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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나간다

<빨강 수집가의 시간> 우리 안의 빨강을 찾아서


“강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물이 흐른다. 세월이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나간다.”

-프랑스 시인 에르베 바진


2024년의 마지막 날이다.

12월 31일.... 창밖에 겨울바람이 불고 있다.

바람을 견디는 나무들... 이 깊은 겨울, 이듬해 봄을 준비하는 나무들이다.

한 해를 돌아본다. 무엇을 하고 살았을까...

탁상 달력에 빼곡한 일정, 다짐들.... 쓰다만 기록들.

시도는 하였지만 완성되지 않은 것도 완성이라 부를 수 있을까.

꽤 많은 것들을 시도하였고. 시도하려고 욕심을 부렸고...

그러나 내 의도대로 모든 것이 완료되지는 않았다.


2024년 새해를 맞이하던 날은 기대감에 가슴이 설렜고 봄날은 그 봄날의 기운에 취해 나도 모르게 희망을 꿈꾸었고 여름은 여름대로... 가을은 가을대로... 흘러갔다. 그리고 또다시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점이지대 같은 겨울... 헐벗은 겨울산, 나무들은 고개를 들고 꼿꼿이 서있다.

수많은 감정들이, 수많은 일들이 나를 지나갔다

어떤 일은 기쁨으로 어떤 일은 슬픔으로 또 어떤 일은 분노로.. 또 어떤 일은 무기력으로...

나는 먼 산이 보이는 창가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창을 통해 밖을 바라보는 것이고... 묵묵히 무언가를 읽고 무언가를 쓰는 일이다. 내 안의 목소리를 끌어내는 일이다.


한 해의 끝.... 이루지 못한 수많은 목록 중 그나마 올해가 가기 전 마무리 된 것은

두 번째 산문집 <빨강 수집가의 시간>의 탄생이다. 봄부터 서둘렀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12월이 되어 세상 빛을 보게 되었다. 내 안에 아직 꺼지지 않은 ‘빨강’이 남아 있다면 나는 그것을 붙잡아 활자화시키고 싶었다.

그 꺼지지 않은 ‘빨강’의 일부에 다시 불을 붙여 남은 인생을 타오르게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 그저 그런... 무기력한 삶에 불꽃을 점화시킬 수 있을까...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일... 조정래 작가의 말처럼 ‘누구나 홀로 선 나무’ 같다는 생각을 한다.

어떤 역할, 이름, 지위.... 그런 삶의 규격화된 것들을 떨궈내면

결국은 누구나 한 그루의 나목일 것이다.

흔들리는... 그러나 부러지지 말아야 하는...

가엾은 그러나 결코 가엾지는 않은...

연한 그러나 결코 약하지 않은... 한 그루의 나무들..

사회적으로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 최근 항공기 참사는 스산한 12월에 참혹함을 더한다.

새해에는 모두가 행복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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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아름다운 날들입니다. 사람들 속에 이글거리는 빨강을 봅니다. 당신과 나 그리고 우리, 익명의 빨강이 모여 온 세상을 빨갛게 달궈왔음을, 세상의 심장이 되어왔음을 깨닫습니다. 빨강이 내 안에서 깨어납니다. 빨강의 박동이 느껴집니다.

이제 당신을 던져야 할 때입니다. 당신의 바깥으로, 당신의 빨강 안으로.


나는 기억한다. 치명적이고 지배적이고 당혹스러워서 도리어 아름다운 빨강의 흔적을... 너무나 열정적이어서 공격적인, 너무나 에로틱해서 치명적인, 너무나 거룩해서 부끄러운, 너무나 뜨거워서 도리어 차가운, 너무나 매력적이어서 비참한 빨강들이 만들어놓은 수많은 생의 풍경들을 기억한다.

인생은 빨강으로 가득 찬 골목길이다, 골목길의 끝에서 무엇을 마주할지 모르는,.. 어느 구비에선 빨강의 덫에 갇혀버렸고 또 어떤 구비에선 빨강을 피해 필사적으로 달아났다. 또 어느 구비에서 빨강은 나를 외면했고 어느 구비에서 나는 빨강을 방관했다. 빨강 때문에 슬펐고, 빨강 때문에 기뻤고, 빨강 때문에 불안했고 빨강 때문에 확신에 차 있었다. 기뻤다.

어느 날 문득 빨강이 내게서 사라졌다. 허기와 결핍이 내 모든 것을 잠식해 올 때 빨강을 잃어버렸음을, 빨강을 놓아버렸음을, 아니 빨강이 달아나 버린 것을 알았다. 얼어붙은 가슴을 녹이며 이제껏 버텨온 것이 내 안의 빨강 때문이었음을, 두려움, 절망, 좌절, 그 모든 열등감 앞에서 그나마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쉼 없이 나를 달궈주던 빨강 때문이었음을 뒤늦게 알아차린다. 끝없이 타오르던 빨강의 시간을 그리워한다. 타오르고 타올라 끝내 재가 되어 버린 빨강의 흔적을 기억한다.


이생에서의 마지막 옷을 입고 하늘을 향해 누워있는 누군가의 몸, 섬뜩한 차가움 속에 빨강의 부재를 읽었다. 지상에서 이름을 잃어버린 누군가를 떠나보낼 때. 나는 빨강이 사라져 버린 것을, 빨강이 머물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게시판의 숫자에 빨간 불이 들어오던 시간, 뜨겁게 달궈진 빨강 방에서 오열과 한숨이 터져 나오는 사이 그녀의 몸은 그렇게 빨강으로 타올랐으리라. 빨강을 위한 마지막 의식이었을까. 빨강과 이별하기 위해서는 저마다 그만큼의 눈물을 쏟아내야 한다. 내 안의 설렘, 두근거림, 열정, 사랑, 뜨거움은 모두 빨강이 만들어낸 작품이다. 타올라야 한다고, 살아있는 한 빨강을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고 중얼거린다.


손에 쥔 빨강 풍선을 놓쳐버리고 막연히 바라본 하늘, 그 파란 바탕에 찍힌 빨간 점하나, 손에 쥔 빨강 풍선을 놓쳐버리고 막연히 바라본 하늘, 풍선이 빨강 점이 되어 파란 하늘에 박힐 때까지 울음을 터뜨리던 소녀가 있었다. 마당에 피어있던 빨간 제라늄, 봉숭아, 분꽃 사이로 붕붕거리던 벌들의 빨강 움직임들. 빨강 동백의 추락이 가슴에 멍으로 다가오던 새벽과 부엌에서 끓어오르던 빨간 찌개와 전 위에 솔솔 뿌리던 실고추와 어머니의 새벽을 가르던 칼질 소리. 박제가 된 빨강 장미들이 거꾸로 매달린 창문, 어디선가 들려오던 어설픈 피아노 연습곡, 화장대 서랍 안에 뒹구는 쓰다 남은 빨간 매니큐어와 굳어버린 빨간 립스틱, 빨강 색연필과 빨강 동그라미들, 달릴 때마다 기묘한 소리를 내던 가방 안의 빨간 물체 주머니, 창호지 속에 갇힌 붉은 단풍잎들의 노래, 붉은 벽돌담을 기어오르던 담쟁이의 춤, 빨강 벙어리장갑과 빨강 목도리로 등교하던 어느 겨울 눈 내리던 아침, 내 곁에 있었던 그 모든 빨강을. 빨강의 시간을, 빨강의 흔적을 기억한다. 아침을 기억한다.

더 이상 입지 않는 빨강과 더 이상 쓰지 않는 빨강의 무덤 위로 희뿌옇게 회색 먼지가 내려앉았다. 어쩌면 빨강의 기억들로부터 너무 멀리 와버렸는지 모른다. 빨강을 수집하기 위해 빨간 여행 가방을 들고 길을 떠난다.

빨강 신호등 앞에서 멈추고 빨강 우체통 앞에서 멈춘다. 빨강 머플러의 여인을 바라보고, 빨강 장미 넝쿨 아래에서 숨을 고른다. 사람들 속에 이글거리는 빨강을 본다. 세상의 모든 당신과 나, 우리, 익명의 빨강이 뭉쳐 온 세상을 빨갛게 달궈왔던 것임을 본다.

창가에 서서 놓쳐버린 빨강과 아직 오지 않은 빨강 사이 여전히, 내 안에 존재하는 빨강을 생각한다. 아직 온전히 물들지 않은 빨강을 기억하는 일, 결핍, 허기를 세상의 빨강으로라도 채우는 일, 그리하여 나를 빨강으로 타오르게 하는 일.

그러므로 그래서 아직 빨강이 아닌 내가

그러므로 그래서 온전한 빨강이 되는 일.

그러므로 그래서 이미 지나간 시간과 지금이라는 시간과 앞으로 다가올 시간을 빨강으로 채우고 빨강으로 기억하는 일.

<빨강 수집가의 시간> 제1부 공간의 껍질 벗기기, 채우기 그리고 기억하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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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의 마지막날

나를 달궈주었던 세상의 모든 빨강에게 감사하며

세상의 모든 빨강이

세상 모든 이의 가슴에 온기가 되어주기를

세상 모든 이의 삶에 불꽃을 피워주기를 소망한다/ 려원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8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

< 빨강 수집가의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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