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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람스를 좋아하나요...

 프랑수와즈 사강/  낯섦을 버리고 익숙함을 선택하는 관성, 슬픈 관성

“예술의 환상은 우리로 하여금 위대한 문학이 삶과 밀착되어 있다고 믿게 하지만 진실은 그 정반대다. 삶이 무정형적이라면 문학은 형식적으로 잘 짜여있다.”

                                                                     프랑수와즈 사강

          

노년에 대한 사강의 생각

“ 욕망을 실현하는 것이 불가능해지는 떼, 더 이상의 만남이 불가능해지는 때, 머릿속에서 분방한 생각들이 오가는 가운데 아침 추위로 이가 딱딱 마주치는 때, (....) 지금 유일하게 안타까운 것은 읽고 싶은 책들을 다 읽을 시간이 없다는 것뿐.”   

  

사강의 나이 24살 때의 작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물음표가 아닌 말 줄임표)

14살 연상의 클라라 슈만을 평생 마음에 품었던  요하네스 브람스, 프랑스인들에게 브람스는 비호감이라 한다. 따라서 프랑스에서 브람스 연주회에 상대를 초대할 때는 이 질문이 필수라는 말도 있었다 한다. 물론 지금은 아닐 수 있지만 사강이 이 작품을 구상하였을 때는 그러하지 않았을까.     

사랑의 영원성이 아닌 사랑의 덧없음.  

“사랑에 대해 세월이 할 수 있는 일은 그것을 견디게 해주는 것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강을 다시 읽는다.  덧없고 변하기 쉬우며 불안정하고 미묘한 사람 사이의 감정     

                                                                         (김남주의 해설 중에서)     


<브람스를 좋아하세요...(Aimez-vous Brahms...)> / 프랑수아즈 사강          


1장

 

폴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이런 경우 흔히 갖게 마련인 신랄함이나 당혹감이 아니라 조심성에 가까운 차분함을 가지고 좌절로 얼룩진 거울 속의 얼굴을 서른아홉 해로 나누어보았다.

.... 그녀가 이렇게 거울 앞에 앉은 것은 시간을 죽이기 위해서였으나 정작 깨달은 것은 사랑스러웠던 자신의 모습을 공격해 시나브로 죽여온 것이 다름 아닌 시간이라는 사실이었다.‘전적으로, 그 무엇으로도 대체 불가능한 방식으로 행복했던 것은 그 순간이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그 기억은, 이를테면 지켜지지 않은 약속에 대한 기억과 비슷했다.


p11

로제가 도착하면 그에게 설명하리라, 설명하려 애쓰리라...

9시 정각 초인종이 울렸다. 로제였다... 그녀는 문 앞에서 둔중한 모습으로 미소 짓고 있는 그를 바라보며 이것이 바로 자신의 운명이라고, 자신은 그를 사랑하고 있노라고 체념 어린 태도로 되뇌었다..      


p13

로제의 차에 탄 폴은 방심한 태로도 라디오를 켰다.... 자신의 길고 잘 손질된 손가락, 정맥이 드러나 손가락 쪽으로 돌진하며 이리저리 뒤얽혀있었다.‘내 삶을 반영하는 것 같군’ 하고 생각했다

“내가 이런 동작을 몇 번이나 했을까? 당신과 저녁 식사를 하로 가면서 이 차의 라디오를 켜는 것 말이야?”

그는 줄곧 그녀의 기분에 놀라울 정도로 민감했고 언제나 경계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나는 왜 이렇게 차를 빨리 모든 걸까. 청년처럼 보이려는 게 아닐까 싶어.”

그녀와 만나기 시작한 이후 그는  줄곧 청년인 체했고, 실제로도 자신을 ‘청년’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젊게 보이고 싶은 욕구는 누구에게나 있다. 

줄곧 청년인 체했고, 실제로도 자신을 ‘청년’처럼 여기고 싶어 하는 남자.

그러하기에 그(로제)는 늘 새로운 일회용 데이트 상대를 찾는 것일까.               


p 17

오늘 밤도 혼자였다... 무기력한 평온 속에서 보내야 하는 외로운 밤들의 연속... 로제는 아마도 가끔은 그녀를 필요로 하리라... 하지만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라 본능적으로만 필요로 할 뿐임을 그녀는 때때로 느낄 수 있었다.... 로제는 자기 집  앞에 차를 세워 넣고 오랫동안 걸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무언가를 막연히 요구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당연히 그녀 곁에 머물고 그녀와 사랑을 나누었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걷고 싶었고, 거리를 가로지르고 싶었고 이리저리 배회하고 싶었다,          


첫 문장은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폴의 모습에서 시작한다. 로제를 기다리고...

무기력한 평온 속에서 보내는 외로움의 밤. 로제는 폴을  그녀의 집에 내려주고는 돌아와 이리저리 배회한다

로제 안의 무엇이 이런 양가감정을 갖게 하는 것일까?

폴의 연인이면서 폴의 전부가 되고 싶지는 않은 이중성의 근원은 무엇일까?

               


2장

폴  : 반 덴 베시 부인의 아들     

두툼한 트위드 재킷 아래로 우스꽝스럽게 나와있는 두 팔목은 무척 가늘고 소년티가 났다.... 순간 그녀는 그를 챙겨주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 그는 그녀 나이의 여자에게 모성애를 불러일으키기에 꼭 알맞은 그런 부류의 청년이었다     

폴은 반 덴 베시 부인의 아들 시몽을 만나게 된다.          


3장

시몽

 내가 한 일은 무엇인가? 이십오 년 동안 이 선생에서 저 선생으로 옮겨 다니며 줄곧 칭찬이나 꾸중을 받은 것 말고, 도대체 무엇을 했단 말인가?’

“전 도대체 뭘 했던 걸까요?”

“ 전 아무도 사랑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시몽은 그녀의 이름조차 알지 못했지만 파리에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멋진 일이었다. 그 누군가에 대해 며칠 동안 마음 가는 대로 상상할 수 있으리라     


p 31

로제는 소파에 앉은 채 몸을 바로 하고 푸른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는 몹시 화가 난 것 같았다...

“ 아니 내 말은 당신에 대해 어떠냐는 거야. 너무 이기적이라고 생각하지?”

그는 하루 종일, 혼란스러운 눈빛의 그녀를 현관 앞에 놓아둔 채 떠나 온 그 전날  밤 이후.. 신경이 쓰였다.    

생제르맹 대로에 있는 지하장소의 술집에서 로제와 폴은 우연히 술에 취한 시몽을 만나 자리를 함께한다

“이 쪽은 페르테 씨, 이쪽은 반 덴 베시 씨”  폴이 소개했다.

... “제가 좀 많이 마신 것 같군요. 인생에서 해놓은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오늘 아침에 깨달았어요.”

“ 저 사람을 사랑하세요?”

“ 그건 당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에요.”

로제와 폴이 돌아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서는 순간 시몽은 고꾸라지고 말았다. 시몽은 로제의 차 안에서 잠이 들고 폴의 어깨 위에서 그의 고개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로제는 그녀의 표정을 읽어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시몽을 차 밖으로 끌어냈다. 그날 밤 폴을 데려다준 로제는 그녀의 집까지 올라왔다. 그가 잠들고 나서도 오랫동안 그녀를 품에 안고 있는 바람에 폴은 제대로 잠들 수 없었다.

     

“전 도대체 뭘 했던 걸까요?”

“ 전 아무도 사랑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스물다섯 해 동안 아무도 사랑해 본 적이 없다는 시몽 앞에 폴이 사랑으로 나타난 것

스물다섯 해 동안 제대로 사랑을 해 보지 않았다는 사실에 화가 난 남자 시몽.

폴의 눈에는 두툼한 트위드 재킷 아래 가느다란 팔을 지닌, 섬세한 청년

심지어 모성애를 불러일으킬 정도의 남자로 보인다.          


4장

 P 41 " 마흔 살에게 어울리는 청춘이 이미지란 어떤 거죠? “

“ 그러니까... 그녀는 음산했고, 이를  악문 채 전속력으로 차를 몰았고, 잠에서 깨자마자 독한 골루아즈 담배를 피워댔죠.. 그리고 사랑이란 두 피부의 접촉일뿐이라고 말하곤 했답니다.”     

시몽은 언제나 은밀한 생각들로 가득 차 있는 사람 같았다.

    

p 43     

 "그리고 당신, 저는 당신을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발합니다. 이 죽음의 이름으로, 사랑을 스쳐 지나가게 한 죄, 행복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한 죄, 핑계와 편법과 체념으로 살아온 죄로 당신을 고발합니다. 당신에게는 사형을 선고해야 마땅하지만, 고독 형을 선고합니다."     

 그는 말을 멈추고는 포도주를 한 모금 길게 마셨다. 폴은 반박하지 않았다.     

 "무시무시한 선고로군요."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가장 지독한 형벌이죠. 저로서는 그보다 더 나쁜 것, 그보다 더 피할 수 없는 것을 달리 모르겠습니다. 제겐 그보다 더 두려운 게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그럴 겁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입 밖에 내어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는 때때로 고함을 지르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나는 두려워, 나는 겁이 나, 나를 사랑해줘 하고 말입니다."     

 "저 역시 그래요." 그녀는 의지와는 달리 속내를 털어놓았다.     

순간 그녀는 자기 방의 침대 맞은편 벽면을 떠올렸다. 커튼이 쳐 있고 유행 지난 탁자가 놓여있고 왼쪽에 작은 옷장이 있는 그 벽을 매일 아침으로 바라보았고 앞으로 십 년은 더 바라보리라.

지금보다 훨씬 더 외로운 상태로, 로제, 로제는 뭘 하고 있단 말인가? 그에겐 그럴 권리가 없었다. 아무도 그녀에게 그런 식으로 늙어 가라는 선고를 내릴 권리가 없었다. 아무도, 그녀 자신조차도...         

  

"그리고 당신, 저는 당신을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발합니다. 이 죽음의 이름으로, 사랑을 스쳐 지나가게 한 죄, 행복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한 죄, 핑계와 편법과 체념으로 살아온 죄로 당신을 고발합니다. 당신에게는 사형을 선고해야 마땅하지만, 고독 형을 선고합니다."     

침대 맞은편 벽면처럼 유행 지난 벽지 혹은 가구가 되어버린 폴에게 시몽은 인간으로서의 의무, 곧 ‘제대로 된 사랑’ ‘열렬한 사랑’을 하지 않았음을 고발한다

행복의 의무를 소홀히 한 죄, 핑계 외 편법, 체념으로 살아온 죄..         

      

 p 45 산책의 동반자든, 인생의 동반자든 자신과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그녀는 언제나 애정을 느꼈다.... 전 남편 마르크의 얼굴과 그녀를 몹시 사랑했던 또 다른 남자의 얼굴, 그리고 마지막으로 로제의 얼굴이 떠올랐다... 한 여자의 삶에 세 동반자들이 있었다는 것, 그것도 모두 좋은 동반자들이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대단하지 않은가?     

p46

 로제가 그녀의 집을 나서는 순간, 보도 위에서 그 자신이 어디에도 매이지 않은 존재라는 강한 자유의 냄새를 맡는 순간, 그녀는 또다시 그를 잃고 말리라..     


5장

이번 일은 정말이지 기분 좋은 깜짝 쇼였다. 로제는 나이트 테이블 쪽으로 몸을 돌려  담배를 찾았다. 그의 옆에 있던 젊은 여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남자들은 그 일이 끝나면 늘 담배를 피우네.”

“우리 이틀 일정으로 떠나면 어떨까? 로제? 토요일과 일요일에 시골에 가서 커다란 방을 잡고 꼼짝 않고 방안에만 있는 거야?”

“좋다고 해. 지금 당장. 당신도 좋다고.”

“지금, 당장”

사랑도 어리석게 이루어질 수 있군 하고 그는 막연하게 생각했다     


P50

폴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이틀 동안 혼자 있어야 한다는 것이 두려웠다...

그녀에겐 여자로서 삶에 수반되는 수많은 자질구레한 일들이 혐오스럽게 여겨졌다.

시간이란 마치 길들여야 할 한 마리 나태한 짐승 같지 않은가..     

6장

‘푸른 쪽지’라고 시적으로 표현했던 속달우편이 와 있었다.     

‘오늘 6시 플레옐 홀에서 아주 좋은 연주회가 있습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그녀의 집중력은 옷감의 견본이나 늘 부재중인 한 남자를 향해 있었다. 그녀는 자아를 잃어버렸다. 자신의 흔적을 잃어버렸고 결코 그것을 다시 찾을 수 없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그 질문이 그녀에게는 갑자기 거대한 망각 덩어리. 그녀가 잊고 있던 모든 것,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던 모든 질문을 환기시키는 것처럼 여겨졌다.

... 어쩌면 그녀는 로제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한다고 여기는 것뿐인지도 몰랐다.     

6시 플레에 홀

“내가 브람스를 좋아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당신이 브람스를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제겐 큰 상관이 없어요. 저는 당신이 전화로 그 반대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까 혹은 전화조차 하지 않는 게 아닐까 해서 교외로 나간 겁니다”     

음악이 연주되는 동안 시몽은 교외에서 마주친 로제.  우당 근처의 여관에서 어떤 여자와 함께 있던 로제 생각에 분노가 치밀었다     

시몽과 함께 있는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시선이 부담스러운 폴

“익숙해질 거예요.”

폴은 웃기 시작했다. 때때로 시몽은 정말이지 마음의 현(鉉)을 울리지 않는가     


로제가 오지 않는 주말은 폴에게 마치 길들여야 할 한 마리 나태한 짐승처럼 다가온다. 플례에 홀에서 시몽과 브람스의 연주곡을 듣는다

끝없이, 잠시도 지치지 않고 들어와 마음의 현을 울리는 이 멋진 청년을 밀어내기란 쉽지 않다. 

로제는 왜 폴의 집을 나서는 순간 자유롭다고 느끼는 것일까?

그녀의 지적인 차분함이 좋으면서도 육체노동을 하는 그에게는 부담스러운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일까. 그러하기에 메지처럼 몸으로 말하려 드는 여자. 어리 석어 보이고 충분히 천박해 보이는 메지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좋은 것일까.       

        


7장

메지와의 주말은 유쾌했다. 메지는 다른 여자들과 달리 이틀 동안 방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딱 한 번 밖으로 나갔는데 테레사의 아들 시몽과 마주친 것이다..... 로제는 운전을 하면서 폴이 일요일을 어떻게 보냈을지 궁금했다. 메지는 어리석고 수다스럽고 가식적이었다. 사랑의 행위를 우스꽝스럽게 만듦으로써 그녀는 기묘하게 그를 노골적인 사람이 될 수 있게 해 주었다.

‘책임에서 자유로운 남자’ 

가능한 한 빨리 폴을 만나고 싶었다

“오늘은 플레옐 홀에서 열리는 연주회에 갔었어.:

“당신 브람스 좋아해?”

“그 반 덴 베시란 청년이 나를 연주회에 초대했어. 나는 달리 할 일이 없었고.. 그런데 브람스를 내가 좋아하는지 어떤지 더 이상 알 수가 없더라고..”

'남자들은 뻔뻔스러운 데가 있어.' 폴은 별다른 유감없이 생각했다. '날 완전히 믿는다니. 완전히 믿는 나머지 날 속이고 혼자 내버려 두다니. 하지만 그 반대의 일이 일어난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아. 참 대단해.'   

  

메지와의 1박 2일 여행 중 우연히 시몽과 마주친 로제는 당황하면서 약간의 죄의식을 느끼면서도  폴이 바로 그날 시몽과 브람스 연주회를 갔었다는 사실에 분노한다

이중성.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을  양손에 움켜쥔 중년 남자..

          


8장

폴을 만나지 못한 지 이제 일주일 하고도 반이 지났다. 그의 편지를 그녀는 로제의 눈에 띄지 않도록 치워버렸으리라. 그녀는 착하고 친절하고 그리고 불행했다

 그녀의 편지였다

“장난꾸러기 시몽, 당신의 편지는 너무 슬프더군요, 사실 당신이 없어서 쓸쓸해요. 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어요. 빨리 돌아와요”     

2시, 도로를 달려 그녀의 집 앞에 도착한 그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30분 후 자동차 한 대가 그의 앞에 섰고 폴 혼자 내렸다. 길을 건넌 그녀가 출발하는 차를 향해 손을 흔드는 것을 바라보았다     


9장     

전날 밤 그로 하여금 지방 하나를 가로지르게 만들었던 폴과 그가 답파한 길처럼 정복당한, 벌거벗은 자신을 내맡기고 있는 그의 머릿속의 폴, 진부한 배경 속에서 자신과 함께 철제 의자에 앉아 졸고 있는 폴... 이 세명의 폴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외로웠어요. 그리고 아주 기묘한 상태에 놓여있었어요. 물론 그렇더라도 당신에게 ‘빨리 돌아와요’ 같은 구절은 쓰지 말았어야 했어요.”

하지만 폴은 속으로는 그 반대로 생각하고 있었다. 시몽이 옆에 있어서 행복했다

로제는 영화에 미친 여자와 새로운 관계를 시작했고... 여러 가지 핑계를 댔지만 평소와는 달랐다.     

그녀의 손안에 놓인 시몽의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손가락에서 맥박이 파닥이는 것을 느끼자 그녀는 갑자기 눈에 눈물이 고였는데 그 눈물을 너무도 친절한 이 청년을 위해 흘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빨리 돌아와요”라는 폴의 답장에 바로 그 밤 차를 몰아 폴의 집 앞으로 한달음에 달려오지만 그렇다고 하여 시몽이 기대하는 뜨거운 밤은 없다.

다만 폴은 로제가 다른 여자와 새로운 관계를 시작했음을 감지하고 마음이 허전하다

폴은 시몽의 가느다란 두 손을 잡아 주는 것 외에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               

착하고 친절하지만 불행한 여자 폴...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여자


10장

반 덴 베시 부인은 열 명의 초대객과 대외적으로 폴의 동반자인 로제도 초대했다     

로제는 메지의 어리석음과 육체에, 그 여자가 벌이는 끔찍한 소동과 지독한 질투심에, 열정에 대해 사로잡혀 있었다

인생에서 이런 생생한 열정을 불태우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일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고 그것에 굴복했다

... 로제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고 자기 자신조차 신뢰할 수 없었다. 그가 확신하는 것은 그 무엇으로도 부술 수 없는 폴의 사랑이었고, 몇 년 전부터 그녀에게 집착해 온 자신의 마음뿐이었다     

로제는 폴과 시몽을 바라본다.

폴의 심각한 옆얼굴을 향해 기울어진, 좀 지나치게 섬세해 보이는 시몽의 옆얼굴..

두 사람은 예의 바르고 지각 있고 교양이 풍부한 이들이었다.

남자는 여자에게 담뱃불을 붙여주고, 여자는 남자에게 “고마워요, 고맙지만 됐어요” 같은 말들과 더불어 미묘하게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로제는 그들과 다른 부류의 인간이었다. 진부하기 짝이 없는 쾌락과 어린 창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창 즐기고 있는 파티에서 그녀를 끌어냈다면 적어도 어떤 설명이나 구실이 있어야 하지만 로제는 그녀의 집 앞에서 차를 세우긴 했으나 시동을 끄진 않았다.... 이 모든 것이 그가 기득권자로서 갖고 있는 것을 잃을까 봐 취한 조심스러운 행동일 뿐이었다... 로제는 즉각 차를 출발시켰다,     

그녀의 집 앞에는 시몽의 차가 서 있었다

시몽이 가까이, 너무 가까이 있다고 생각했다. 대화를 나누기에는 늦은 시각이었다. 그는 자신을 따라오지 말 알어야 했다. 모든 것이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녀는 시몽에게 키스했다.     


반 덴 베시 부인의 저택에서 열린 파티, 로제는 시몽을 경계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시몽은 등대처럼 폴의 주위를 떠나지 않는다 사실 로제는 메지의 뜨거운 열정, 그 어리석은 천박함에 빠져있다. 폴과 시몽의 우아하고 고상한 대화를 아니꼬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느닷없이 폴을 파티장에서 데리고 나오고서는 폴을 그녀의 집 앞에 데려다주고는 메지를 만나러 간다. 로제라는 남자의 이토록  이상한 감정을 이해할 수 있는가?


          

11장 그녀의 전갈 

‘나는 당신을 힘들게 할 거예요. 당신에게 강한 애착을 갖고 있거든요. “

그녀는 그가 아니라 그녀 자신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시몽은 이해하지 못했다.     

저녁 여섯 시 폴의 상점 앞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그녀 쪽으로 향한 시몽의 시선, 평소와 다른 표정에서, 그녀에게는 문득 구체적인 시대에 속하지 않는 양식화되고 고정된 배경처럼 보였다.  그녀가 의식의 가장자리에서 깨어 망을 보고 있는 동안 시몽은 한 걸음 내디뎌 그녀를 품에 안았다

... 시몽과의 저녁 식사. 폴이 들려준 몇 마디 말로 시몽은 지난 열흘동안 그녀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있었다. 로제의 무관심, 시몽에 대한 그의 빈정거림, 그녀의 외로움 같은 것들....

로제와 폴 중 두 사람 중 하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제 이만하면 충분해”라고 외쳤어야 했다. 그녀는 그녀 자신이나 로제에게서 그런 반응이 나오기를 거의 절박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마도 그들 사이의 무엇인가가 죽어 버린 모양이었다. 그런 헛된 희망 속에 열흘을 보낸 폴은 시몽에게 설복당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순간 그녀는 오래전부터 줄곧 앞장서는 입장, 대개 혼자 애쓰는 입장이 되어있었고 이제 지쳐있었다. 그 자신에 대해 말하면서 시몽은 사랑은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받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사실 폴은 그녀 인생에 뛰어든 시몽이, 시몽의 열정이 두려운 것이 아니다

어찌할 줄 모르는 그녀 자신을 두려워한다. 로제의 무관심과 빈정거림과 대조적으로 시몽의 사랑은 타오른다.

로제에게 “이제 이만하면 충분해”라고 외치며 모든 관계를 정리해야 하지 않는가?

로제와 폴은 두 사람 사이의 무언가가 이미 죽어버린 것이다

화를 낼 정도의 열정마저도...              

 

12장

그들이 처음으로 함께 밤을 보낸 날 시몽은 행복했다. 열다섯 연상인 폴에게 열여섯 사 짜리 여자 아이에게서보다 더 큰 책임감을 느꼈다. 로제는 열흘 전부터 출장 중이었다. 때때로 파리에 전화를 걸 때면 교환수에게 두 개의 번호를 요청했다. 우선 메지의 불평을 들어준 다음 폴에게 불평을 쏟아놓았다.

달라진 폴의 목소리는 더욱 고통스러웠다. 그녀를 정복하기 위해 전전긍긍 매달렸던 연애초기처럼 이젠 그녀를 잃지 않을까 두려움에 휩싸였다.

한밤중 파리에 도착한 로제는 새벽 2시 폴의 집 앞으로 갔다. 처음으로 그녀의 집으로 올라가기를 주저했다... 갑자기 차를 돌려 메지의 집으로 갔다. 기계적으로 섹스를 하고 웃는 얼굴로 여자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모든 것이 잘 돌아가고 있다고 판단했다. 로제는 출장을 가서 두 여자에게 전화를 건다

먼저 메지의 끝없는 불평을 들어주고 그다음 폴에게는 끝없는 불평을 털어놓는다.

새벽 2시 폴의 집 앞에 도착해서도.. 머뭇거리다 결국  메지의 집으로 가 지친 육체를 불태운다       

   

13장     

“ 요즘 즐겁게 지내?”

“응 시몽을 자주 만나”

“아. 그 매력적인 청년, 여전히 당신에게 미쳐있나?”

“그게 그렇게 즐거워?”

“응”

“ 그냥 즐거운 거야? 아니면 즐거운 거 이상이야.”

“그 이상이야.”     

“ 당신을 편하게 해 주려고 그러는 거야. 로제. 내가 지금 당신에게 여전히 모든 게 당신에게 달려있다고 말하면 당신은 어떻게 대답하겠어?”     

“당신과 점심을 먹자고 하면서 한낱 풋내기 청년과의 불장난 이야기를 들을 줄은 생각 못했어.”

“당신이 벌이는 어린 여자와의 불장난 이야기를 할 생각이었겠지.”

“그게 훨씬 더 정상적이지.”

“이제 내 나이 이야기가 나올 차례인가?”

...

집으로 돌아가 마음을 진정시키고 화장을 고칠 시간은 충분했다. 그녀는 시몽이 집에서 나갔기를 바란 동시에 혹시 나가고 없을까 불안했다

... “오늘은 묻지 않겠어. 난 누구든 당신을 울리는 걸 참을 수가 없어. 그런데 나는 과연 나는 당신을 절대로 울리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럴 수 있겠어?”

“ 당신을 울리기보다 차라리 나 자신이 고통받는 편이 나을 텐데.”          


나이 먹은 여자와 젊은 남자의 불장난과 나이 먹은 남자와 어린 여자의 불장난.

로제는 폴의 경우가 정상적이지 않다고 한다. 정상적이지 않다니... 그러하다면 자신의 애정행각은 지극히 정상적이란 말인가?   


로제는 일드프랑스에 있는 민박집에 메지와 같이 머물렀다          

“창문 좀 닫고 아침 식사를 준비해 줘 자기.”

“‘자기’라고? 그게 무슨 뜻인데?‘

“대체 왜 그래?”

“나는 당신에게 스쳐 지나가는 존재일 뿐이야, 편리하고 일시적 존재일 뿐이라고. 그러니 나를 ‘자기’라고 부르지 마. 특히 아침에는 말이야. 밤에는 아직 참고 넘어갈 수 있어.”

로제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사는 맛을 잃어버린 것이다.     


왜 로제는 메지의 몸을 원하면서 메지가 자신을 ‘자기’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분노하는가?

밤에는 참고 넘어갈 수 있는데 아침에는 안된다니 그에게 메지라는 여자는 밤에만 다루는 악기인가

이해 불가의 남자다.

          

14장

“나도 느끼고 있었어. 당신이 더 이상 나를 참을 수 없어한다는 것, 사랑에서 무관심으로의 이행이 너무 빠르군”

“ 이건 감정의 문제가 아니야. 시몽, 문제는 당신이 술을 마신다는 것,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것, 당신이 바보가 되고 있다는 것.”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소용없다는 것, 언젠가 당신이 나를 쫓아내리라는 것.  나는 몸을 웅크린 채, 때로는 희망을 품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뿐이고..”

“당신은 지쳐있어. 당신은 버림받은 남자 역할을 연기했지만 그건 당신 자신의 상상의 소산일 뿐이야. 시몽”     

다음날 시몽은 일을 하러 나갔다. 상사와 화해를 하고 몇 가지 서류를 살피고 폴에게 여섯 차례 전화를 걸고.. 어머니에게서 돈을 빌린 다음 저녁 8시 반에 피곤한 모습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서로 연기를 한다.

시몽은 언젠가 결말이 오리라는 걸 알면서 연기를 하고

폴 또한 언젠가 올 결말을 이미 알면서 연기를 한다

같은 침대에 누워서도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언젠가 올 결말. 그건 결고 두 사람이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러나 영원히 함께일 수 없음을 감지하고 있다.          


15장

로제와 폴은 2월이 되면 함께 일주일 동안을 산에서 보내곤 했다.

어느 날 아침 로제는 폴의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 열흘 후에 출발할 건데 그녀의 티켓도 준비해야 하는지 물었다.

“ 난 못 갈 거 같아. 머릿속으로는 딴생각을 하면서 겉으로는 아닌 체 하는 게 싫어.”     

그날 저녁 집에 돌아왔을 때  시몽은      

“우리 외출하자. 근사한 데 가서 저녁을 먹고 춤도 추자. 당신을 데리고 외출하고 싶어.”

그녀의 침대 위에는 그녀가 이제까지 딱 두 번 밖에 입지 않은 노출 심한 이브닝드레스가  펼쳐져있었다

로제와 눈과 회한 같은 것은 깡그리 잊은 채 깔깔거리고 웃었다. 행복했다.     

나이트클럽 옆 테이블에서 일 관계로 만나는 몇 살 연상의 여자들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시몽이 그녀에게 춤을 청하려고 일어섰을 때 “ 저 여자, 지금 나이가 몇이지?”라고 소곤거리는 소리가 그녀의 귀에 들려왔다     

모든 것이 망가지고 말았다. 드레스는 그녀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았고 시몽의 외모는 너무 눈에 띄었다.

시몽과 집으로 돌아왔다. 시몽도 그 여자들의 말을 들었으리라.

“난 지금 당신과 함께 있어서 행복해. 당신도 나와 함께 행복했으면 좋겠어. 우리의 사랑을 우연이 아니라 확실한 무엇으로 받아들여야 해.”

“난 서른아홉 살이야.”

“당신은 나보다 열네 해를 더 살았지만 나는 현재 당신을 사랑하고 있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당신을 사랑할 거야.”          


우연이 아니라 확실한 무엇이 되기에 주변의 시선은 버겁다.

“저 여자, 지금 나이가 몇이지?”

시몽이 골라준 노출 심한 이브닝드레스를 입은 폴은 마음이 불편하다. 이토록 주위의 시선은 유독 여자에게 더 관대하지 않는 것일까. 젊고 매력적인 남자와 춤을 추는 나이 먹은 여자? 그들의 시선에는 이 조합이 모두 폴의 억지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으리라. 

        


16장

시몽은 때때로 자신이 힘들고 무용하고 승산 없는 싸움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흐르는 시간이 그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가 없애야 하는 것은 로제와의 추억이 아니라 폴 안에 있는 로제라는 그 무엇, 그녀가 집요하게 매달려있는,, 뽑아 버릴 수 없는 고통스러운 뿌리 같은 것이었다. 이따금 자신이 그녀를 사랑하는 이유가 고통을 감수하는 그 한결같은 태도 때문이 아닐까 자문했다.     

폴은 스스로의 유보적 태도에 신물이 났다. 현재의 생활에 진력이 나면 로제는 그녀에게 와서 그녀를 되찾으려 하리라. 그리고 아마도 성공하리라. 시몽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될 테고, 그녀 자신은 또다시 고독 속에서 언제 올지 모르는 전화를 기다리면서 사소하지만 치명적인 상처들을 입게 되리라.

그녀는 자신의 숙명, 그녀 삶에는 피할 수 없는 누군가가 있고 그것이 곧 로제라는 생각에 저항했다.

어쩌면 6년 전부터 기울여온 노력, 그 고통스러운 끊임없는 노력이 행복보다 더 소중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을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는 욕망에 쫓겨 거리를, 해변을 쏘다녔다. 그녀는 하나의 얼굴, 하나의 생각을 찾아 헤매었다,... 하나의 대상을 찾아서 3대에 걸쳐 여자들의 머리 위를 감돌았던, 행복해져야 한다는 의지가 그녀의 머리 위를 감돌고 있었다... 이제 그녀는 새로 개척하는 대신 갖고 있는 것을 지키려 애쓰고 있었다. 직업을 그리고 남자를

오래전부터 변함없이 추구해 온 것들에 대해 그녀는 서른아홉 살이 된 지금도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서른아홉이 되도록 확신을 가질  수 없는 그 무엇 때문에 폴은 로제로의 관성적 관계를 되풀이하는 것인가?

6년의 노력,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그 고통스러운 노력이 아까워서인가

그녀 자신의 자존심 때문인가. 상처받고 싶지 않음인가?               


17장

서른 개비 째였다. 로제는 불쾌감에 몸을 떨었다. 폴이 그리웠지만 아직 그렇게까지 절실하진 않다. 그녀는 그 응석받이 풋내기 청년의 품속에서 잠이 들어 있으리라. 지금 그녀는 이미 모든 걸 잊었으리라. 그녀는 그를 제대로 평가해 준 적이 없었다. 항상 그가 상스럽고 천박하다고 여기지 않았던가... 손에 들고 있던 재떨이를 놓쳐버렸다. 사방으로 유리조각이 튀었으면 좋았을 것을.. 재떨이는 깨지지 않았다

그가 폴의 집에서 깬 물건은 100가지는 되리라. 그는 그 아파트의 신이자 주인이었다, 거기에는 모든 것이 정돈되어 있었고 애정으로 가득했고 조용했다. 그럼에도 그는 밤중에 그곳에서 나올 때면 해방감을 느끼지 않았던가.          


폴의 아파트에서 신이자 주인인척 행세하는 남자.

모든 것이 정돈되고 애정으로 가득 찬 집.. 그럼에도  밤중에 그 집을 벗어닐 때면 해방감을 느끼는 남자.

그가 폴의 집에서 자꾸 무언가를 깨트리는 것은 폴의 정돈됨. 폴의 지성, 폴의 인내심을 흩트리려는 의도인가.

의도하지 않은 의도 같은 것...

              


18장

그들은 어느 날 저녁 식당 문 앞에서 마주쳤다.

시몽은 단호한 목소리로 마실 것을 주문했고 다른 탁자에서는 로제는 함께 온 여자에게 어떤 칵테일을 좋아하는지 물었다.

저녁 식사 후 그들은 춤을 추었다. 그녀는 로제가 일회용 데이트 상대로서는 그다지 나쁘지 않은 피부가 가무잡잡한 여자를 안고 있는 것을 보았다. 시몽이 일어났다. 그의 춤은 능숙했다. 그녀는 시몽에게 몸을 내맡겼다. 어느 순간 그녀의 드러난 팔이 가무잡잡한 여자의 등에 두르고 있던 로제의 손을 스쳤다. 그녀는 눈을 떴다. 로제와 폴, 그들 두 사람은 상대의 어깨너머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움직임도 리듬도 없는 느린 춤곡이 흐르고 있었다

그들은 아무런 표정도 하지 않은 채, 미소조차 보이지 않은 채, 서로 알은 채도 하지 않은 채 10cm 거리에서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갑자기 로제는 여자의 등에서 손을 떼어 폴의 팔을 향해 뻗었다. 그의 손가락 끝이 폴의 팔에 와닿았다. 그가 얼마나 간절한 표정인지 폴은 눈을 감지 않을 수 없었다.


... 그날 밤 폴은  이제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될 것인지 알고 있었다. 다른 해결책은 없다는 것.     

우연히 만난 폴과 시몽 커플과 로제와 다른 여자 커플. 느린 춤곡이 흐르는 동안 폴과 로제는 서로를 마주 보고 로제가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팔을 만진다. 간절함으로 또다시 폴은 로제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안다

그 간절함의 무게가 대체 무엇이기에     

     

다음날 아침 그녀가 사무실에 도착하자 로제의 속달 우편이 기다리고 있었다. 

“당신을 만나야겠어./ 더 이상 이렇게 지낼 수는 없어.”

저녁 6시

“난 너무 불행했어.”

“나도 그랬어”

그는 그녀에게 설명했다 여자들을 조심했어야 했다고, 자신이 경솔했다고.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임을 잘 알고 있다고.... 

그녀는 “그래, 그래, 그러자. 로제”

그녀는 울고 싶기도 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싶기도 했다. 익숙한 그의 체취와 담배 냄새를 들이마시자 구원받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울러 길을 잃은 기분도     


이토록 상투적인 로제의 변명을 왜 받아들이는지...

자신이 경솔했다. 여자들을 조심해야 했다...

당신을 만나지 못해 불행했어...

왜 이런 말에 폴은 자꾸 흔들리는 것일까.               


열흘 뒤 폴은 자기 집에서 시몽과 시간을 가졌다 사랑에 빠진, 하지만 정돈할 줄 모르는 젊은 남자의 많지 않은 물건을 정리한다

“이제 됐어. 나머지는 관리실에 맡겨 놓으면 될 거야.”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잊지 않을 거야”

“나 역시 잊지 않을 거야. 그건 다른 문제야. 다른 문제라고”

그는 문을 향해 걸어가다가 중간에서 몸을 휘청하더니 그녀를 향해 일그러진 얼굴을 돌렸다. 

이제까지 그의 행복을 받쳐주었던 것처럼 그녀는 자신은 결코 느낄 수 없을 듯한 아름다운 고통, 아름다운 슬픔, 그토록 격렬한 슬픔을 느끼는 그가 부러웠다.      

 "시몽, 시몽." 그런 다음 그녀는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이렇게 덧붙였다. "시몽, 이제 난 늙었어. 늙은 것 같아......"     

 하지만 시몽은 그 말을 듣지 못했다. 그는 두 눈에 눈물을 가득 담은 채 층계를 달려 내려갔다. 마치 기쁨에 뛰노는 사람처럼 달리고 있었다. 그는 스물다섯 살이었다. 그녀는 조용히 문을 닫고 거기에 몸을 기댔다.     

 저녁 8시,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들기도 전에 그녀는 로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미안해. 일 때문에 저녁 식사를 해야 해. 좀 늦을 것 같은데......"     


이미 난 늙은 것 같아... 폴의 중얼거림을 시몽은 듣지 못하고 계단을 달려 내려간다. 눈에 눈물이 가득한 그가

기쁨에 뛰노는 사람처럼 달리고 있다. 스물다섯 살이었다. 시몽에게 사랑이란 또 어떤 형태로든 찾아올 것이다. 문제는 폴이다

8시 전화벨이 울린다.

어김없이...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한다는 로제의 전화

이미 로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조차 알아차리면서도 로제와의 관계를 이어가는 폴에게 사랑이란 대체 무엇인가?     


이 소설은 사랑의 뜨거움을 이야기하려는 게 아니다

사강 스스로도 이야기했지만 사랑의 아름다움도 감미로움도 아닌 사랑의 덧없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덧없음을 알면서 폴은 로제와의 사랑을 견디는 것은 왜인가?

3번째 찾아온 사랑이어서? 나이가 무언가를 다시 시작하기엔 젊지 않아서?

로제의 사랑 방식에 길들여져서?     


로제는 끝없이 육체적 욕망의 데이트 상대를 찾아 헤매면서도 폴과의 관계를 정리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 밤 폴의 집을 나서며 밤의 공기에서 자유를 들이마시는 그는..     


시몽은 자신의 전부를 폴에게 주려한다. 문제를 그의 사랑 방식이다.

자신의 전부를 사랑에 쏟다 보니 그의 일상은 엉망진창이다. 변호사라는 직업을 가진 전도 유망한 젊은이가 어머니에게서 돈을 빌려서라도 폴과의 사랑을 유지하려 한다.

시몽은 사랑은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받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폴이 사랑받을 자격이 충분함을 강조한다.

    


폴과 시몽과 로제... 세 사람의 사랑은 모두 정상적이지 않다.    

시몽의 사랑은 자신을 잃어버리는 사랑이고 어쩌면 순간적인 열망이고  집착이고 헌신적인 사랑이다.     

폴의 사랑은 아무리 옷장에 새롭고 멋진 옷이 가득해도 늘 입던 옷이 편해서 낡은 옷을 다시 입으려는 익숙함의 사랑이다. 서른아홉의 여자, 뜨거운 사랑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 두렵고 버거운 것이다.     

로제의 사랑이란 이기적인 사랑이다. 말 그대로 육체적 만족은 다른 여자에게서 정신적 교감은 폴에게서

그러면서도 폴을 비롯 세상 모든 여자로부터 스스로 자유롭고 싶어 한다.

     

사강의 나이 24살 때 쓴 소설. 이 소설 속 주인공 폴의 모습에서  프랑수와즈 사강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폴을 사강인처럼 생각하며 읽게 되는 것.

사랑이란 말... 사랑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었을까

공중전화기를 붙잡고 동전 떨어지는 소리에 가슴 절절하던 밤도 있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나는 그 어떤 사랑도 끝까지 이어지리란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마음을 닫아버리는 것, 재빨리 손익계산서를 정리하듯... 더 이상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여전히 많은 생각을 한다. 무언가에 쉽게 빠져들지도 않지만 어떤 열정에 휩싸여 나를 팽개치는 무모함이란 없는 사람..... 어찌 보면 회색 같은데 그 안에 여전히 타오르는 빨강이 있는

그렇다고 하여 그 빨강이 스스로를 태우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는 사람...               


마르크 샤갈의 <생일> 이란 작품이 있다.

검은 원피를 입은 벨라에게 공중부양하듯 날아온 샤갈

꽃다발을 든 여인과 사랑의 부력으로 떠오르는 남자. 이 작품의 남녀는 폴과 시몽을 연상시킨다

시몽에게 폴은 중력장을 벗어나게 할 수 있는 존재다.

스물다섯 해를 살아온 그에게  서른아홉 살. 14년은 사랑에 있어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침대와 의자와 테이블은 모두 제자리에서 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붉은 카펫이 깔린 바닥도..

오직 사랑에 빠진 두 사람만 언제든 기꺼이 날아오를 준비가 되어있다.

사랑은 두 사람 안에 숨어있는 날개를 돋게 하는 열망, 그들을 짓누르는, 끝없이 억압하는 중력으로부터의 자유...


누군가 내게  <브람스를 좋아하나요...>라고 묻는다면 무엇이라 대답할 것인가...

돌아보면 어떤 사람과의 만남은 아주 사소한, 그러나 심장을 자극하는 질문에서 시작되지 않았던가..

물음표가 아닌  점 세 개로 이어지는 말줄임표가 좋다. 그 신선한 머뭇거림이 마음에 든다. 

브람스를 좋아한다고 당연히 대답할 것이다. / 려원


<사람학 걔론을 읽는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잡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 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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