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시적인 본능이 꿈틀거린다.
< 새로운 시간의 시작 >
눈이 내리기 시작하는 순간을 보아라
하나 둘 내리기 시작할 때
공간은 새로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늘 똑같던 공간이
다른 움직임으로 붐비기 시작하면서
이색적인 선( ) 글과 색깔을 그으면서, 마침내
아직까지 없었던 시간
새로운 시간의 시작을 열고 있다!
그래 나는 찬탄하느니
저 바깥의 움직임이 어떻게
그걸 바라보는 일 없이 어떻게
새로운 시간의 시작이 있겠느냐
그렇다면 바라건대 나는 마음먹은 대로
모오든 그런 바깥이 되어 있으리니.....
- 정현종-
눈이 내리고 있다. 대설 주의보, 대설 경보가 내려진 도시... 첫눈이 오던 날은 온 도시가 축제 분위기였는데 어젯밤부터 내리는 (퍼붓는) 눈은 도시를 침묵 속으로 밀어 넣는다.
굳이 소리가 있다면 눈이 내리는 소리, 눈이 마른 나뭇가지 위에 쌓여 어린 가지가 휘는 소리, 눈을 피하려는 새들의 절박한 날갯짓소리, 얼어붙은 도로 위 견인차의 사이렌 소리다.
시인은 눈이 내리기 시작하는 순간을 '새로운 시간의 시작'이라 칭한다. '새로운 시작의 시간'이 아닌 '새로운 시간의 시작'... 시를 읽으면서 나는 '새로운 시간의 시작'을 '새로운 시작의 시간'이라 자꾸만 읽고 있다.
눈이 내리는 순간은 '시간이 시작'하는 순간이다. 시인은 바라건대 마음먹는 대로 모오든 그런 바깥이 되어싶어 한다. 바깥의 움직임, 그걸 바라보는 일 그리하여 모오든 그런 바깥이 되어있고 싶은 시인의 마음이 전해온다.
눈 내리는 하늘.. 새로운 시간의 시작. 사람들은 하늘에서 쏟아지는 새하얀 것들을 보면 시인처럼 세상의 모오든 바깥이 되고 싶을까. 바깥이 되는 일은 두려운 일. 온몸으로 바깥이 되는 일은 쉽게 결정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염없이 내리는 눈을 보며 나는 문득 구석기인의 마음이 되어본다. 새로운 시간의 시작...
모든 것이 눈으로 덮인 날. 먹이를 구하지 못한 그들이 동굴 안에서 서로의 몸을 부대끼며 온기를 더듬는 모습을 상상한다. 모든 것이 새하얀 시간의 시작에 그들의 하루는 버겁기만 하다.
동굴 안의 벽에 붉은 흙을 짓이겨 커다란 동물을 그리며 내일은 사냥에 성공할 수 있기를 바라는 그들의 마음.
원시 종족의 특성이 아직 내 몸 DNA 어딘가에 남아있는 모양이다. '굶주리고 싶지 않음'의 본능인지 뜨거운 차가 테이블에 하나씩 늘어난다. 사과 모과차에 시나몬을 섞어서 끓인 차. 그 옆엔 먹다 식은 코코아, 아메리카노, 그리고 하얀우유차, 레몬차....
자연 현상 앞에서 인간은 인간 안에 잠재된 생존과 관련된 본능이 스멀거리며 올라온다.
쉬지 않고 내리는 눈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인간이 아닌 동물적인 본능이 강해지는 날이다.
오늘처럼 눈 내리는 날, 새로운 시간의 시작 앞에서는 .......... /려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