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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하지 않기를 희망하는 일, 보이지 않는 희망을 희망

하는 일 중 어떤 것이 더 쉬울까?  희망의 혁명 / 에리히 프롬 


희망하지 않기를 희망하는 일과

보이지 않는 희망을 희망하는 일 중 어떤 것이 더 쉬울까?

희망이 보이지 않아서 ‘희망’을 희망해야만 하고  희망이 버거워 희망하지 않기를 희망하는 일...

결국은 둘 다 ‘희망’을 ‘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희망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희망은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희망하지 않기를 희망하기

/ ts엘리엇     


다시 돌아가리라 희망하지 않기에

희망하지 않기에

돌아가리라 희망하지 않기에

아이의 재능과 저이의 능력을 바라

그런 것들 얻으려

애쓰려고 더는 애쓰지 않기에

(늙은 독수리가 왜 날개를 펴야 하나?)

....

긍정의 시간의 그 허약한 영광을

다시 알리라 희망하지 않기를 

-  , TS 앨리엇 ‘재의 수요일’ 중

재의 수요일 Ash Wednesday/T.S. 엘리엇, 번역 : 주낙현         

  


에리히 프롬은 『희망의 혁명』 (문예출판사)에서 ‘희망’을 구원 혹은 혁명이라고 할 수 있을지를 묻는다. 그는 ‘희망’은 수동적인 기다림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한다.           

희망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희망의 대상은 어떤 사물이 아니라 더 충만하고 활력이 넘치는 삶일 때, 끝없는 지루함에서 벗어나는 해방일 때 진정한 희망이 된다. 신학적 용어를 빌리면 구원(salvation), 정치적 용어로 말하자면 혁명 (revolution)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런 종류의 기다림이라면 희망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수동적으로 ‘마냥 기다리는’ 속성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희망이 아니다.     

수동적인 형태의 희망 때를 기다리는 희망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종류의 희망에서는 시간과 미래가 핵심 범주로 자리 잡는다. “지금 ‘당장은 아무것도 일어나기를 기대할 수 없고, 오직 다음 순간, 다음 날, 다음 해, 이승에서 희망이 실현되기를 믿기가 너무 터무니없다 싶을 때는 다음 세상에서 일어나기를 기대한다.

이런 믿음 뒤에는 ‘미래’, ‘역사’‘후세’ 등에 대한 숭배가 깔려있다.  지금 당장 내가 무언가를 하거나 무언가가 되는 대신,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우상, 미래, 후대가 무언가를 해낼 것이라는 믿음이다.        

  

지금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무언가를 기다리는 일의 어리석음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희망이 혁명처럼 강렬해야 한다는 것, 어느 날 문득이 아닌 바로 지금이라는 현재성을 품고 있어야 한다는 것


희망은 역설적이다. 희망은 수동적인 기다림도 아니지만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을 비현실적으로 밀어붙이는 것도 아니다. 희망은 웅크린 호랑이와 같다.     

무언가를 희망한다는 말의 의미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것에  매 순간 준비되어 있지만 자신의 생애에 탄생이 없더라도 절망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이미 존재하는 것을 희망하거나,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희망한다는 것은 이미 준비되어 있지만 자신의 생애에 희망이 찾아오지 않더라도 절망에 빠지지 않는 것이라 한다. 이미 존재하는 것을 희망하거나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을 희망하지 말라고...         

웅크린 호랑이와 같은 희망이라... 희망이 그려지는가? 나는 묻는다.

희망은 크고 원대하고 두려운 것, 잠재적으로 엄청난 가능성을 품은 것...



 P 39

 희망이란 존재의 상태다. 준비가 되어있는 내면의 열정적이지만 아직 쓰이지 않은 능동성( activeness)이다. ‘활동(activity)이란 개념은 현대 산업사회에서 가장 널리 퍼져있는 인간의 오해에 기반하고 있다. 우리 문화의 전반은 활동에 맞춰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너무 활동적이어서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멈춰 있을 수가 없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정말 아무것도 ‘할 것’이 없는 순간이다.... 자기 자신과 직면했을 때 생겨날 불안에서 탈출하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에 빠져있을 뿐인데도 자신을 대단히 활동적인 사람이라 상상한다.

     

P40_41

희망은 생명과 성장에 수반되는 정신 상태다

햇빛을 받지 못하는 나무기 햇빛이 오는 방향으로 몸을 구부린다고 해서 그 나무가 사람과  같은 방식으로 ‘희망’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인간의 희망에는 그 나무에는 없는 느낌과 인식이 함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나무가 햇빛을 희망하고 태양을 향해 몸을 구부림으로써 자신의 희망을 표현하는 것이라 말해도 틀린 애기는 아니다. 갓 태어난 아기는 다를까?  인식은 없을지라도 그 아기의 활동은 태어나서 독립적으로 호흡하려는  희망을 표현한다

젖 빠는 행위는 또한 엄마의 젖가슴에 대한 희망이 아니던가? 아기는 두 발로 서서 걷기를  희망하지 않던가? 아픈 사람은 건강해지기를 희망하고 수감된 죄인은  자유로워지기를 희망하고 배고픈 자는 배불리 먹기를 희망하지 않던가? 우리는 잠이 들면서 내일 다시 일어나기를 희망하지 않던가?     



아기의 엄마의 젖가슴에 대한 희망과 두 발로 서기에 대한 희망은 집요하고 강렬한 욕구다. 생존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살아가면서 '희망'을 여러 차례  망각한다. 그러하다면 갓난아기의 그 무엇보다 생이 내게 절실하지 않아서인가. 생이 두려워서인가... 

희망은 소박하고 단순하다. 어쩌면 우리가 희망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수준에서 이룰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 앞에 주어진 현실은 소박하고 단순한 희망조차 이루기 어렵다.               

끝없는 허들 경주를 하는 사람들처럼 눈앞의 크고 작은 장애물을 보고 달려야한다

입으로는 연신 '희망'을 외치면서... 사실은 '희망을 외치는 현실'에 질식할 것 같으면서도...


 신념 p42

희망이 사라지면 실제로 잠재적으로든 생명도 끝이 난다. 희망은 생명 구조의 또 다른 요소인 ‘신념(faith)'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신념은 아직 증명되지 않은 것에 대한 확신이고 진정한 가능성에 대한 앎이며, 잉태에 대한 인식이다. 신념은 실재하지 않지만 아직 태어나지 않은 것에 대한 앎을 지칭할 때 비로소 합리적 신념이 된다.

신념은 확실성(certanity)이라는 말이 있지만 단서가 필요하다. 의심의 여지없이 확실한 예측이 가능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가능성이 실제로 확실하게 존재한다는 확실성을 말한다. 

신념은 불확실한 확실성이다.  인간의 비전과 이해에 대한 확실성이지 실제로 일어나는 최종 결과에 대한 확실성이 아니다. 희망은 신념에 동반되는 기분이다. 희망이라는 기분이 없이는 신념이 유지될 수 없다.      


불굴의 용기 P 45

불굴의 용기( fortitude)

요즘은 용기라는 표현은 살 용기보다 죽을 용기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더 많다.

불굴의 용기는 희망과 신념을 공허한 낙관론이나 비합리적인 신념으로 바꾸어 파괴함으로써  위태롭게 만들려는 유혹에 저항하는 능력을 말한다. 불굴의 용기는 세상이 당신에게 “예‘라는 답을 듣고 싶어 할 때 ’ 아니요 ‘라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이다.     


세상의 유혹에 저항하는 능력. 세상이 기대하는 답에 '아니요'라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이 불굴의 용기라고

프롬은 정의한다. '에' 혹은 '아니요'라고 답할 수 있다면 그래도 용기( 불굴의 용기는 아니더라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리라.

가슴 안에서 웅얼거리는 말들을 입 밖으로 뱉어내지 못하는 것은

아주 사소한 용기조차 없어져가기 때문이 아닐까. 삼키고 삼키는 것....... 



P 47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되는 상태를 향해 나아가려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겁 없음을 향해  새로운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강해지는 느낌과 기쁨이 확실하게 깨어나는 것을 안다.

괴테의 말 “나는 무(無) 위에 집을 지었노라. 그것이 바로 온 세상이 나의 것인 이유다.‘     

생명의 본바탕인 희망과 신념은 그 본질상 개인적, 사회적으로 현재의 상태를 초월하려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모든 생명은 항상 변화의 과정에 놓여 있으며 어느 한순간도 동일한 상태로 남아있지 않는다, 

항상 움직이는 속성이 있는 생명은 현재의 상태를 깨고 나오거나 극복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우리는 더 강해지거나 약해지고 더 현명해지거나 어리석어지고 더 용감 해지거나 겁이 많아진다. 모든 순간은 더 나빠지든 좋아지든 결정의 순간이다. 우리는 자신의 태만, 탐욕, 미움에 먹이를 주거나 굶긴다. 먹이를 주면 줄수록 더 강해지고 굶기면 굶길수록 약해진다.  개인이 통하는 진실은 사회에도 통한다. 사회도 결코 정적이지 않다. 사회 역시 성장하지 못하면 퇴락한다. 사회가 현재의 상태를 초월해서 더 나아가지 못하면 쇠퇴할 수밖에 없다. 멈춰서는 순간 우리는 퇴락하기 시작한다


 산산이 부서진 희망 (P 54)

희망, 신념, 불굴의 용기가 생명에 수반되는 것이라면 어째서 그리도 많은 사람이 희망, 신념, 불굴의 용기를 잃고 노예 같은 삶, 의존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것일까?

이런 상실의 가능성이  바로 인간의 실존이 가지고 있는 특성이다. 우리는 희망, 신념, 불굴의 용기로 시작하지만 어느 순간 환경과 사고에서 비롯되는 우여곡절이 희망의 가능성을 더 증진하거나 차단하기 시작한다     

성장의 어느 한 시점에서 희망이 실망으로 바뀌는 운명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어쩌면 이것은 좋은 일일지도 모른다. 희망이 실망으로 바뀌는 경험 없이 어떻게 그 희망을 억누를 수 없는 강력한 희망으로 키울 수 있겠는가? 어 하지만 한편으로는 희망이 너무 산산이 부서지는 바람에 그 희망을 결코 회복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산산이 부서진  희망에 대한 반응은 역사,  개인, 심리, 기질 등 수많은 환경에 따라 아주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는데 체념적인 낙관론자가 되고나 마음이 돌처럼 굳어버리거나 파괴적 폭력성의 형태로도 드러난다.      

한 개인 안에서 희망이나 절망이 자라날지 여부는 그 사람이 속한 사회나 계층에 희망이나 절망이 존재하는지 여부에 크게 좌우된다는 점을 명심하자. 한 개인의 희망이 어린 시절에 산산조각이 났더라도 그 사람이 희망과 신념이 가득한 시기에 살고 있다면 그 자신의 희망에도 다시 불이 켜질 것이다. 반명 경험을 통해 희망을 쌓아온 사람이라도 자신이 속한 사회나 계층이 희망의 정신을 잃어버리면 우울과 좌절로 빠져드는 경향이 있다     

다시 희망을 품기 위해서는 절망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하고 우리의 사회, 경제적, 문화적 삶을 바꿀 실질적인 가능성을 찾아야 한다.        

  


결국 에리히 프롬은 한 개인 안에서 희망이나 절망이 자라날지의 여부는 그가 속한 사회나 계층이 얼마나 희망적인가, 얼마나 절망적인가의 영향을 받는다고 이야기한다. 다시 희망을 품기 위해서는 절망을 먼저 직시하고 사회 속에서 희망이 태동할 가능성을 찾아야 한다.          

‘희망의 혁명’이란 표현이 강렬했다.     

사람은 누구나 희망을 품어본다. 3월의 새싹처럼..

희망은 기다림이 아니란 걸 안다. 희망은 동적인  행위다.

배고픈 자가 먹을 것을 찾아 헤매듯... 자유를 갈구하는 자가 자유를 찾아 투쟁하듯...          


'희망고문‘이란 말을 쉽게 들을 수 있다.  사실 이 표현을 좋아하지 않았다.  비겁한 자의 회피용 언어라 생각했기에... 어느 순간. 언제부터였을까. 희망을 희망하는 일이 버겁게 느껴졌다.

내가 아무리 ‘희망’을 향해 몸부림쳐도 희망을 품기란 어렵다는 사실을 확신한다.     

괴테는 “나는 무(無) 위에 집을 지었노라. 그것이 바로 온 세상이 나의 것인 이유다.‘라고  단언했지만

그것은 괴테이기 때문에 단언할 수 있는 게 아닐까.

무, 없음에 집을 짓고 살기에 세상이 온통 자신의 것이라는 확신은 괴테이기에 가능하리란 생각을 한다.

'없음'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이다. '없음'의 앞에는 수많은 단어들이 자리할 것이다.

희망 없음, 절망 없음, 굶주림 없음, 욕망 없음, 돈 없음, 시간 없음, 집 없음, 마음없음, 사랑없음....... 


환경문제, 기후 재난, 전쟁도 아니고  아기를 낳지 않아 민족이 멸종하는 사례가 나온다면 '대한민국'이 첫 사례가 될 것이라는 외신의 보도기 있었다. 인구 절벽의 시대다. 아무도 '희망'을 품지 않으려 하듯 뱃속에 '아이'를 품지 않으려 한다. 아기에게 '희망'을 보여주기에 세상이 너무 희망적이지 않아서일까.

젊은 사람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 땅에 발 딛고 사는 모든 이들의 문제다.

'희망'을 마치 프랑스 대혁명, 산업 혁명 정도로 생각해야 할 정도로... 세상이 각박해졌다

오늘 비 내린다.   봄비 일 것이다. 아마도 꽃들에게는 '희망'의 비가 될 것이다./ 려원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수필과 비평사/려원 산문집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 문학상 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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