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바깥에 존재하는 날이 오기 전에 절박해져야 한다.
성 제롬은 지금 무엇을 쓰고 있을까
너에게는 너 자신을 잃고 몰락할 용기가 없다. 그래서 너는 결코 새로워지지 못할 것이다. 우리에게 오늘은 날개, 색, 옷 그리고 힘이었던 것이 내일은 단지 재가 되어야 한다
- 니체 『유고』1882~1883
카라바조, <글을 쓰고 있는 성 제롬> 1606년, 112*157cm, 로마 보르게스 미술관
하이데거는 현 존재를 태어나자마자 죽음 앞에 던져진 유한한 존재로 보고 ‘죽음에 이르는 존재(Sein zum Tode)라 불렀다 ’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의미의 바니타스 (Vanitas) 예술의 대표적 소재인 해골이 성 제롬의 책상 위에 놓여있다. 책상 위에 내려앉은 침묵은 사물들에게, 그리고 해골에게, 그리고 언젠가 해골이 될 하에로니무스에게 존재 가치를 깨닫게 한다.
나무 책상 위 책들이 펼쳐져있고 버밀리온 빛깔의 옷을 걸치고 집필에 몰두하는 성 제롬(히에로니무스)은 가장 권위 있는 라틴어 번역 성경으로 여겨지는 것이 불가타역 성경을 번역한 이로 알려져 있다. 벗어진 머리와 흰 수염, 주름진 얼굴, 고개를 숙인 그는 한 손에는 펜을, 또 다른 한 손으로는 책을 잡고 있다. 책을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가 있고 펜을 움켜쥔 손에는 근욱이 도드라져 보인다. 성 제롬으로서의 시간과 히에로니무스로서의 시간이 적은 나무 책상에 섞여 있다. 저 붉고 뜨거운 옷아래, 그의 팽팽한 젊은 날이 있었으리라.
바니타스( Vanitas ) 예술에 주로 등장하는 책은 지식과 경험, 이성의 상징이지만 책이 해골과 같은 공간에 그려질 때는 그 어떤 지식도 영원하지 않음을 상징한다. 성 제롬은 해골을 생의 유한함을 자각하기 위한 책상 위의 모래시계처럼 사용하고 있다. 우리에게 오늘의 날개, 색, 옷 그리고 힘이었던 것이 내일은 단지 재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기에 제롬은 분주하다. 해골이 놓인 곳의 어둠과 성 제롬이 글을 쓰고 있는 곳의 밝음, 후광이 대조적이다. 삶과 죽음의 공존, 한때 사람이었을 해골은 성 제롬의 미래이면서 우리들의 미래이기도 하다.
해골이 말한다. 죽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스스로 원할 때 찾아오는 자유로운 죽음을 위해서는 가장 맛이 들었을 때 떨어지는 과일을 떠올려야 한다고.. 가장 잘 익은 삶, 가장 아름다운 삶의 끝에는 가장 자유로운 추락이 있을 것이라고..
성 제롬의 시간은 흔적 없이 완벽히 사라져 버렸고, 그의 가슴속 별은 우주 공간 짙은 어둠 속에서 수축과 팽창을 반복하고 있으리라. 그러나 그림 속에서 성 제롬은 영원히 죽지 않을 사람처럼 살고 있다. 또한 지금 죽어도 후회가 없을 사람의 자세로 살고 있다.
짙은 어둠 속, 버밀리온 빛깔의 옷을 입은 성 제롬이 촛불처럼 타오르고 있다. 스스로 몰락하고 싶지 않기에 끝없이 쓰는 사람, 끝없이 자신을 태우는 사람이다. 문득 내 책상을 바라본다.
필기도구, 노트북, 펼쳐진 책, 모래시계, 탁상 달력, 모지스 할머니 그림액자, 앙리마티스의 푸른 누드가 그려진 종이, 식은 커피..... 내 책상 위의 사물들은 어쩌면 나보다 오래 남을 것이다. 통유리가 있는 창밖으로 연둣빛 5월이 흐드러질 듯 피어있다.
이곳에서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언젠가는 시간의 바깥에 머무를 날이 올 것이다. 그날이 오기 전에 좀 더 절박해져야 한다. 좀 더 허기를 느껴야 한다....
세상이 변해가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내가 변해가는 것이다.
내가 안주하는 것이고 내가 길들여진 것이다.
끝없이 무언가를 쓰는 성 제롬을 보라...../려원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산문집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