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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을 기다리는 신춘

1월 1일 자 신문은 글 쓰는 이의 가슴을 환희로 혹은 절망으로 물들게

신춘문예에 대하여

글을 쓰는 이라면 '신춘'이라는 두 단어 앞에서 가슴 뛰지 않는 이가 있을까?

적어도 한 번은 노트 한 면에 당선 소감을 미리 써보는 유희를 즐겨본 적도 있으리라

“당선. 축하합니다.”라는 한 통의 전화를 기다리는 그 날은 예민해진다. 평소에는 잘 모르는 번호가 찍히면 받지도 않던 전화까지도 챙겨서 받아보지만 쓸모없는 상업용 광고 전화일 때 더 허탈해진다. 신춘을 준비하고  투고하는 12월은 마음은 이미 신춘이다. 첫눈을 기다리는 이의 마음처럼 세상 모든 ‘첫’을 기다리는 이의 마음이 되어 본다. 


중복 투고 금지 원칙을 지켜야 하고 신문사마다 요구하는 기준이 달라서 투고하려는 신문사에  맞게 새 글을 써야 한다. 최종 점검을 하는 11월부터 12월은 분주해진다. 시도 소설도 아니고 수필의 경우는 더더욱 투고할 신문사가 제한적이다. 그러하기에 수필 분야 신춘문예 당선이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수필은 누구나 접근하기 쉽고 쓰기 쉬운 글처럼 보이지만 쓰기 쉬워 보이기에 가장 쓰기 어렵다. 교훈에 집중하면 진부해지고 지루한 글이 되기도 한다. 지나친 미사 연구의 남발은 읽는 이에게 진솔하게 다가서지 못하고, 아무리 진솔한 내용이라 해도 지나치게 평범한 글투는 어느 누구의 관심도 끌어내지 못한다. 교술 장르로서의 성격, 미학적 아름다움, 보편적 공감대... 짧은 글 한편에 충족시켜야 할 조건들은 왜 그리 많은지. 어려운 일이다. 세상 모든 글이 양날의 칼이다. 그래서 쓰기 어려운 것이다. 우아하면서 날카로워야 하고, 많이 본 듯하면서도 처음 본 것 같아야 하고 진부한 것 같지만 참신해야 하고, 뾰족하지만 둥글어야 하고, 물 흐르듯 유연하지만 정곡을 찌르는 강력한 한 방이 있어야 하고.... 모순적인 모순의 조합.


다른 이의 글을 보고 평가하기는 쉽다.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그러나 정작 자신의 글 앞에서는 판단력이 흐려진다. 과감히 삭제해야 될 부분을 쓴 공력이 아까워 버리지 못하니 글이 늘어진다. 멋을 부려 강조한 부분은 다른 이가 보면 한눈에 어색해 보이지만 자신의 눈에는 어색해 보이지 않는다.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자꾸만 자신과 타협하려는 것 때문에 좋은 글을 쓰지 못하는 것이리라.

연초 신춘문예 발표가 났고 당선자들의 사진과 글이 신문에 실렸다. 밑줄을 그어가며 심사위원들의 평을 읽는다. 당선자들의 수상 소감까지도 꼼꼼히 읽는다. 어떤 점이 심사위원들의 손을 마지막까지 붙잡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당선자들의 글을 분석하며 읽어본다. 수상작들은 감탄할 만한 작품도 있고 속으로 애매한 느낌이 드는 작품도 있다. 모든 글이란 주관적이게 마련이니. 선정하는 이가 보기엔 대단히 좋은 글인 것이다. “힘이 있다. 문장력이 탄탄하다. 일관되게 하나의 주제로 끌고 간다. 패기가 느껴진다. 참신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감을 준다.... ” 등등

수많은 글들이 그들의 손을 거쳐가지만 어떤 원고는 예심에서부터 주목받지 못하고 사라진다. 어떤 원고는 최종심에서 그들의 손에 여러 번 만지작거리다가 안타깝게 우선순위에서 밀려난다. 글들의 운명인가. 쓰는 이의 능력일까. 


글을 쓰는 이는 많다. 누구나 글을 쓰고 싶다. 작가라 불리는 이도 넘치는 세상이다. 자비로 책을 내어도 작가, 무슨 상을 타도 작가, 등단하면 작가. 작가 양산의 시대다 물론 이 글을 쓰고 있는 브런치에서도 브런치 작가라는 타이틀을 지니고 있기에 글을 발행할 수 있다.

신춘.... 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글 쓰는 이라면 누구나 기다리는 선택의 봄.

올 한 해의 시작도 신춘과는 연이 닿지 않았다. 연이 닿지 않았다는 표현은 자신의 부족함을 은폐하기 위한 애매한 표현이고 글의 완성도, 주제의 참신성 등에서 많이 부족했다는 것이 실질적이고 분명한 이유일 것이다.

새해 다섯째 날. 글을 쓰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어딘지 허전하다. 꼭 신춘문예일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신춘이고 싶은 것은 아마도 새해 새날을 여는 즐거움과 환희를 경험하고 싶어서가 아닐까. 글 쓰는 이들에게 신춘 문예가 월계관처럼 여겨지는  것은 오직 분야별 한 명이라는 희소성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선정되지 못하였다고 하여 좋지 않은 글은 아닐 것이다. 머릿속의 추상화된 것들이 작가의 손을 거쳐 체화된 채 세상에 태어났으니 세상의 글들을 '좋다'와 '좋지 않다'라는 이분법으로 구분하는 것은 서글프디. 세상에 좋지 않은 글은 없으며 선택받지 못한 글들은 있다.

신춘의 여신은 올해도 비켜갔고 다음 주 한파 소식만 들려온다.  / 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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