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다산을 하는 작가, 난산을 하는 작가

이탈로 칼비노 < 어느 겨울밤 한 여행자가 >를 읽다가... 문득

비가 오는 날은 강변 카페에 가서 진한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창가에 앉아있고 싶다.

사람들은 오직 나의 등만 볼 수 있는 자리..

내 눈앞에는 하늘과 비의 경계가 무너진 강이 보이고

내 손가락은 키보드 위를 달리고. 후각은 갓 내린 비 내음을... 미각은 씁쓸함을... 청각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끝없이 흡입하겠지.... 누군가이 시선이 내 등에와 박히더라도 나는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쓴 커피를 홀짝이며 한 없이 기억을 더듬어볼 것이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비가 내렸다. 머릿속으로 강변 카페엘 가고 싶다는 생각만 할 뿐 어느새 핸들은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어젯밤 꿈속에 굽 높은 빨간 구두를 신은 여자를 보았고 그녀의 굽 한쪽이 부러지는 것을 보았다.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사람인데도 마치 자신의 일인 것처럼 무언가 찜찜한 생각이 드는 것...

비 내리는 도시의 풍경은 온통 회색이다. 부러진 빨간 굽이 이미지로 겹쳐 보인다.     


글을 쓴다는 것.... 익명의 독자를 의식하는 글 쓰기란 부담스러운 작업이다. 

이탈로 칼비노의 작품『어느 겨울밤 한 여행자가』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p213~

그런데 만일 독서하고 있는 그녀를 내가 지켜보듯 그녀가 글을 쓰고 있는 나를 망원경으로 지켜본다면 나는 창 쪽으로 등을 돌린 채 책상에 앉아 있다. 그리고 바로 이때 내 뒤에서 막힘없는 문장을 갈망하고, 내가 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끌어가는 눈길이 느껴진다. 독자의 나의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다. 나는 내 어깨너머로 얼굴을 들이밀고 종이 위에 서서히 쌓이는 단어들을 빼앗아 가는 수많은 독자들의 시선을 느낀다. 누군가 바라보면 난 글을 쓸 수 없다. 쓰는 게 더 이상 내 일이 아닌 듯한 기분이 든다. 나는 사라지고 싶고 그들의 눈 속에 나타나는 기다림에다 타자기에 걸린 종이를 남겨두고 싶다. 아니면 최대한으로 한다 해도 자판을 치는 내 손가락만을 보고 싶다.     

지금 내가 여기 없다면 얼마나 글을 잘 쓸 수 있을까! 백지와 형태를 취했다가 그 누구에 의해서도 글로 쓰이지 못하고 요동치다 사라지는 단어들과, 이야기들 사이에 나라는 개인의 그 불편한 칸막이를 세우지 않을 수만 있다면! 문체, 취향, 개인, 철학, 주체성, 문화적 배경, 삶의 경험, 재능, 상술, 내가 쓰고 있는 글을 내 것으로 알아볼 수 있게 해주는 이 모든 요소들이 내 가능성을 제한하는 새장처럼 느껴진다. 내 손이 하나뿐이라면 펜을 쥐고 쓰는 손 하나뿐이라면... 이 손을 움직이는 사람은 누구일까? 익명의 군중? 시대정신? 집단 무의식? 모르겠다.

나 스스로 지워버리고 싶은 것으로 정의할 수 있는 무언가의 대변인이 되기 위해서는 아닐 터이다. 쓰이길 기다리는 쓸 수 있는 글과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이야기될 수 있는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문체, 취향, 개인, 철학, 주체성, 문화적 배경, 삶의 경험, 재능, 상술, 내가 쓰고 있는 글을 내 것으로 알아볼 수 있게 해주는 이 모든 요소들이 내 가능성을 제한하는 새장처럼 느껴진다. 내 손이 하나뿐이라면 펜을 쥐고 쓰는 손 하나뿐이라면... 이 손을 움직이는 사람은 누구일까? 익명의 군중? 시대정신? 집단 무의식? 모르겠다.     

이 손을 움직이는 사람은 누구인가?

내 안의 '나‘일까.. 익명의 독자, 시대, 문화, 트렌드. 내가 읽고 듣고 보고 느낀 것들.....

나를 낯설게 하는 것, 당혹스러움... 기억.. 눈물, 희열, 기대, 좌절... 일어섬.. 부재, 결핍, 열망과 욕망. 자존과 열등감, 인내....

             

  


P214

어쩌면 내가 망원경으로 관찰하고 있는 저 여자는 내가 글을 써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모를 수도 있다. 그녀가 나에게 기대하는 것은 바로, 그녀가 모르는 것을 내가 쓰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기대, 내 언어들이 채워야만 할 그 공간을 확실히 알고 있다.     

가끔 나는 이미 있는 무엇, 그러니까 이미 누군가 했던 생각들, 이미 이루어진 대화들, 이미 일어난 사건들, 이미 가본 장소와 환경 같은 것을 써야 할 책의 소재로 생각한다. 책은 글쓰기로 번역된 쓰이지 않은 세계의 등가물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가끔은 써야 할 책과 이미 존재하는 것들 사이에 일종의 상호, 보충적인 관계가 있다고 이해해도 될 듯하다. 책은 쓰이지 않은 세계를 쓴 보완물이 되어야 한다. 책의 소재는 책으로 쓰이지 않으면 존재하지도 존재할 수도 없지만, 존재할 때는 바로 그 자체가 가진 불완전성으로 인한 부재의 느낌이 막연하게 전달되는 어떤 것이어야 한다.     

나는 이런저런 식으로 계속 상호 의존적 관계에 대한 생각을  머리에서 떨쳐 내지 못하는 나를 본다. 글쓰기가 이렇게 나를 무겁게 짓누르는 작업으로 제시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책은 글쓰기로 번역된 쓰이지 않은 세계의 등가물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가끔은 써야 할 책과 이미 존재하는 것들 사이에 일종의 상호, 보충적인 관계가 있다고 이해해도 될 듯하다. 책은 쓰이지 않은 세계를 쓴 보완물이 되어야 한다. "칼비노의 책에 대한 정의가 기발하다.

책은 쓰이지 않은 세계를 쓴 보완물이 되어야 하는 것.... 쓰이지 않는 세게를 쓰는 일이라.

               


P215 ~217 인용        

........ 한 작가는 다작을 하는 작가이고 다른 작가는 난산을 하는 작가이다.

난산의 작가는 다산의 작가가 원고지를 질서 정연한 글자로 채워 나가는 것과 정리된 원고지가 차곡차곡 쌓이는 것을 본다. 곧 책이 끝날 거야. 신작 베스트셀러가 또 한 권 나오겠군

난산의 작가는 약간 무시하며, 그리고 질투도 느끼며 이런 생각을 한다. 그는 다산의 작가를  대중의 취향을 만족시키기 위해 시리즈 소설들을 대량으로 생산. 하는 유능한 장인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게 질서 정연하고 확실하게 스스로를 표현하는 그에 대해 질투심이 일어나는 건 어쩔 수 없다. 그의 감정은 질투이면서 감탄이기도 하다. 진심 어린 감탄이다. 그가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글쓰기에 쏟아붓는 방법 속에는 너그러움과 소통에 대한 신뢰 그리고 내면적인 문제들을 스스로에게 제기하지 않은 채  다른 이들이 그에게서 기대하는 것을 독자에게 줄 수 있다는 믿음이 확실하게 들어있다. 난산의 작가는 다산의 작가와 비슷해질 수만 있다면 어떤 대가라도 치를 수 있을 것 같은 심정이다. 그는 다산의 작가를 모델로 삼고 싶다. 이제 다산의 작가처럼 되는 게 그의 가장 큰 열망이다.     


다산의 작가는 책상에 앉아 난산의 작가를 관찰한다. 난산의 작가는 손톱을 물어뜯고 머리를 긁적이고 종이를 찢고 벌떡 일어나 커피를 만들러, 차를 타러, 캐모마일을 가지러 부엌으로 간다. 그러다가 훨덜린의 시를 읽는다(물론 지금 그가 쓰는 글은 훨덜린의 시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미 써놓은 원고를 한 장 다시 베꼈다가 한 줄 한 줄 다 지워버린다. 세탁소에 전화를 한다(파란 바지는 목요일에  세탁이 끝난다고 한다) 그런 다음 지금 당장이 아니라 나중에 필요한 메모를 몇 가지 한 뒤 백과사전에서 태즈메이니아에 대한 단어를 찾아보러 간다.(물론 그가 쓰는 글에는 태즈메이니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원고 두 장을 찢어버리고 라벨의 레코드를 올려놓는다. 다산이 작가는 난산의 작가가 쓴 작품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의 작품을 읽어보면 당장은 분명한 포인트를 잡은 듯하지만 곧 그 포인트가 사라지고 당혹감만 남는다. 하지만 글을 쓰고 있는  그 작가를 바라보는 지금, 그 남자가 분명히 알 수 없는 무엇, 혼란스러움, 어디로 가게 될지 모르지만 새롭게 내야 할 길과 투쟁하고 있음을 느낀다. 이따금 그는 난산의 작가가 허공에 드리워진 팽팽한 밧줄 위를 걷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자신이 그에게 감탄하고 있음을 느낀다. 감탄만이 아니다. 질투심도 섞여 있다. 난산의 작가가 추구하는 것과 비교했을 때 자신의 작업은 아주 제한적이고 표면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난산의 작가와 다산의 작가...

다산의 작가는 질서 정연한 글자로 채워지는 정리된 원고...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글쓰기에 쏟아붓는 방법 속에는 너그러움과 소통, 독자에게 줄 수 있는 믿음이 들어있다. 난산의 작가는 혼란스러움, 어디로 가게 될지 모르만 새롭게 내야 할 길과 투쟁한다. 허공에 드리워진 팽팽한 밧줄 위를 걷고 있다.    

 

나는 ‘작가’라는 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작가作家 너무 무겁거나 너무 가벼운 단어처럼....

혹은 일상어처럼....... 이미 품위를 상실한 심지어 비속어처럼도 여겨지는 단어 '작가'......


글을 쓰는 일은 낳는 일이다. 아무것도 없는 여백... 백지든, 하얀 모니터든

손가락의 끝에서 거미줄처럼 뻗어 나오는 단어들을... 무작위적으로 연결하는 일. 연결하되 흐름을 갖게 하는 일, 생명을 부여하는 일.... 누군가의 가슴에 화살처럼  날아가 박히는 일...

     

다산을 하는 작가는 빠르고 쉽고 규칙적으로 민첩하게, 문제없이, 자신감 넘치게, 유행에 민감한 베스트셀러라는 작품들을 쑥쑥 낳는 사람,

난산을 하는 작가는 하나의 작품을 쉽게 마무리 짓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칼비노의 정의에 공감한다. 무언가를 낳긴 낳아야 하는데 쉽지 않다. 그러하기에 다시 일어나 무언가를 가지러 가고. 어딘가에 업무적인 전화를 하고... 갑자기 생각난 일을 하고... 관련 자료를 찾다가 뜬금없는 기사에 낚여 한참을 헤매고... 아무 상관없는

무언가를 읽고.... 다시 컴퓨터 앞으로 돌아와 앉는다. 일어나서 앉기까지 수많은 일이 일어난다.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가고... 글은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과 전혀 다른 글로 진행된다...


칼비노는 어떤 작가였을까? 아마도 후자이지 않았을까?

어디로 갈지 모르지만 새롭게 내야 할 길과 끝없이 투쟁하는 작가. 

하지만 난산을 하면서도 끝없이 다산을 하는 작가가 아니었을까?.... 끝없이 독자의 가슴에서 살아 숨 쉬는 작가.... 그의 책을 읽는 익명의 독자가 자꾸 밑줄을 긋게 하는 작가.

 

여전히 비가 내린다...

빗줄기가 굵어진 듯하다.

강변 카페의 창밖에도 지금 비가 내리고 있겠지...

하늘과 강이 하나로 보이겠지... 지금처럼 어둠이 내려앉은 시간이면

진한 커피 향과 스콘 한 조각... 목소리들.... 빗물에 번들거리는 입구.... 우산의 물기를 터는 소리... 음악소리... 웃음소리.... 불빛들.... 여자의 빨간 굽.....

여자의 부러진 빨간 굽... 왜 굽이 부러졌는지? 다시 꿈으로 돌아가 생각한다..

난산을 하는 중이다.

다행히 내게 오늘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여전히... 비 내리고

여전히... 세상에 없는 길을 내어야 하는 나는...

그래... 조만간 강변 카페로 가 볼 생각이다........./ 려원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 수필과 비평사 / 려원 산문집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


작가의 이전글 '문화'라는 기성복 대신 자기 안의 야성을 입는 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