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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삶에서 단 하나의 기억만을 선택해야 한다면

영화 <원더풀 라이프 wonderful liffe>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


영화 <원더풀 라이프 wonderful liffe>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두 번째 영화로 1998년 제작되었다. 원제인 < After life >로 더 알려져 있다.

 영화는 '월요일' 아침, 저승으로 가는 경계에서 근무하는 모치즈키와 가와시마가 계단을 오르며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죽은 이들은 영원한 망자들의 세계로 떠나기 전 이곳에 일주일간 머무르게 된다. 

 짙은 안개가 내린 곳, 하나 둘 걸어 들어오는 망자들. 접수처에 이름을 말하고 번호표를 발급받고 면접을 기다린다. 고인들은 지난주에 사망한 사람들로 일주일간 개인실에서 머물면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소중했던 추억 하나를 사흘 안에 선택해야 한다. 

영원한 죽음으로 가기 전 망자들은 ‘당신의 삶에서 다음 생으로 가져가고 싶은 단 하나의 기억은 무엇인지?‘를 고민한다. 만일 단 하나의 기억을 선택하지 못하면 다음 세계로 떠나지 못하고 이곳에 머물러야 한다. 선택된 기억을 직원들이 최선을 다해 실제처럼 재현하고 토요일에 영상으로 상영한다. 영상 속 상황이 자신의 기억과 일치하여 내면의 무언가를 건드리면 너머의 세계로 건너가게 된다.      

      


 새로 입소한 22명의 사람들은 면접 과정을 거치면서 저마다의 인생을 돌아보고 다른 기억은 모두 삭제되고, 삭제되지 않을 오직 하나의 기억만을 선택해야 한다.  가와시마 8명, 스기에 7명, 모치즈키에게 7명이 배정된다.

선택할 마음이 하나도 없고요. 혹시 꿈같은 것으로 대체하면 어떨까요?

과거의 기억은 이미지로 남기 때문에, 완벽한 재현이 불가능하다고. 어쩌면 미래의 꿈을 머릿속에서 재구성하는 것이 더 낫지 않나요?

중2 여름 방학 무렵 전차를 탔어요. 전차 맨 앞자리에 앉아있는데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기억에 남아요.

가방에 달린 방울이 딸랑거리던 그 여자애가 기억나요.

관동대지진이 나던 날, 대나무 숲에서 그네를 타고 엄마가 만든 주먹밥을 먹었지요.

생후 5-6개월이었을까요? 가을 오후인 듯한데 알몸으로 이불 위에 누워 햇볕을 쬐던 기억이요.

자살하려고 전차역으로 뛰어내리려던 순간 철길에 파르스름한 번개빛이 스쳐갔지요. 그때 전차가 지나가버렸지요.

디즈니랜드에 가서 스플래시 마운틴을 마시던 기억이요.

'빨간 구두'라는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지요. 빨간 옷을 입고요. 오빠는 나를 자랑스러워했어요.

전 파일럿이었죠. 구름 한가운데를 통과하던 날의 기억이요.

과거의 순간에 머무른다는 건 너무 고통스러운 일 아닌가요? 

일부러 선택하지 않는 것도 선택이 아닌지요.

22명의 사람들은 인생에서 단 하나의 기억을 선택하기 위해 고심한다.        

     


영화의 주인공 '모치즈키‘는 22살 때 필리핀 해전에서 전사했다.  행복한 기억을 단 하나라도 선택했다면 너머의 세계로 건너갈 수 있었지만 어떤 기억도 선택하지 못한 그는 무려 50년을  망자의 세계에 머물며 다른 이의 기억 재생을 돕는 일을 하고 있다. 

철강회사 직원이었던 와타나베 이치로는 자신의 인생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를 몰라 고민하다  전 생이 담긴 비디오 (살아있었음을 증명하는)를 요청한다. 이치로의 기억 재생 과정을 돕다가 그의 아내 교코가 자신의 정혼자였음을 안 모치즈키는 마음이 혼란스럽다.

젊은 날의 이치로, 중년의 이치로, 인생의 절정을 향해가는 이치로가 마침내 선택한 기억은 아내 교코와 공원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다.      


모치즈키를 짝사랑하는 여직원 '시오리'는 모태의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욕조에서 숨을 참아본다. 자궁의 기억을 되살리는 일은 늘 어렵다.  ‘교코’의 영상을 본 후 이곳에서의 생활을 끝내고 행복한 기억 하나만을 고른 채 너머의 세계로 떠나려는 모치즈키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본다.  모치즈키는 교코와 앉아있었던 그 공원 밴치에 앉아있는 기억을 선택한다.

눈이 내리던 날 시오리는 모치즈키를 떠난 보낸 자신의 허전한 마음을 쌓여있는 눈에 분출한다

22명 중 21살의 이시야는 끝내 기억을 선택하지 못하고 이곳에 남아 직원이 된다. 이시야는 맨손으로 눈을 굴려 커다란 눈덩이를 만들려 하지만 눈을 흩어진다. 아마도 이 장면은 추후 이시야가 행복한 기억의 순간으로 ‘어린 시절 눈사람을 만들던 때’라고 선언할 것 같은 암시처럼 보인다.


영화의 마지막은 접수처 직원이었던 시오리가 모치즈키를 대신해 면접장에 앉아 

면접용 멘트를 연습하는 장면이다.     

“이곳에 일주일간 머물게 되며 당신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추억 하나만 수요일까지 선택해 주세요. 매주 토요일에 영상으로 재현되고 기억이 선물한 느낌이 되살아나는 순간 오직 그 하나의 기억만을 품고 다음 세상으로 떠나게 됩니다.”


월요일, 또 다른 망자들이 접수처에 등장한다. 차례차례 이름을 말하고 대기실로 향한다.

시오리 앞의 의자는 비어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시오리 앞의 의자에 관객인 우리를 초대한다.     

인간 세상을 떠나 망자들의 세계로 간 우리들은 시오리가 권한 의자 앞에 앉아 저마다의 인생을 돌아보고

그중 단 하나의 기억, 삭제되지 않고 오래도록 품고 있을 기억하나만을 골라야 한다          

<wonderfui life>라는 제목처럼 아름다운, 놀라운,  찬란한, 멋진, 대단한 기억을 선택할 것 같지만 망자들이 선택한 기억들은 대부분 감각적인 것이다.

시각과 청각과 후각, 미각, 촉각.... 감각을 제거한 기억이란 결국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어쩌면 기억이란 감각에 의해 견고해지는 것인지도.


기억이란 저마다 기억하고 싶은 방식대로 왜곡되기 마련이지만 그래도 삭제되지 않아도 좋을  기억 하나 품고 있다면 원더풀 한 인생이 아닐까? 면접용 의자에 앉아 나의 기억을 돌아본다

기억들이 차례차례 떠오른다. 슬픈 것들, 가슴 아픈 것들은 가급적 떠올리고 싶지 않다.

어린 시절 눈 내리던 날, 내리는 눈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 얼굴로 떨어지던 눈의 감각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혀를 내밀어 눈의 맛을 보던 기억도, 장갑 안에 꽁꽁 뭉쳐지던 단단한 동그라미의 기억도, 눈을 쓸던 빗자루 소리도... 창밖에 눈은 내리고 따뜻한 방안에 엎드려 책을 읽던 기억..     

입학을 앞두고 선물 받은 공주가 그려진 최신 유행 자석 필통을 날마다 열어보던 기억... 가방 안에 딸랑거리던 물체 주머니 소리.... 하천을 따라 달리던 기억, 하굣길 길 한복판에 죽은 새를 마주한 기억, 소풍 전날의 기억, 솜사탕을 처음 먹던 날의 기억,.... 아버지의 타자소리와... 아버지 병실의 프리지어 향기, 은행잎 날리던 날 헤어진 기억, 학원 옥상에서 기린 같은 그가 종이비행기를 날리던 기억, 조각공원으로 가기 위해 열차에 오르던 기억..... 카페 슈바빙의 창가, 수술 전날의 기억, 웨스틴 조선호텔에서 열렸던 시상식의 기억..... 그리고 창가에 앉아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쓰는 지금의 기억....

떠오르는 기억이 참 사소하고 평범한 것들이다. 

원더풀 라이프인가? 그렇지 않다. 나는 다만 '원더풀 라이프'를 만들어야 하는 의무를 지니고 있다.

앞으로 내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일지 알지 못한다.

나는 무엇을 잘하는지, 특별히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와타나베 이치로의 독백처럼 대충 살고 싶지는 않았는데... 그렇다고 내세울 만한 것도 업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가 그가 우리에게, 우리의 인생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영화 <원더풀 라이프>도 질문을 던진다. 다른 건 다 삭제되더라도 영원히 삭제되지 않을 추억 하나를 간직하고 있느냐고?

만일 그런 추억을 갖고 있지 않다면 지금이라도 만들어야 하지 않느냐고........ 

눈이 내린다. 어린 날 얼굴 위로 쏟아지던 그 서늘함이 느껴진다. 혀 위로 느껴지던 무맛의 맛도..../려원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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