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는 푸른색이다. 어떤 먼지도

그것의 색깔을 바꾸지 못한다/ 기형도 <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     


나에게는 낡은 악기가 하나 있다, 여섯 개의 줄이 모두 

끊어져 나는 오래전부터 그 기타를 사용하지 않는다

‘한때 나의 슬픔과 격정들을 오선지 위로 데리고 가 푸드

려운 음자리로 배열해 주던 ‘ 알 수 없는 일이 있다. 가끔씩

어둡고 텅 빈 방에 홀로 있을 때 그 가타에서 아름다운

소리가 난다. 나는 경악한다. 그러나 나의 감각들은 힘센

기억들을 품고 있다. 기타 소리가 멎으면 더듬더듬 나는

양초를 찾는다. 그렇다. 나에게는 낡은 악기가 하나 있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가끔씩 어둡고 텅 빈 희망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 이상한 연주를 들으면서 어떨 때는

내 몸의 전부가 어둠 속에서 가볍게 튕겨지는 때도 있다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는 푸른색이다

어떤 먼지도 그것의 색깔을 바꾸지 못한다.          


-기형도 

        


1989년 3월 7일 이른 3시 30분, 서울 종로 3가 파고다극장의 한 좌석에서 주검으로 발견된다. 사인(死因) 뇌졸증.   왜 그가 심야 영화를 보러 갔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의 첫 시집이자 마지막 시집은 그의 사후에 출간되었다.  사후 출간된 『입 속의 검은 잎』이라는 시집 제목은 평론가 김현 선생이 정한 것이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     

『입 속의  검은 잎』/문학과 지성사 시인선          


그러나 나의 감각들은 힘센

기억들을 품고 있다. 기타 소리가 멎으면 더듬더듬 나는

양초를 찾는다. 그렇다. 나에게는 낡은 악기가 하나 있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가끔씩 어둡고 텅 빈 희망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 이상한 연주를 들으면서 어떨 때는

내 몸의 전부가 어둠 속에서 가볍게 튕겨지는 때도 있다


우리는 얼마나 보이지 않는 희망에 기대어 사는가

텅 빈 희망 속으로... 끝없이 "~ 좋아질 것이다. 잘 될 것이다"라는 희망 고문을 하며 살아간다.

삶은 늘 숨바꼭질 같은 것이다. 희망의 얼굴이 보이는가 하면 절망의 몸통이 보이고 절망의 몸통을 보고 나면 

희망의 꼬리가 약간 보인다. 절망과 희망의 변주 사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범함은 간주곡 같은 것이다.    

줄이 끊어진 기타에서 소리가 날리 없다.  그러나 그의 감각들은 힘센 기억이란 걸 품고 있어서.... 환청 같은 그 이상한 연주 소리를 듣고 있으면  가라앉은 몸의 전부가 어둠 속에서 튕겨지는 때도 있다고 말한다.


먼지투성이의 종이를 발견한다

그것은 본래의 푸른색이다. 어떤 먼지도 그것의 색깔을 바꾸지 못한다.     

때로 삶은 먼지 투성이 같다고 여겨질 때가 있다. 닦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버려 두고 싶을 때가 있다. 방치인지... 게으름인지 비겁함인지... 회피인지... 무기력인지.  포기인지...

먼지 속의 그것이 본래 무엇이었는지, 무슨 색깔, 무슨 재질, 무슨 용도였는지 조차 망각해 버린 시간.   

   

시인은 말한다. 어떤 먼지도 본래의 색깔을 바꾸지는 못한다고...     

시인의 한 마디가 어정쩡하게 보낸 1월 마지막날의 위로이자 격려라고 생각하고 싶다

벌써 달력을 넘겨야 한다. 참 안일했구나... 참 대충 살아버렸구나.....

먼지에 가린 종이의 색깔조차도 잊어버릴 정도로... 먼지 내려앉은 1월의 달력.

          


오랫동안 글을 쓰지 못했던 때가 있었다. 이 땅의 날씨가 나빴고  나는 그 날씨를 견디지 못했다. 그때는 거리는 있었꼬 자동차는 지나갔다. 가을에는 퇴근길에 커피도 마셨으며 눈이 오는 종로에서 친구를 만나기도

했다. 그러나 시를 쓰지 못했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들은 형식을 찾지 못한 채 대부분 공중에 흩어졌다. 적어도 내게 있어 글을 쓰지 못하는 무력감이 육체에 가장 큰 적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그때 알았다.     

그때 눈이 몹시 내렸다. 눈은 하늘 높은 곳에서 지상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러나 지상은 눈을 받아주지 않았다. 대지 위에 닿을 듯 하돈 눈발은 바람의 세찬 거부에 떠밀려 다시 공중으로 날아갔다, 하늘과 지상

어느 곳에서도 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처럼 쓸쓸한 밤눈들이 언젠가는 지상에 내려앉을 것임을 안다. 바람이 그치고 쩡쩡 얼었던 사나운 밤이 물러가면 눈은 또 다른 세상 위에 눈물이 되어 스밀 것임을 나는 믿는다. 그때까지 어떠한 죽음도

눈에게 접근하지 못할 것이다   (시작메모. 1988. 11. 기형도)          


1989년 그 혼돈의 시기에 세상을 떠난 여전히 젊은 시인

기형도의 시를 읽는 아침..     

하늘 높은 곳에서 지상으로 곤두박질치는 눈은 지상에서도 받아주지 않는다. 닿을 듯 말 듯 하다

거부에 떠밀려 어디론가 흩어진다.  그러나 언젠가 슬그머니 내려앉으리라...

곤두박질, 거부, 혼돈,  방황, 마침내 자리 잡기... 눈의 죽음이라니....

그 어떤 죽음보다 거룩한 눈의 죽음이라니....


“내가 하고 싶었던 말들은 형식을 찾지

못한 채 대부분 공중에 흩어졌다. 적어도 내게 있어 글을 쓰지 못하는 

무력감이 육체에 가장 큰 적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그때 알았다. “     

글을 쓰지 못하는 무력감이 육체에 가장 큰 적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려원


<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


작가의 이전글 외진 곳은 더 이상 외진 곳이 아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