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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만 년 전으로부터 온 편지

또다시, 늘 그래왔던 것처럼... 더 절박한 질문은 없다

올해  2023년 5월 개최된 영국의 대표 정원. 원예박람회인  '첼시 플라워쇼'에서 금상을 수상한 황지해 작가의 '백만 년 전으로부터 온 편지‘('지리산 약초 건조탑')이 왕실 샌드링엄 영지에 기증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을 접한다.     

 지리산에서 영감을 받은 정원 '백만 년 전으로부터 온 편지'(A Letter from a Million Years Past)라는 작품 제목을 보고 황지해 작가의 탁월한 감각에 놀라곤 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백만 년 전으로부터 온 편지’라니...

현란함 속에, 물질문명의 소란 속에 소외되고 배척되고 망각되는 시대에 백만 년 전으로부터 온 편지가 도착했다.

정원 박람회에 대해서도 식물, 원예에 대해서도 나는 잘 알지 못한다

다만 그녀의 작품 제목이 너무도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감성을, 본능을 자극하는 잔잔하면서도 강력한 폭발력을 그 작품의 이름에서 느끼고 전율한다.

5m 높이 '지리산 약초 건조탑'은 스코틀랜드 출신 장인이 자연 채취한 점토, 짚, 모래, 말똥 등을 사용해서 한국과 영국의 전통적 방식을 활용해 제작한 것으로 첼시 플라워쇼 개최 당시 찰스 3세 국왕의 지대한 관심을 끌었던 작품이다. 지리산 깊은 산골 약초를 캐던 이들, 약초를 캐서 건조하고 차를 달여마시던 이들을 기억하는 이들은 하나도 없으리라. 심지어 서양의학에 밀려 존재조차도 희미하다.    

 


가장 토속적인 것, 가장 한국적인 것이 영국 왕가의 영지에 둥지를 튼다는 사실이...     

백만 년 전으로부터 온 편지...

한지에 곱게 싸여 매달린 약초들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안부를 묻는다.

우리의 삭막한 정신은

우리의 공허한 눈빛을

우리의 지치기 쉬운 마음을

우리의 흔들리는 영혼을

우리의 나약함을

우리의 어리석음을,,....  대롱대롱 매달린 봉지 안의 봉인된 향기와 질감과 맛이 우리를 깨운다.


잃어버린 것.... 대체 나는 무엇을 잃어버리고 살아온 것인가.     

새해의 결기는 비장하고

한해의 마지막은 초라하다.

마음은 한없이 가난해진다... 어깨는 움츠려 들고 눈빛은 흔들린다.          

지난해와 새 해가 뒤섞이는 시간.. 어느 순간 둘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생각해 보면 나는 주어진 오늘을 살 뿐이고... 주어진 시간과 주어진 공간 안에 최선을 다하면 그뿐이지 호들갑을 떨 이유도, 회한에 젖을 이유도 없다

창을 경계로 안과 밖이 나뉘듯.... 나는 이제 창의 안 쪽에서 창의 밖을 향하는 것일 뿐, 혹은 창의 바깥에서 안으로 향하는 것일 뿐.... 한해의 끝이라는 것도 한 해의 시작이라는 것도 백만 년 전으로부터 온 편지에 비하면 

실수로 찍힌 점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이 땅에 살았던 백만 년 전 누군가의 흔적, 누군가의 들숨과 날숨이 누군가의 고뇌와 희열이.. 땀과 눈물이... 천함과 고귀함이... 높고 낮음이... 백만 년이라는 세월을 거쳐 우리에게 온 편지일 것이다.     


<20세기의 마지막 문턱에서>

                                                 비스와봐 쉼보르스카

.....

희망,

그것은 더 이상 풋풋한 어린 소녀도,

그와 비슷한 그 무엇도 아니리니, 애석하기 짝이 없구나.

바야흐로 신은 인간이 선하면서, 동시에 강인할 수 있다는 사실에

수긍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선함과 강함은 여전히 공존하지 못한다.

선한 인간은 독하지 못하고, 독한 인간은 선하지 않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누군가 내게 편지로 물었다.

이것은 내가 다른 이들에게 묻고 싶었던

바로 그 질문이었다.


또다시, 늘 그래왔던 것처럼,

앞에서 내내 말했듯이,

이 순진하기 짝이 없는 질문보다

더 절박한 질문은 없다.


(부분 발췌) , 끝과 시작/ 비스와봐 쉼보르스카 시선집  p287/ 문학과 지성사


20세기 초든, 21세기 초든.... 22세기 초든

이 땅의 누군가는 

또다시, 늘 그래왔던 것처럼,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이 순진하기 짝이 없는 그러나 절박한 질문의 답은 어디에 있을까? / 려원


<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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