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꽃/ 문정희 / 내부로부터 솟아나는 빨강의 함성을 듣는다
늙은 꽃
문정희
어느 땅에 늙은 꽃이 있으랴
꽃의 생애는 순간이다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를 아는 종족의 자존심으로
꽃은 어떤 색으로 피든
필 때 다 써 버린다
황홀한 이 규칙을 어긴 꽃은 아직 한 송이도 없다
피 속에 주름과 장수의 유전자가 없는
꽃이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더욱 오묘하다
분별 대신
향기라니
- 『다산의 처녀』(민음사)에서
꽃은 항상 젊다.
필 때도 질 때도 순간임을 알기에 꽃은 어떤 색으로 피든 어디에 피든 필 때 자기 안의 모든 것을 다 써버린다
내일, 혹은 며칠 뒤, 몇 달 뒤, 언젠가... 그리고 몇 년 뒤라는 인간의 달력은 꽃에게는 무의미하다
꽃의 달력에는 피는 순간과 지는 순간만 존재할 뿐...
피고 짐 사이, 모든 것을 다 써버린 자의 울림으로 빛과 바람과 비에 반응한다.
이미 자기 안의 것을 다 써버렸기에 남은 생, 그리고 다음 생에 대한 미련은 없다.
이 ‘황홀한 규칙’이라니....
이 규칙을 어긴 꽃은 아직 한 송이도 없다니..
시인이 시를 풀어가는 힘에 경탄한다.
황홀한 규칙을... 사람들은 얼마나 지키며 살고 있을까?
오늘을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하면서 바로 내일을 걱정하고 염려하는 것... 내일, 오지 않은 언젠가의 날을 위해 내 안의 것을 남겨두어야 한다는 강박에 나의 오늘도, 나의 내일도 어정쩡하다.
단 한 번도 제대로 타오르지도, 제대로 피어보지도 못한 시간을 언제까지 모른 척해야 할까.
피 속의 주름과 장수의 유전자가 없는 대신
꽃의 피 속에는 삶에 대한 의지, 열정, 아름다움, 오직 지금, 순간의 유전자만 있는 것일까.
침묵... 말하지 않음으로써 보여주는 것, 분별 대신 향기라니.....
입안의 길고 보드라운 핑크빛 혀의 몸짓을 빌리는 대신 오직 분별 대신 향기로 존재를 드러내는 힘은 대체
어디서 기원한 것일까.
한 송이 꽃에도 '생로병사', '희로애락'이 있으려니 막연히 생각은 했지만
꽃이 늙었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꽃은 어떤 꽃이든 늘 아름다웠고 유혹적이고 자극적인 존재처럼 여겨졌다.
늘 흔들리지만 그 뿌리를 뽑아 자신을 뒤흔드는 근원을 향해 갈 수는 없는 고정성을 지닌 존재...
들판의 빨간 흔들림을 보아라.
관능적이라고 표현한다면 꽃에 대한 모독일까?
꽃은 어떤 색으로 피든 필 때 다 써 버리는 이 황홀한 이 규칙을 지닌 꽃에게 장수의 열망이란 없으리라.
황홀한 규칙을 본다. 온몸으로 대지를 붉게 물들이는
내부로부터 솟아 나온, 빨강의 함성을 나는 묵묵히 듣고 있다.
내 안의 아직 제대로 타지 않은 빨강이 남아있다면, 아직 내 안에 점화되지 않은 빨강의 불씨가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나는 '황홀한 규칙'을 기꺼이 따르리라./ 려원
<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 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