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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빈자의 미학

살아있는 침묵을 가지지 못한 도시는 몰락을 통해 침묵을 찾는다.

빈자의 미학     

가짐보단 쓰임이 중요하고

더함보다는 나눔이 중요하며

채움보다는 비움이 중요하다.   - 승효상     


어떤 잘 조직된 사회에서는 그 사회를 지탱하는 그 시대의 정신이 있기 마련이며 ‘시대정신’이란 그 사회의 문화 창조를 주도하는 이념을 가리킨다. 이 이념이 느슨해지고 중심은 상실되어 설명하기 어려운 파편적 현상이 만연할 때 그 시대의 그 사회는 세기말을 맞는다. / P 45


조선 5백 년을 버티게 한 선비 정신은 사라진 지 오래다. 지금의 시대정신은 과연 무엇인가? 빈자의 미학을 읽으며 첫 번째 드는 의문이다.

“살아있는 침묵을 가지지 못한 도시는 몰락을 통해 침묵을 찾는다.” 살아있는 침묵을 가지지 못한 도시... 도시의 침묵을 되찾는 방법은 무엇일까? 두 번째 드는 의문이다.     

‘우리의 도시와 가로는 얼마나 껍데기뿐인 그러한 벽체들로 뒤덮여있는가. 일그러지고 비틀어진 형태, 시뻘겋고 시퍼런 색깔, 현란한 불빛, 각종 악취, 소음, 온갖 저열한 상업적 속성과 우스꽝스러운  졸부들의 가면으로 나타난 이 거리의 파편적 풍경을 향해 우리가 전달해야 할 메시지는 무엇인가? 나는 침묵이 참으로 가치 있고 의미 있음을 그들에게 전해야 함을 믿는다. 

 침묵의 벽. 비록 소박하고 하찮은 재료로 보잘것 없이 서 있지만, 그 벽은 적어도 본질의 문제를 안으며 중심을 상실하지 않는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건축가들이 쌓은 벽이며 결단코 쉽게 허물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 시대 우리의 건축은 과연 어떠한 것인가? 다시 스스로에게 묻는다. /  P 87

                                승효상 (빈자의 미학 중에서)     



  반기능의 사회는 느림, 여유, 침묵의 세계다. 제각각의 걸음걸이. 제각각의 사고가 중요해지는 사회다. 집단의 목소리보다는 개인의 목소리가 더 의미를 지니는 사회다.

  빈자. 다 내려두고 다 버려두어야만 다시 무언가를 채울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 사회가 정한 규격에 자신을 맞추지 않고 자신의 속도를 끊임없이 지속하는 일. 그것은 역기능이 아닌 반기능의 행위다.

  오늘날은 마당이 사라진 지 오래다. 마당은 대표적인 반기능의 공간이다. 승효상은 ‘마당’이야말로 정적인 자투리 공간이 아닌 동적인 장소이며 이야기가 생성되는 곳이라 했다. 마당은 생활뿐만 아니라 우리 사고의 중심이며 우리로 하여금 공동체를 발견케 하는 의식의 공간이다. 그러나 기능 사회에서 ‘마당’이란 무의미한 공간이다. 무언가를 채워 넣어야만 쓸모가 인정되는 기능 사회에서는 ‘비어있음’은 무기력함이다.  승효상의 빈자의 미학은 채워지지 않아야 비로소 쓸모가 생긴다는 ‘쓸모없음의 쓸모’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채워지지 않아야 쓸모가 생긴다는 것.


1월은 한 해의 채워지지 않은 달이다. 아직 채워지지 않은 달력의 숫자들. 새해 3일째다. 겨울이라는 계절은 ‘비어있음’의 계절이다. 빈자. 모든 것을 덜어낸 몸으로 대지를 향해 직립해있는 나무들은 빈자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한 해의 시작의 달. JANUARY의 기원은 시작의 신이라는 야누스에서 왔다고 한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야누스는 농사와 법의 주재 신이면서 성문과 가정의 문을 지키는 신으로 앞뒤가 다른 두 얼굴을 가졌다. 야누스는 본래 사람이 드나드는 문을 지키는 신으로 행운을 가져다주는 신이었다. 그런데 이 야누스 신의 모습이 앞면과 뒷면이 각각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고 하여, 겉과 속이 판이하게 다른 이중인격자를 가리키는 나쁜 의미의 비유로 널리 쓰이고 있다.

 도시의 얼굴은 야누스적이다. 현란한 문명의 이기는 도시의 얼굴을 세련되게 보이게 한다. 현란한 조명은 상대적으로 추한 것들을 은폐시킨다. 은폐된 것들이 때로는 진실의 얼굴이기도 하다. 야누스적인 도시, 야누스적인 사람들이 야누스적으로 살아간다. 우리에게 도시의 얼굴은 가면이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 또한 가면을  뒤집어쓴 채 야누스적 일상을 살고 있다.  밤하늘의 별을 볼 수 없는 도시. 서로의 마음이 식어간다.

그런 때일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승효상의 말처럼  '가짐보단 쓰임', '더함보다는 나눔', '채움보다는 비움'일 것이다.   야누스의 얼굴을 한 1월이다. 시작의 얼굴. 무언가가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는 행운의 얼굴이기를 바란다./ 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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