈미츠 인생의 지연과 실패가 가엾다고 생각한다. 한나가 적절한 때를 놓친 것인지 거부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오랜 시간이 흘러 그것이 환영받는다 해도... 너무 늦은 일이 된다는 것

미하엘의 고민처럼 ‘늦은 것’이 ‘결코 없는 것’보다 나은 것일까.

인생은 서두른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내 의지대로 되는 것도 아니다. 반복되는 지연과 실패, 좌절, 기다림, 끝없이 다른 길을 모색하기... 외면받고 거부당하더라도, 때로는 고통스러울지라도  

‘늦은’. ‘너무 늦은’이 ‘결코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려원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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