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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이란 어떤 의미로는 짐승 같은 것이라고...

<시계태엽 오렌지> /앤서니 버지스/ 자, 그럼 이제 어떻게 될까, 응

청춘이란 어떤 의미로는 짐승 같은 것이라고...     

 
『그래, 그래, 바로 그거지. 청춘은 가버려야만 해. 암 그렇지. 그러나 청춘이란 어떤 의미로는 짐승 같은 것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아니, 그건 딱히 짐승이라기보다는 길거리에서 파는 쬐끄만 인형과도 같은 거야. 양철과 스프링 장치로 만들어지고 바깥에 태엽 감는 손잡이가 있어 태엽을 끼리릭 끼리릭 감았다 놓으면 걸어가는 그런 인형. 일직선으로 걸어가다가 주변의 것들에 꽝꽝 부딪히지만, 그건 어쩔 수가 없는 일이지. 청춘이라는 건 그런 쬐끄만 기계 중의 하나와 같은 거야.』     

<시계태엽 오렌지>는 1962년 영국에서 발표된 이래 끊임없는 논란과 열광을 낳으며 20세기 고전의 반열에 오른 작품이다. 제목 그대로 이 소설은 외부의 힘에 의해 태엽이 감겨야 움직일 수 있는 인간상에 대한 반성을 제시한다. 폭력과 죄악에 대한 성찰 속에서 국가 권력의 억압을 비판하고 인간의 자유 의지를 옹호하는 작품이다.          


사실 이 작품이 궁금했던 이유 중 하나는 쏘아보는 듯한 눈빛, 손에 쥔 칼, 고장 난 인형의 눈알

표지의 강렬한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기묘한 조합의 제목 때문이기도 했다.         

왜  작품의 제목이 시계태엽오렌인가?     

1945년 군에서 제대한 앤서니 버지스는 런던의 한 술집에서 여든 살 런던 토박이가 다른 사람에게 ‘시계태엽오렌지처럼 희한한 놈’ as queer as a clockwork orange )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시계태엽오렌지는 런던 지역 사투리였다. 런던 사투리와 기계장치의 조합으로 만들어진 오렌지

오렌지처럼 싱싱하고 달콤한 사람이 강제로 기계로 만든 오렌지가 되는 상상을 하면서 이런 제목을 붙였으리라는 의견도 있다.


오렌지는 생물이고 톡톡 튀는 맛을 지닌 과일이다

이 오렌지에 시계태엽(무생물)을 달아놓는 다면 어떻게 될까?

자유 의지대로 살아 움직이는 것들에  시계의 태엽을 달아 정밀하게 통제를 하려 든다면 오렌지는 오렌지 다움을 상실한다.


이 책은 총 3개의 파트로 구성되어 있다

3부 구성의 첫 시작은  모두 ˝자, 그럼 이제 어떻게 될까, 응?이다.

1부는 비행 청소년 알렉스의 폭력을 중심으로/악의 화신으로서의 알렉스 

2부는 일반 교도소 수감, 루도비코 치료법 실행을 중심으로/ 자유의지 없이 강압적으로 선의 화신이 된 알렉스( 악을 선으로 개조시키기 위한 또 다른 강압적 악의 개입)     

3부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알렉스의 삶을 중심으로 / 여전히 악에 대한 유혹을 떨칠 수 없지만 1부에서와는 달리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의지를 지닌 알렉스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신학적, 철학적인 문제를 폭력적 환경 속에서 성장함으로써 그 환경의 일부가 되어버린, 어쩌면 스스로 그런 환경을 만들어내는 알렉스라는 비행 청소년이 주인공이다. 딤, 피트, 패거리와 함께 몰려다니며 성, 쾌락, 유희, 물질적 유혹을 충족하기 위해 절도, 마약, 강간, 살인, 폭력을 행사한다. 작품에 주로 등장하는 ‘밀크바’는 1960년대 영국 십 대 문화의 상징적 장소라고 한다.


그런데, 여러분, 악의 원인이 무엇인지 놈들이 발톱을 물어뜯으면서 연구한다는 말은 나를 웃게 만들지. 선의 원인은 밝히지도 않으면서 왜 그 반대쪽이냐고. 만일인간이 착하다면 그건 지들이 그러고 싶어서 그런 거니까 난 그런 기쁨을 방해할 생각이 없어. 그 반대의 경우라도 마찬가지야. 난 그 반대쪽을 더 두둔하겠지만 말이야. 더욱이 악이란 자기 자신이 유일한 존재, 즉 혼자로서의 너 또는 내가 책임지는 것이고, 이때 자아란 하나님 또는 신에 의해서 만들어지는데 그건 신의 커다란 자랑거리이자 기쁨인 거야. 그러나 자신에게 솔직하지 않으면 악이란 있을 수가 없지.       


P. 52

무슨 말인가 하면 정부 놈들이나 재판관들 또는 학교의 접장들은 인간의 본모습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악을 용납할 수 없는 거야. 형제 여러분, 이게 바로 우리의 현대사, 바로 작지만 용감한 영혼들이 커다란 기계에 맞서 싸우는 역사이지 뭐야? 난 이 말을 심각하게 하고 있다고, 여러분. 난 내가 하고 싶기 때문에 어떤 일을 하는 거야.     


‘홈‘이라고 불린 집에서 그날 밤 내가 찢어발긴 종이 위의 이름을 보았어. 그 이름은 무슨 태엽 달린 오렌지에 대한 이야기였지. 바흐를 들으면서 그 음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더 이해하게 되었고, 그 오랜 독일 거장의 아름다운 갈색 음악을 들으면서 나는 인간들을 더 세게 패주고 갈가리 찢어 마룻바닥에다 내팽개치고 싶다고 생각했지. 

 

‘홈’이라 불린 집에서 알렉스와 패거리가 저지르는 범죄는 책을 끝까지 읽어내는 것이 고통스로울 정도였다. 그들이 유흥의 타갯으로 생각한 곳은 ‘작가의 집’이었고 작가는 ‘시계태엽 오렌지’라는 책을 집필 중이었다. 그 집의 희생양은 젊은 아내였다. 바흐의 음악이 흐르는 실내에서 자행되는 잔인함..          


골동품이 많은 여인의 집, 흰머리, 주름이 많은 여인의 집에는 암, 수고양이가 많았다. 우유에 미끄러지고 고양이들은 발톱으로 알렉스를 할퀴고... 알렉스는 조각상으로 여인의 머리를 내리쳤다... 경찰차 소리가 들려오는데 팀은 체인을 꺼내 도리어 알렉스의 얼굴을 공격하고 다른 패거리와 도주한다.      

패거리의 배신으로 범죄 현장에서 붙잡혀 일반 교도소에 수감된다. 죄수번호 6655321


.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게냐? 우리는 이 문제를 연구하고 있고, 제길, 거의 한 세기 동안 연구해 왔지만, 더 이상 진전시킬 수가 없어. 너는 좋은 집에, 사랑을 주는 부모에, 또 그다지 나쁘지 않은 머리를 가졌는데 말이야. 네 속에는 악마라도 들어앉아 있니?˝    

      

골동품이 많은 집 여인이 끝내 사망하고 교도소 내에서 다른 재소자를 죽음으로 몰아간 것으로 인해 알렉스의 형벌은 가중된다. 교도소에서 벗어나기 위해 알렉스는 국가가 흉악한 재소자 교화를 위해 개발한 새로운 치료법‘ 루도비코’를  선택한다.

루도비코 요법은 조건 반사 원리에 바탕을 둔 세뇌치료 법이다. 범죄가 벌어지는 현장을 그대로 담은 영상을 계속 보게 하는데 그 영상에 등장하는 폭력의 강도가 세질수록 몸이 겪는 고통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세지는 방식이다. 다시 말하면 가해자의 입장에서 영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 ‘가상의 피해자 입장에서 바라보고 실재 피해자가 된 것은 같은 고통을 체험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국가가 루도비코 요법을 시행하려는 이유는 세뇌교육을 통해 재소자를 빠른 시일 내 교화시켜 방출시키려는 것이며, 구성원들에게 육체적, 정신적인 태엽 장치를 달아 통제하려는 의도도 품고 있다. 현재는 재소자에게 한정되어 있지만 효과가 입증되면 무고한 시민들에게도 정치적 용도로 악용될 수도 있다.      


착하게 되는 것이 좋지 않을지도 모른다. 6655321번. 착하게 된다는 것은 아주 끔찍한 일일 수도 있어. 말하고 보니 자기모순이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이번 일 때문에 며칠 동안 잠 못 들어할 거야. 신은 무엇을 원하시는 걸까? 신은 선 그 자체와 선을 선택하는 것 중에서 어떤 것을 원하시는 걸까? 어떤 의미에서는 악을 선택하는 사람이 강요된 선을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보다는 낫지 않을까?            

넌 지금 기도의 힘이 닿지 않을 곳을 향해 다가가는 것이란다. 생각만 해도 아주 끔찍한 일이군.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는, 윤리적인 선택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을 제거당하겠다는 선택을 내릴 때, 넌 진짜로 선을 선택한 것이겠지. 난 그렇게 생각하고 싶구나. 신이 우리 모두를 돌보시겠지, 6655321번, 난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어떤 의미에서는 악을 선택하는 사람이 강요된 선을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보다는 낫지 않을까?   


이 엄청난 소설에서 신부의 고민 어린 독백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신은 무엇을 원하시는 걸까? 신은 선 그 자체와 선을 선택하는 것 중에서 어떤 것을 원하시는 걸까? 어떤 의미에서는 악을 선택하는 사람이 강요된 선을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보다는 낫지 않을까?’         

         

선과 악 중 어떤 것이 나은가?라는 질문에는 1초의 머뭇거림도 없이 ‘선’이라고 답한다

강압된 선과 악 중에서는 어떤 것이 나은가?라는 질문은 오래 생각해보아야 할 화두다.

'강요된 선'과 '악'을  같은 저울에 매달고 비교할 수 있을까?

물론 나는 '강요된 선'이 자발적 ‘악’보다 낫다는 생각을 한다

상황에 따라, 선택지가 균일할 수는 없지만....     


자발적, 자유의지로 선택한 선이 넘치는 사회라면 사회가 이토록 혼란스러울 리 없다. 자발적인 선을 추구하기에 세상은 너무도 악하다. 그러므로 강요된 선이든, 강요되지 않은 선이든

‘선’이 혼란스러운 사회를 유지하는 동력이 아닐까...

     


알랭 바디우는 『사랑, 그 절대성의 여정』에서 오늘날 절대다수가 악을 회피하는데 골몰할 뿐, 그 누구도 선을 적극적으로 추구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바디우는 “악이 존재하는 것은 오직 선이 존재하기 때문이고 선이 악의 부정이 아니라 오히려 악이 선의 부정이다. 선은 악과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선은 악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악과 이질적인 차원에서 존재함으로써 악이 스스로 소멸하게 한다. 최악과 차악이라는 선택지는 선의 가능성을 무화하려는 허위적 프레임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 ˝내 이름은 브래넘 박사란다. 난 브로드스키 박사의 조수야. 네가 괜찮다면 간단한 일상 종합 진단을 하겠다.˝

 ˝폭력이란 끔찍한 것이지. 그게 바로 네가 배우고 있는 것이란다. 네 몸이 지금 그걸 배우고 있는 중이야.˝     

'상상일 뿐이야. 걱정할 거 전혀 없어. 다음 영화가 나와.'

그 말은 아마 농담이라고 한 것 같았어. 왜냐하면 어둠 속에서 웃음소리가 들렸으니까. 다음으로 난 일본인이 고문을 하는 가장 잔혹한 영화를 강제로 보게 되었지. 그건 1939년~45년 전쟁을 다룬 것이었는데, 병사들의 몸이 나무에 못으로 박혀 있었고, 발 밑에는 불이 질러졌고, 불알이 잘려 있었지. 심지어는 한 병사의 대갈통이 칼로 잘리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입과 눈이 아직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 머리가 굴러다니는 동안 병사의 몸이 잘린 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흘리면서 돌아다니다가 쓰러졌는데, 그 내내 일본 놈들이 아주아주 크게 웃는 소리가 들렸지. 배 속에서 치미는 고통과 두통, 갈증이 지독했는데, 모두 그 영화에서 생긴 것 같았지. 그래서 내가 소리쳤지.

'영화를 멈춰! 제발, 제발 멈춰주세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요.' 그러자 브로드스키 박사라는 작자의 목소리가 들렸지? '멈춰? 진짜 멈추라고 말했나? 왜, 우리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놈과 다른 녀석들이 크게 웃더군.         

   

˝그렇지만 선생님, 아니 선생님들, 저는 그게 잘못이라는 것을 정말 잘 알아요. 그건 잘못이죠. 그건 사회라는 것에 반항하는 일이니까요. 그건 잘못이죠,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맞거나 차이거나 칼에 맞지 않고 살면서 행복할 권리를 가졌으니까요. 전 많은 걸 배웠어요, 진짜로 많은 것을요.˝ 그러나 브로드스키 박사는 내 말을 듣고서 하얀 이빨을 드러내고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지.          


˝이성의 시대에 대한 반론이구먼.˝ 뭐 그런 비슷한 말이었지. ˝뭐가 옳은지를 알고, 그것을 인정한다. 그래도 잘못된 일을 한다. 안되지, 안 돼, 얘야, 이 모든 걸 우리에게 맡겨두렴. 그렇지만 즐거워하라고. 모든 일이 곧 끝날 거야. 지금부터 두 주일이 채 되기 전에 자유인이 될 테니까.˝ 그리고 놈은 내 어깨를 토닥거렸지.     

˝나, 나, 나, 도대체 나는 어쩌라고요? 난 여기서 뭐란 말이야? 내가 무슨 짐승이나 개란 말이야?˝ 이 말에 놈들은 큰 소리로 떠들면서 나에게 소리치기 시작했지. 그래서 더 큰 소리로 내가 외쳤지. ˝내가 무슨 태엽 달린 오렌지란 말이야?˝ 왜 그런 말을 사용했는지 모르겠어, 



재소자에서 일반인으로 돌아온 알렉스는 강제로,  조건 반사적으로 습득한 ‘선’으로 인해 고통을 겪게 되고 자살을 시도하고, 마침내 다시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알렉스로 돌아온다/.

     

˝ 내 생각으로는 이 고압적인 정부를 몰아내는 데 네가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아. 어떤 정부라도 버젓한 젊은이를 태엽 감는 기계로 만드는 것을 승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지, 그건 탄압을 자랑스레 여기는 정부나 하는 짓이야˝     

『시계태엽 오렌지한 권이 꽂혀 있었고, 책의 등짝, 그러니까 책등에는 작가의 이름, F. 알렉산더‘가 찍혀 있었지. 하나님 맙소사, 녀석은 또 다른 알렉스였어. 그런데 그 책을 읽고서도 무슨 내용인지 도통 모르겠더군. 그것은 ‘아‘, ‘오‘같은 말들로 가득 찬, 잔뜩 화가 난 어조로 쓰인 것 같았는데, 내용인즉, 요즘 세상의 모든 놈들은 기계로 변해 버렸지만, 너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가 사실은 과일처럼 자연스럽게 자란다는 거지. 내가 보기에 F. 알렉산더의 생각은 하날님, 즉 신이 이 세상 과수원에 심은 세상이라는 나무에서 우리 모두가 자라고 있고, 하날님, 즉 신이 자신의 채워지지 않는 사랑인지 뭔지 때문에 우리를 필요로 한다는 거야. 난 이런 소리가 마음에 전혀 들지 않았지, 여러분. 그리고 이 F. 알렉산더가 아마 아내가 끝장난 것 때문에 돌아버리게 되었다고 생각했지. 그러나 그때 녀석이 기쁨과 사랑, 뭐 그딴 것으로 가득 찬말짱한 목소리로 내려오라고 부르더군. 여러분의 겸손한 화자는 내려갔지.     


『그래, 그래, 바로 그거지. 청춘은 가버려야만 해. 암 그렇지. 그러나 청춘이란 어떤 의미로는 짐승 같은 것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아니, 그건 딱히 짐승이라기보다는 길거리에서 파는 쪼끄만 인형과도 같은 거야. 양철과 스프링 장치로 만들어지고 바깥에 태엽 감는 손잡이가 있어 태엽을 끼리릭 끼리릭 감았다 놓으면 걸어가는 그런 인형. 일직선으로 걸어가다가 주변의 것들에 꽝꽝 부딪히지만, 그건 어쩔 수가 없는 일이지. 청춘이라는 건 그런 쪼끄만 기계 중의 하나와 같은 거야.』            


그리고 내가 지금 가는 곳은, 여러분, 여러분은 갈 수 없는 나 혼자만의 길이야. 내일도 향기로운 꽃이 피겠고, 더러운 세상이 돌아가겠고, 별과 달이 저 하늘에 떠 있을 거고, 여러분의 오랜 동무 알렉스는 홀로 짝을 찾고 있을 거야. 엄청 구리고 더러운 세상이야, 여러분, 자 이제 여러분의 동무로부터 작별 인사를, 그리고 이 이야기에 나오는 다른 놈들에게는 커다란 야유를, 엿이나 먹으라 그래.

그러나 여러분들은 가끔씩 과거의 알렉스를 기억하라고,

아멘, 염병할,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 인용)


              

『시계태엽 오렌지』를 통해 버지스는 국가권력이 구성원들에게 육체적 또는 정신적인 태엽 장치를 달아서 통제하려는 음모를 고발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에 경험한 국가의 폭력, 좁게는 군대 조직에서 경험한 권력의 폭력에 대한 거부감도 작품 전체에 반영되어 있다.     


      

청춘이란 짐승 같은 것이라고 ‘알렉스는 중얼거린다. 그러나 자유의지로 살아 움직이는 것을 ‘짐승’이라 표현하지 않는다. 태엽을 감아 놓으면 일직선으로 걸어다가 주변의 것들에 꽝꽝 부딪치는 짐승

알렉스의 독백이면서 저자 앤서니 버지스의 독백이기도 하다.

     

이 책은 짐승 같은 청춘을 살고 있는 알렉스의 이야기지만 짐승 같은 사회를 보여주는 책이다

호프집의 노파들.  불량 청소년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돈의 출처를 예측할 수 있으면서도

"고마워 젊은이들, 계속 여기 있었다고 해줄게. “

 허위 진술을 해주겠다고 한다

폭력(악)으로 갈취한 돈이 가난한 할머니들의 흑맥주와 안주(선)로 변하고

그 선은 다시 또다시 악을 강화한다.

     

알랙스의 부모는 알렉스가 무엇을 하는지 관심이 없다. 먹고사는 일에 지친, 생계유지에도 버거운 그들은 아들이 돈을 달라고 손을 내밀지 않는 것만으로 감사하다. 심지어 알렉스가 절도로 가져온 돈을 선의의 용도로 내밀자 기꺼이 받는다. 돈의 출처에는 눈을 감는 것이리라. 

오죽하면 알렉스가 루도비코 요법을 받은 후 출소해서 집으로 돌아갔을 때도 그 방을 다른 사람에게 세를 주었느니 아들인 알랙스를 받아줄 수 없다는 말을 하겠는가...

    

금전적인 것은 때로 ‘선’을 양산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선을 만들기 위해서 보이지 않는 ‘악’이 존재함으로 보여주기 위한 소설인가? 드러난 ‘선’의 이면에는 은폐된 ‘악’이 존재함을....     


우리는 시계태엽 오렌지로 살 수 없다.

선과 악의 끝없는 투쟁.

태엽 달린 오렌지가 아니기에

결국은 자유 의지로 ‘악’을 이기고 조금이라도 선한 행동을 하려 애쓰는 것이 아닐까     

1962년 발표된 소설이지만  이 소설에 묘사된 된 폭력, 범죄의 수위는  1962년의 영국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다. 마치 오늘날 모습처럼 보이는 것,  뉴스에 보도되는 수많은 사건 사고들이 소설에 묘사된.... 

1962년 상황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앤서니 버지스는 가장 잔인하고 처참한 폭력을 여과 없이 묘사하여 

독자가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악’에 대한 공포를 느낄 정도로  스토리를 빠르게 끌고 나간다.

2부에서는 재소자의 죽음을 두고 벌어지는 교도소 내에서의 또 다른 폭력, 루도비코 요법에 대한 신부의 불신, 그리고 알렉스의 선택, 새사람이 된 알렉스가 일상으로 돌아와 직면하는 문제들. 폭력을 일삼던 빌리보이가 제복을 입은 경찰관이 되어 ‘악’을 ‘악’으로 대응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선과 악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3부에는  ‘인과응보’적 장치를 해두었는데 1부에서 알렉스 패거리에게 일방적으로 당한 노인이  알랙스를 응징하는 설정이 나오고 1부에서 아내의 처참한 죽음을 목도한 작가는 알렉스를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하며 선의를 베푼다. 사실 알렉스에게 응징을 해도 시원찮을 것 같은데  그의 행동이 잘 이해되지 않지만 순수한 의도가 아닌 정치적 의도를 어느 정도 깔고 있다.

     

 날뛰는 짐승 같은 ‘청춘’을 건너 각자의 자리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혹은 아직 고삐 풀린 짐승 같은 ‘청춘’의 등에 올라타 있는 사람들에게

혹은 언젠가 짐승의 모습을 한 ‘청춘’을 마주하게 될 사람들에게


적어도 ‘시계태엽 오렌지’ 같은 삶을 살지는 말라는 저자의 당부가 담겨있다.

선한 의지(의도)를 가지고 선한 삶을 살아가기란 쉽지 않다.

1962년이나 지금이나 현실은 그다지 아름답지 않기에.... 려원


<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도서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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