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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든 '흰'과 그 모든 '빨강'

이제 당신에게 내가 흰 것을 줄게. 더럽혀지더라도 흰 것을,

“ 이제 당신에게 내가 흰 것을 줄게.

더럽혀지더라도 흰 것을,

오직 흰 것들을 건넬게.

더 이상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게

이 삶을 당신에게 건네어도 괜찮을지.”


<흰 >/ 한 강


역사적 트라우마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강렬하고 시적인 산문

흰 것에 대해 쓰겠다고 결심한 봄에 내가 처음 한 일은 목록을 만든 것이었다.

강보

배내옷

소금

얼음

파도

...

백발

수의

한 단어씩 적어갈 때마다 이상하게 마음이 흔들렸다.... 시간의 감각이 날카로울 때가 있다. 몸이 아플 때 특히 그렇다. 해오던 일을 멈추고 통증을 견디는 동안, 한 방울씩 떨어져 내리는 시간은 면도날을 뭉쳐 만든 구슬들 같다. 손끝이 스치면 피가 흐를 것 같다....

그렇게 날카로운 시간의 모서리- 시시각각 갱신되는 투명한 벼랑의 가장자리에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간다. 살아온 만큼의 시간 끝에 아슬아슬하게 한 발을 디디고, 의지가 개입할 겨를 없이, 서슴없이 남은 한 발을 허공으로 내딛는다 특별히 우리가 용감해서가 아니라 그것밖엔 방법이 없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도 그 위태로움을 나는 느낀다. 아직 살아보지 않은 시간 속으로, 쓰지 않은 책 속으로 무모하게 걸어 들어간다.

< 흰 > 작가의 말 부분


모국어에서 흰색을 말할 때 ‘하얀’과 ‘흰’이라는 두 형용사가 있다. 솜사탕처럼 깨끗하기만 한 ‘하얀’과 달리 ‘흰’에는 삶과 죽음이 소슬하게 배어있다. 내가 쓰고 싶은 것은 ‘흰’ 책이었다. 그 책의 시작은 내 어머니가 낳은 첫아기의 기억이어야 할 거라고...

- 한강 에필로그 부분


* 강보

눈처럼 하얀 강보에 갓 태어난 아기가 꼭꼭 싸여있다... 이제 처음 허파로 숨쉬기 시작한 사람.,, 어린 짐승들 중에서 가장 어린 짐승.

피를 너무 흘려 창백해진 여자가 그 아기의 울고 있는 얼굴을 본다... 당황하며 강보째로 아기를 받아 안는다... 보지 못하는 아기의 검은 눈이 여자의 얼굴 쪽을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향한다. 무엇이 시작되었는지 모르는 채, 아직 두 사람이 연결되어 있다. 피냄새가 떠도는 침묵 속에서. 하얀 강보를 몸과 몸 사이에 두고


*배내옷.

내 어머니가 낳은 첫아기는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죽었다고 했다.

여덟 달 만의 조산이라 몸이 아주 작았지만 눈코입이 또렷하고 예뻤다고 했다... 갑자기 양수가 터졌다. 아무도 주변에 없었다. 마을에 한 대뿐인 전화기는 이십 분 거리의 정류장 앞 점방에 있었다. 초등학교 교사인 아버지가 퇴근하려면 아지 여섯 시간도 더 남았다.

막 서리가 내린 초겨울이었다. 스물세 살의 엄마는 엉금엉금 부엌으로 기어가 어디선가 들은 대로 물을 끓이고 가위를 소독했다. 반짇고리 상자를 뒤져보니 작은 배내옷 하나는 만들만한 흰 천이 있었다. 산통을 참으며, 무서워서 눈물이 떨어지는 대로 바느질을 했다. 배내옷을 다 만들고 강보로 쓸 홑이불을 꺼내놓고, 점점 격렬하고 빠르게 되돌아오는 통증을 견뎠다.

마침내 혼자 아기를 낳았다. 혼자 탯줄을 잘랐다. 피 묻은 조그만 몸에다 방금 만든 배내옷을 입혔다. 죽지 마라 제발... 처음엔 감겨있던 아기의 눈꺼풀이, 한 시간이 흐르자 거짓말처럼 방긋 열렸다. 그 까만 눈에 눈을 맞추며 다시 중얼거렸다. 제발 죽지 마. 한 시간쯤 더 흘러 아기는 죽었다. 죽은 아기를 가슴에 품고 모로 누워 그 몸이 점점 싸늘해지는 걸 견뎠다. 더 이상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 스물여섯 살 난 남편은 어제 태어났던 아기를 묻으러 삽을 들고 뒷산으로 갔다.


*어둠 속에서 어떤 사물들은

어둠 속에서 어떤 사물들은 희어 보인다.

어렴풋한 빛이 어둠 속으로 새어 들어올 때, 그리 희지 않던 것들까지 창백하게 빛을 발한다...

흰 회벽에 어른거리는 창밖 나무들의 형상을 바라보았다.


*날개

이 도시의 외곽에서 그녀는 그 나비를 보았다.

하얀 나비 한 마리가 십일월 아침 갈대숲 옆에 날개를 접고 누워 있었다.... 지난주부터 기온이 급격하게 떨어졌는데, 그 사이 날개가 몇 차례 얼었다 녹으며 흰빛이 지워졌는지 어떤 부분은 거의 투명해 보였다. 바닥의 검은흙이 어른어른 비쳐 보일 정도였다. 시간이 좀 더 흐르면 더 이상 날개가 아닌 것이 되고 나비는 더 이상 나비가 아닌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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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함박눈이 검은 코트 소매에 내려앉으면, 유난히 큰 눈의 결정은 맨눈으로 볼 수 있다...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잠시 눈을 바라본다... 어떤 소리도 없이, 아무런 기쁨도 슬픔도 없이 성근눈이 흩어질 때, 이윽고 수천수만의 눈송이들이 침묵하며 거리를 지워갈 때, 더 이상 그걸 지켜보지 않고 얼굴을 돌리는 사람들이 있다


*눈송이들

...

더럽게도 하얗게 내리는 눈.

눈송이가 성글게 흩날린다.

가로등의 불빛이 닿지 않는 검은 허공에.

말없는 검은 나뭇가지들 위에

고개를 수그리고 걷는 행인들의 머리에.


* 진눈깨비

삶은 누구에게도 특별히 호의적이지 않다. 그 사실을 알면서 걸을 때 내리는 진눈깨비, 이마를. 눈썹을, 뺨을 물큰하게 적시는 진눈깨비. 모든 것은 지나간다. 그 사실을 기억하며 걸을 때, 안간힘을 다해 움켜쥐어온 모든 게 기어이 사라지리란 걸 알면서 걸을 때 내리는 진눈깨비. 비도 눈도 아닌 것. 얼음도 물도 아닌 것..


*눈보라

우산을 썼지만 소용없없다. 눈을 제대로 뜰 수도 없었다. 얼굴로, 몸으로 세차게 휘몰아치는 눈송이들을 거슬러 그녀는 계속 걸었다... 대체 무엇일까. 이 차갑고 적대적인 것은? 동시에 연약한 것. 사라지는 것. 압도적으로 아름다운 이것은?


*재

어머니의 뼛가루가 담긴 유골함은 납골당에, 혼은 멀리 바다가 보이는 작은 절에 모셨다. 새벽마다 승려들이 어머니의 이름을 부르며 독경을 할 것이라고 했다.... 빛과 소리들 가까이, 어머니의 재는 돌로 된 서랍 속에서 변함없이 고요할 것이다.


*흰 새들

겨울 바닷가 모래밭에 흰 갈매기들이 모여 있었다... 서쪽의 해를 향해... 무슨 침묵의 의식을 치르는 듯 미동도 하지 않고, 영하 이십 도의 추위 속에서 일몰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도 그들이 바라보는 것-붉어지기 직전의 창백한 광원-을 바라봤다. 뼛속까지 얼어붙을 듯 추웠지만 정말 그녀의 몸이 뼛속까지 얼어붙지 않은 건 바로 그 빛 –열기 덕분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 왜 흰 새는 특별히 아름답게, 기품 있게, 때로 거의 신성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이따금 흰새가 날아가는 꿈을 꾼다. 아무런 소리도 없이, 햇빛에 깃털들을 빛내며..


한강 작가를 보면 그녀가 하얗게 웃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얗게 웃는다라는 표현은 아마... 아득하게, 쓸쓸하게, 부서지기 쉬운 깨끗함으로 웃는 얼굴 또는 그런 웃음... 조용히 견디며 웃으려 애썼던 어떤 사람, 자신 안의 무엇인가와 결별하려 애쓰는 어떤 사람이다.


*백발

새의 깃털처럼 머리가 하얗게 센 다음에... 한 올도 남김없이 머리털이 하얗게 세었을 때...

젊음도 육체도 없이

열망할 시간이 더 남지 않았을 때

만남 다음으로는 단 하나, 몸을 잃음으로써 완전해질 결별만 남았을 때..



그러니 만일 당신이 아직 살아 있다면, 지금 나는 이 삶을 살고 있지 않아야 한다.

지금 내가 살아 있다면 당신이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어둠과 빛 사이에서만, 그 파르스름한 틈에서만 우리는 가까스로 얼굴을 마주 본다.


* 수의

어떻게 하셨어요. 그 아이를?

스무 살 무렵 어느 밤 아버지에게 처음 물었을 때, 아직 쉰이 되지 않았던 그는 잠시 침묵하다 대답했다.

겹겹이 흰 천으로 싸서 산에 가서 묻었지.

혼자서요?

그랬지, 혼자서.

아기의 배내옷이 수의가 되었다. 강보가 관이 되었다.


*백지 위에 쓰는 몇 마디 말처럼

물큰하게 방금 보도를 덮은 새벽 눈 위로 내 검은 구두 자국들이 찍히고 있었다.

백지 위에 쓰는 몇 마디 말처럼.


*소복

결혼식을 앞둔 이들은 서로의 부모에게 옷을 선물해야 한다. 산 자에게는 비단옷을, 망자에게는 무명 소복을... 동생의 신부가 마련해 온 흰 무명 치마저고리를 나는 바위 위에 올렸다. 아침마다 독경 뒤에 어머니의 이름이 불리는 절 아래 풀숲이었다. 동생이 건넨 라이터로 소매에 불을 붙이자 파르스름한 연기가 일었다. 흰옷이 그렇게 허공에 스미면 넋이 그것을 입을 거라고, 우리는 정말 믿고 있는가?


*연기

입을 다문채 우리들은 끈질기게 바라보고 있었다. 거대하게 부푼 잿빛 날개 같은 연기... 무명 치마의 마지막 밑단이 불꽃 속으로 빨려 들어갈 때 당신을 생각했다. 당신, 올 수 있다면 지금 오기를, 연기로 지은 저 옷을 날개옷처럼 걸쳐주기를. 말 대신 우리 침묵이 저 연기 속으로 스미고 있으니, 쓴 약처럼, 쓴 차처럼 마셔주기를.

*모든 흰

자작나무숲의 침묵 속에서 당신을 볼 것이다. 겨울 해가 드는 창의 정적 속에서 볼 것이다.

비스듬히 천장에 비춰진 광선을 따라 흔들리는, 빛나는 먼지 분말들 속에서 볼 것이다.

그 흰, 모든 흰 것들 속에서 당신이 마지막으로 내쉰 숨을 들이마실 것이다.



노벨문학상 선정 기관인 스웨덴 한림원이 노벨상 시상식에서 한강의 주요 작품을 관통하는 색상이 ‘흰색’과 ‘빨간색’이라며 이는 죽음과 삶을 의미한다고 해석했다.

한림원 종신위원인 스웨덴 소설가 엘렌 맛손은 스웨덴 스톡홀름 콘서트홀에서 열린 ‘2024 노벨상 시상식’ 문학 부문 시상 연설에서 “흰색은 그녀의 많은 작품 속에 등장하는 눈(雪)으로 화자와 세상 사이 보호막을 긋는 역할을 하지만 슬픔과 죽음의 색이기도 하다”면서 “빨간색은 삶, 그리고 한편으로는 고통과 피를 의미한다”라고 풀이했다.

“그녀의 (작품 속) 목소리가 매혹적일 만큼 부드러울 수는 있으나, 형언할 수 없는 잔혹성과 돌이킬 수 없는 상실감에 대해 말하고 있다”며 한강의 작품은 “결코 잊어버리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며 “(소설 속) 인물들은 상처를 입고 부서지기 쉬우며 어떤 면에서는 나약하지만, 그들은 또 다른 발걸음을 내딛거나 질문을 던질 만큼의 충분한 힘을 갖고 있다”라고 말했다.


한강의 작품 속 끝없이 등장하는 ‘흰’과 ‘빨강’

엘렌 맛손의 말처럼 ‘흰’은 슬픔과 죽음, ‘빨강’은 삶과 고통, 피를 상징한다

‘빨강’이란 뜨거움, 타오름, 삶, 열망, 열정의 상징이면서

이 ‘빨강’의 힘이 타인에게 폭압적으로 미칠 때는 공포, 불안, 두려움, 고통, 피의 상징이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색이면서, 한때 성직자들만이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거룩한 색이면서도 어느 시기에는 사창가의 상징색, 유혹의 색이기도 했다.

빨강은 웨딩드레스의 색이면서 윤락여성임을 표현하기도 하는 야누스적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나는 < 빨강 수집가의 시간>에서 폭압과 고통의 색으로서의 ‘빨강’보다는 우리 안의 ‘빨강’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결핍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왜 삶은 자꾸 허기지는 것인지 묻고 싶었다.

뱅크시의 작품 ‘소녀와 풍선’처럼 놓쳐버린 빨강과 놓아버린 빨강.... 그 사이에 우리의 삶이 존재한다는 것을...

다시 ‘빨강’으로 나를. 나의 지쳐버린 심장을 다시 두드려 깨우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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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 수집가의 시간> 제3부 빨강의 흔적 * 하얀 눈에 붉은 튤립을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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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새해 둘째 날의 밤이 가고 있다.

오늘 내 할 일을 다 하였는가 스스로에게 묻는 시간이다.

한강 작가의 <흰>을 다시 읽는 시간.... 그녀의 조용하고 섬세한 '흰' 속에 연민, 지키고 싶은 것들, 지켜야만 하는 것들... 세상의 폭력을 덮을 거대한 강보 같은, 배내옷 같은 그리고는 마침내 수의 일 것 같은

그 모든 '흰'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밤.

삶에 대해....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 예의를 지켜야 하는 밤. /려원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 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

<빨강 수집가의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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