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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진 곳은 더 이상 외진 곳이 아니다.

- <당신의 외진 곳>/ 장은진 단편소설

외진 곳은 더 이상 외진 곳이 아니다.

당신의 외진 곳장은진-     


  우리는 누구나 외진 곳에 산다. 그 외진 곳은 찬바람 부는 값싼 월세방에 한정되지 않는다. 중심에서 소외된 곳은 어디든 외진 곳이다. 우리 안에도 외진 곳이 존재한다. 음습한 곳, 밝음으로부터 멀어진 곳, 외진 곳에도 더 외진 곳이 있다. 험난한 세상  속에서도 저마다 삶의 길을 부단히 걸어올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안에 존재하는, 우리가 드러내고 싶지 않은 외진 곳에 등불이 켜졌기 때문일 것이다


  장은진의 『당신의 외진 곳』은 어떤 힘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외진 곳에 자리 잡은 그러나 언젠가는 외진 곳을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고 사는 나와 동생의 이야기다. 반토막 보증금에 맞춰 네모집 9번 방으로 이사하던 날. 눈이 내렸다. 울퉁불퉁 비포장길, 용달차 안에서 동생과 나의 몸은 여러 번 부딪쳤고 자주 출렁였다. 중등임용고시를 준비하면서 어린이집 보육교사 보조로 일하는 나와 일본에 빠져 일본어를 전공하고 여행사일을 했지만 편의점 알바를 전전하는 동생은 꿈과 상관없는 일을 하며 근근이 살아간다.

   반토막 난 보증금에 맞춰 반토막 사이즈인 네모집 9번 방에 둥지를 튼다. 그들 말처럼 ‘여기까지’ 굴러오게 된 것이다. 마당을 지나 공동화장실에서 고무신 모양 변기에 쭈그리고 앉아 볼일을 볼 때 그들은 비로소 얼마나 외진 곳으로 밀려났는지를 실감한다. 네모집에 세 들어 사는 이들, 같은 주소를 가진 이들이지만 성도 이름도 모르는 그들은 n번방 사람일 뿐이다. 우연히라도 마주침을 피하는 것이 암묵적 동의처럼 느껴진다. 힘의 원천이 무엇이든, 힘이 없으면 누구나 외진 데로 밀려나기 마련이니까. 3번 방, 5번 방처럼 숫자로 명시되는 그들 또한 중심에서 외진 곳으로, 외진 곳에서 더 외진 곳으로 끊임없이 밀려났을 것이다.


   변방임을 실감하게 하는 것이 어둠의 질감과 깊이라면 외진 곳의 어둠은 깊고 두껍다. 그 어둠 속, 방들에 하나 둘 불이 켜지면 비로소 사람의 온기가 느껴진다. ‘나’는 화장실에 갈 때마다 습관적으로 불 켜진 방을 세어보는 습관이 생겼다. 불빛과 소리로만 존재하는 것 같은 사람들, 방문 여닫는 소리, 신발 끄집는 소리와 종잇장처럼 가벼운 한숨 소리들은 이곳에 오래 머물지 않으리라는 다짐처럼 들린다.

  어떤 사정으로 이 먼 데까지 밀려오게 되었는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언제부터 살기 시작했는지 알 수 없다. 단거리 달리기 선수처럼 언제든 튀어나갈 준비라도 하듯 네모집에서는 소리 소문 없이 사람이 빠져나간다. 주인 내외가 기거하는 방을 뺀 총 9개의 방에는 일련번호가 붙어있고 공동화장실, 사워실, 3대의 코인 드럼 세탁기가 있다. 네모집 사람들은 네모집에 거주(residence) 하지만 여전히 거소지(domicile)를 열망한다. 단지 신체가 머무는 곳이 아닌 안주를 갈망하는 정신까지도 머무르는 영구적 장소인 거소지를 꿈꾸는 그들에게 네모집 방들은 거소지를 찾기 전까지 잠깐 멈춤의 공간일 것이다. 


  폭설 내린 밤,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은 순결한 마당에서 나는 습관대로 불 켜진 방을 센다. 아홉 개의 방 모두에 불이 들어와 있으면 한 가지 질문에 아홉 개의 똑같은 대답을 듣는 것 같아 따뜻해진다. 혼자서 눈을 굴려 농구공 만하게 키워가는 동안 5번 방 남자도 덩달아 눈덩이를 뭉친다. 말 한마디 없이 각자의 눈을 굴리고 조금 더 큰 눈덩이는 아래에 더 작은 눈덩이는 그 위에 얹는다. 눈사람이 스스로 녹아서 작아지고 찌그러질 때까지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고 아무도 무너뜨리지 않았다. 마치 눈사람은 네모집 사람들의 자존심처럼 여겨졌다. 눈사람이 녹는 동안 8번 방에 새 사람이 들어왔고 임용고시 필기시험 결과 발표가 있었다. 

 “우린 아직 젊어.”라는 동생의 말에 위안을 얻으면서도 젊음과 청춘이 절망을 이겨낼 수 있는 약이라면, 젊지 않은 나이에 실패와 좌절이 찾아오면 무엇으로 이겨낼 수 있을지 두려운 생각을 한다. 나무의 나이테는 성장의 기록이기도 하면서 어쩌면 절망의 기록인지도 모른다. 사람 안에도 성장과 절망이 기록이 나이테처럼 새겨져 있을 것이다. 우리 몸의 태생적 중심으로부터 자기 안의 외진 곳으로 밀려난 것들이 삶의 무늬에 영향을 미치고 외진 곳들이 모여서 만들어낸 울퉁불퉁한 나이테가 사람의 나이일 것이다. 스물다섯 해를 산 동생의 삶 어딘가에 새겨진 무늬는 결코 지워지지 않고 있다가 어려울 때마다 드러나 현재를 견디고 좌절을 이겨내게 해 준다.


  늦은 밤 주인집 둘째 아들이 술을 먹고 나타나 부모에게 행패를 부린다. 욕지거리가 난무하는 밤.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 불을 켜거나 끈 채로 저마다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것이다. 네모집 세입자들이 겉으로 고요하게 보이는 것은 실패와 좌절이 없어서가 아니라 아마도 숨죽이고 감내하고 있어서 일 것이다. 무엇을 감내해야 하는지, 무엇을 버텨야 하는지는 각자의 몫이지만 어쩌면 죽기 살기로 ‘지금’을 버티고 있는지 모른다. 

  크리스마스이브. 불 켜진 9개의 방, 그 한가운데 오래된 나무에 전구를 둥그렇게 휘감아 놓은 트리의 모습으로 나는 앉아있다. 자정 무렵 3번 방의 전구가 갑자기 꺼지고 3번 방 여자는 다음날 도망치듯 떠났다. 그녀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듯 떠난 곳도 알지 못한다. 아마도 그녀는 끝없이 그녀를 쫓는 남자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더 외진 곳으로 숨어들지 않았을까 짐작할 뿐이다. 

   일본으로 건너가 일자리를 구할 생각으로 들떠있는 동생에게 어린이집 폐쇄로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다는 말을 꺼내지 못한다. 일본으로 떠나기 전날 밤, 이별을 염두에 둔 만찬을 준비하여 걸음을 재촉한다. 가빠지는 숨을 따라 흩날리는 눈송이, 네모집 마당 한가운데서 숨을 고르며 불 켜진 방을 세어본다. 모두 다섯 군데였다. 동생이 떠나고 나면 아마도 더 자주 저 불빛을 세게 될 것 같다. 그녀의 곁을 스쳐 5번 방 남자가 자기 방으로 들어가 불을 켜자 창호지 문이 노랗게 밝아졌다. 


  깊은 밤 같이 눈덩이를 굴려주는 남자가 있고, 편의점까지 타고 갈 자전거를 빌려주는 여자가 있고, 쫓기듯 들어와 숨은 여자를 감춰주는 이들이 있으며 크리스마스이브 날 모두 시내 중심가로 나가 즐기지 않고 약속이나 한 듯 네모집에 들어와 불을 밝히는 이들이 있어 외진 곳은 더 이상 외지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외진 곳으로 떠밀려 왔다 하더라도 같은 시간 같은 불을 밝힘으로써 서로를 품어준다. 네모집을 떠나면 어떤 이는 더 외진 곳으로 밀려날 수도 있고 또 어떤 이는 중심을 향해 한걸음 다가갈 수 있다. 아마도 저마다 네모집에서의 시간이 만들어낸 무늬가 될 것이다. 

  네모집이 잠시 머무는 거주지일지 아니면 끝내 거소지를 찾지 못하고 영구적으로 머무는 거주지가 될지 모르지만 꿈을 꾸는 공간인 것은 분명하다. 언제, 어디에 있건 꿈은 현실을 견디게 해주는 강력한 처방전이다. 나와 동생은 20대, 끓어오르기 시작하는 나이다. 네모집에서의 잠시 멈춤의 시간 동생은 일본으로의 날갯짓을 시작하고 나는 실직 상태로 돌아온다. 하지만 쓰러지지 않고 오롯이 녹아 없어질 때까지 존재하였던 눈사람처럼 희망이라는 목적을 품고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은 좀 늦었네요.”라는 5번 방 남자의 말은 그 또한 네모집 마당 한가운데에 서서 불 켜진 방들을 수 없이 세어본 적이 있음을 암시한다. 외진 곳의 네모 집에서 숨죽인 목소리들은 점멸하는 불빛으로 말을 한다. 오늘을 무사히 견뎌왔음을, 그리고 여전히 ‘지금’을 견디고 있음을, 그리고 하루하루 ‘미래’라는 희망을 켜고 있음을. 

  누군가의 불빛이 꺼지는 날은 더 외진 곳으로 쫓기듯 달아나는 날이 아니라 덜 외진 곳, 중심부를 향해 한 걸음 더 다가간 날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네모집 사람들은 마당 한가운데에 서서 수없이 불빛들을 셀 것이다. 누군가를 위해 깜박이는 불빛이 있는 한, 마당 한가운데에서 그 불빛을 세는 누군가가 있는 한 외진 곳은 더 이상 외진 곳이 아니다.


오래전 읽었던 장은진의 소설 <당신의 외진곳> ...  나는 그때 누군가 마당 한가운데에 서서 내 방의 불빛을, 누군가의 방의 불 빛을 세어준다면 세상은 더 이상 외진 곳이 아니라고 썼다... 낭만적인 결론이다. 세상은 이 글을 쓰던 때보다 더 살기 힘들어졌다. 더 외진 곳이 늘어났고, 눈물 흘리는 자들은 더 많아졌다

어디로, 어떻게..... 정답 없는 세상에 수많은  N 번 방의 사람들. 세상은 친절하지 않다.  그래서일까?


작년에는 니체철학이 인기몰이를 하더니 작년 말 올해 초부터는 아르투어 쇼펜하우어가 인기를 끌고 있다. 

아마도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외진 곳'이 많다는 의미가 일 것이다. 마음의 외진 곳, 의지할 곳 없어 구닥다리 철학이라도 끌어당기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사회가 되었다는 반증이리라.


니체와 쇼펜하우어는 내 젊은 시절의 멘토였다. 앞이 보이지 않을 때  두 사람에게로 달아났다가... 잔뜩 냉소적인 독설을 듣고 나면 정신이 번쩍 들곤 했다. 형체 없는 젊음이 두렵고 버거 었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형체 있는 두려움이 버거운 나이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다시 읽어야 할까 생각한다.

형체 있는 두려움에 맞서기 위해서, 아니면 형체 있는 두려움을 기꺼이 받아들이기 위해서...


며칠 동안 내린 눈이 녹고 있다. 외진 곳. 나의 외진 곳과 당신의 외진 곳, 익명의 사람들의 외진 곳들이 줄어든다면... 세상은 조금은 따뜻해질까.... 그러하다면 쇼펜하우어는 다시 도서관 서고의 깊숙한 창고로 들어가겠지... 오래도록 동면의 시간을 보내겠지... 려원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 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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