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당신이 주체이며 나는 철저히 객체입니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 리듬 0 > RHYTHM 0  1974년 프로젝트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 리듬 0 > RHYTHM 0  1974

     

그녀는 흰 식탁보로 덮인 긴 테이블 옆에서 6시간을 서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그녀가 선택한 72개의 물건이 놓여있었고 방문객은 그중 하나를 이용해 그녀에게 어떤 행동이든 할 수 있었다. 

어떤 물건들, 립스틱, 향수, 장미, 와인, 깃털, 꿀, 포도처럼 쾌감을 주는 물건, 또 어떤 물건들은 가위, 면도기 도끼, 장전된 총처럼 심각한 고통, 치명적 결과를 줄 수 있는 것들이었다.

관객의 행동으로 빚어질 사태는 전적으로 퍼포먼스를 주도한 그녀의 몫이었다.

테이블에 놓인 아브라모비치의 메모

“ 안내, 이 테이블 위에는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나에게 사용할 수 있는 72개의 물건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퍼포먼스 실연자(주체)이며, 나는 그 대상(객체)입니다. 이 여섯 시간 동안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습니다.”소요 시간 : 6시간 (오후 8시~오전 2시)     


처음 갤러리를 방문한 사람들은 아무 행위도 하지 않았다. 이대로 끝날 듯했다. 한 사람이 마리나에게 꽃을 주면서 그녀에게 키스했다. 마리나는 가만히 있었다.     

이 행동이 도화선이 되어 여태껏 담담하던 사람들의 행동이 과격해지기 시작했다. 옷이 칼에 찢겨 벗겨지고, 면도날에 목이 베이고,, 상처를 입힌 남자는 그녀의 피를 빨기도 했다. 한 사람은 장전된 총을 그녀 손에 쥐어주고 목을 겨냥하게 하는 위험한 순간도 있었고 몇몇 사람들은 그녀를 테이블에 눕히기도 하였다. 4시간쯤 지났을 땐 마리나의 얼굴, 목과 배 등에 상처와 낙서가 가득했고.. 선홍빛 피가 옷을 물들이고 있었다. 


아브라모비치의 작업은 신체에 초점을 두고 고통과 인내를 탐구하는 것들이 많다. 퍼포먼스가 종료되자 마리나가 일어나서 관객을 향해 걸었다. 이들은 마리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모두 황급히 자리를 떴다. 마리나는 관람자 스스로 선택한 고통이나 쾌감과 연결된 물건들로 어떤 행위를 하게 함으로써 군중 행동과 개인의 책임이라는 주제를 탐구하고자 했다.

 '리듬 0'을 통해 도덕과 규범, 즉 일상의 상황에서는 어느 정도 '군대식 통제'를 받는 인간에게 감춰진 욕망과 잔혹성을 폭로했다.      


도화선이 없을 때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처럼 행동하지만  어느 한순간 하나의 틈이 생기면 도덕, 윤리, 질서는 순식간에 무너져 내린다. 허락된 악을 즐기는 사람들은 아무런 죄의식 없이  자신들 안에 장전된 악을 표출한다.     

타자에게 전적으로 주도권이 있는  철저히 객체가 되어보는 실험에서 무저항, 무비판, 절대적 수용을 행하는 일은 어렵고 힘든 작업이다. 그러하기에 겉으로 보기엔 가장 무력하고 가장 수동적인 인물처럼 보이지만 마리나는 가장 강하고 가장 적극적인 대응을 하는 인물이다.      


<기슭에 다다른 당신은>

     

                                            나희덕     


당신은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막다른 기슭에서라도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무언가 끝나가고 있다고 느낄 때

산이나 개울이나 강이나 밭이나 수풀이나 섬에

다른 물과 흙이 섞여 들기 시작할 때     


당신은

기슭에 다다른 당신은

발을 멈추고 구름에게라도 물었어야 했다

산을 내려오고 있는 산에게

길을 잃고 머뭇거리는 길에게 물었어야 했다     


파도에 몸이 무작정 젖어드는 그곳을

우리는 기슭이라고 부르지

....     

빛이 더 이상 빛을 비추지 못하게 되었을 때

마지막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을 때


그래도 당신은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모든 무서움의 시작 앞에 눈을 감지는 말았어야 했다.          


마리나의 <리듬 0> 프로젝트에서 그러지 말았어야 할 당신은 우리들이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눈을 감아버리는가, 어떤 저마다의 기슭에서 외면하고 돌아서고 무시하고 방관하며

자행되는 악을 방치하는가........... 방치와 외면에 그치지 않는다.  엄밀히 보면 우리 안에는 인화성 물질이 닿기만 하면 발화되는 악이 존재한다. 순간순간 도덕으로 위선으로 억누르고 있을 뿐     

테이블 위에 72개의 도구 중, 나는 무엇을 택하여 마리나에게 다가갈까?

그토록 온몸으로 모든 것을 파헤치고 표현하고 드러내려는 마리나에게 내가 할 수 있는 행위는 무엇일까.     

누군가 그녀에게 칼을 쥐어주면 나는 그녀에게 방패를 쥐어줄 것이다.

누군가 그녀의 얼굴에 낙서를 하면 나는 그녀의 얼굴에 묻은 낙서를 지울 것이다.

누군가 그녀의 얼굴에 상처를 입히면 나는 그녀의 피를 닦아주고 빨간 립스틱을 발라줄 것이다.

누군가 그녀의 옷을 찢어놓으면 나는 바늘과 실로 꿰매어 줄 것이다

누군가 그녀 머리에 물을 부으면 나는 그녀의 머리를 말려줄 것이다.         

 

1974년의 프로젝트가   2024년의 지금에도 기슴을 저민다

그토록 과감하고 용감한 프로젝트를 하던 23살의 마리나는 이제 70대가 되었다     

붉은 5월이다.

어떻게 이 5월을 잘 건너갈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아침이다. ‘

기슭에 다다른 우리들... 저마다의 생이 아름답기를... /려원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아르코 문학나눔 우수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


작가의 이전글 히에로니무스는 지금 무엇을 쓰고 있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