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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를 여는 몸짓, 쓴다 긁는다 두드린다

타오르는 몸짓들 < 빨강수집가의 시간>

활을 켤 때 내가 찢는 것은 살아있는 내 작은 심장 조각이네

내가 하는 건 어떤 공휴일도 없이 그저 내 할 일을 하는 거네

그렇게 내 운명을 완성하는 거지

- 파스칼 키냐르 <세상의 모든 아침 >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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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새해 새날 아침이다.

푸른 뱀의 해라고 한다. 올 한 해 동안 나는 어떤 몸짓들을 하게 될까.

어떤 공휴일도 없이 내 할 일 하는 것

다만 내 작은 심장조각을 찢어내듯 맹렬하게... 그렇게 운명을 완성해 가는 것...


쓴다는 것은 표면 위에 물질을 올려놓는 것이 아니라 표면을 긁는 것으로 그리스어 동사 graphein과 관련이 있다. 수천 년 전 사람들은 메소포타미아의 흙벽돌 표면을 뾰족하게 깎은 막대로 새기기 시작했다. 흙을 파고 들어가기. 깊이 새기기... 어떤 형태로든 새기려는 행위는 최초의 예술 활동이었을까.

발렌 플루서는 글을 쓰는 일은 표출하는 것 다시 말하면 ‘어딘가로부터 무엇인가를 향해 누르는 것’, 자신 안에 숨은 가상성이 저항하는 수많은 지충들을 뚫고 나오게 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쓴다는 것은 기입 ( In skription)을 뜻한다. 구성적 몸짓이 아니라 파고 들어가는 집요한 몸짓이다. 쓰는 행위가 파고 들어가는 집요한 몸짓이라니.... 그래서 쓰는 일은 어려운 것일까.


내 안의 기억과 시간과 공간을 점유한 생각이 저항하는 수많은 지층을 뚫고 나오는 것

나는 오늘 새해 첫날 자판을 두드리는 일로 하루를 시작한다.

기억과 생각이 두꺼운 퇴적층을 뚫고 모니터에 새겨진다.

어떤 단어들은 저항하고 어떤 단어들은 단어의 꼬리들을 물고 나온다.

두드리는 행위.... 자판을 두드리는 행위는 피아노의 건반을 두드리는 행위와 같을까. 북을 두드리는 행위와 같을까. 채석장에서 돌을 깨는 망치질과 같을까. 쇠를 두드리는 행위와 같을까.


어린 시절.... 이른 새벽 아버지의 타자기 소리를 듣고 자랐다. 어렴풋이 잠에서 깰 듯 말 듯한 순간에 들려오던 타자기 소리...... 아마도 내가 타자기 글꼴을 유독 좋아하는 것은 어린 날 질리도록 보아온 타자기 글씨 때문일 것이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진행되고, 건너뛰고 종이의 맨 가장자리에 도달하면 다시 왼쪽으로.....

타자기 용지는 매끄럽고 얇았다. 타자쇠가 두드린 글씨가 뒷면에 비쳐 보일 정도로. 반투명한 종이 위로 검은 글씨들이 날아와 박혔다. 오래전 그는 무엇이 그리도 절박하여 책상 앞에서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을까?

아마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무언가 쓰지 않으면 사라지는 모든 것들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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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 수집가의 시간> 제2부 빨강의 몸짓. 스스로 악기가 되는 몸짓 부분


무언가를 붙잡아 두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다만 그리워진다. 그의 웅크린 등과 악기소리처럼 들리던 한여름 이른 아침의 타자기 소리...

자판을 두드린다고 두드림의 결과들이 모니터에 정직하게 찍힌다.

나는 자판을 두드리고 화면에는 자판을 두드린다고 적힌다...

자음과 모음이 짝을 이룬다. 마치 스스로 알아서 짝을 찾는 것처럼.

세상의 모든 몸짓들.. 나는 가장 단순한 몸짓을 반복 중이다. 자판을 북처럼 피아노 건반처럼 나는 두드린다.

새해 아침을 알리는 의식처럼...

검고 씁쓸한 커피를 옆에 두고 쓰지 않으면, 두드리지 않으면 안 되는 주술에 걸린 여자처럼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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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레넌의 노래 Imagine을 생각한다. 세상 사람 모두가 평화롭고 모두가 하나 되는 세상을 꿈꾼다


상 상

존 레넌

천국이 없다고 상상해 보세요.

노력해 보면 그건 쉬운 일이에요.

발아래 지옥도 없고

머리 위론 하늘뿐일 거예요.

모든 사람이 오늘 하루만을 위해 산다고

상상해 보세요.

....

세상 사람 모두가 평화롭게 산다고

상상해 보세요.

당신이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아무것도 가질 게 없다고 상상해 보세요.

욕심을 부리지 않아도 되고 굶주리지도 않을

거예요.

인류 모두가 형제 되고,

모두가 하나 되어

함께 나눈다고 상상해 보세요.

날 공상가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나만은 아닐 거예요. 그런 꿈을 꾸는 사람이

언젠간 당신도 우리와 같은 생각으로

다 같이 하나 되어 세상을 살 테니까.


Imagine


Imagine there's no heaven

It's easy if you try.

No hell below us

Above us only sky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for today..........

Imagine there's no countries

It isn't hard to do.

Nothing to kill or die for

No religion too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life in peace.

Imagine no posessions

I wonder if you can,

No need for greed or hunger

A brotherhood of man

Imagine all the people

Sharing all the world

You may say I'm a dreamer

But I'm not the only one

I hope some day you'll join us

And the world will live as one.


2025년 새해 아침... 새해를 여는 나의 몸짓은 끝없이 종이 위에 쓰고 정신의 지층을 긁어내고 자판을 두드리는 것이다.... /려원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수필과 비평사 / 려원 산문집 2022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

<빨강 수집가의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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