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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를 먼저 포기하지 않는다면

어느 곳에서나 함께 있는 것들이 있다

시는 ‘지독한 의심을 거쳐’ 나온다


“시는 이렇게 뭐라도 포착하려고 몇 개의 단어를 가지고 온다. 이건 이야기도 아니고 드라마도 아니다. 시간을 조금 더 긴 시간을 요하는 성찰도 아니다. 다만 여러 감각들의 동시 발생, 아니면 적어도 감각의 약간 혼란스러운 집중이다. 이에 대한 분석을 그 맛을 고갈시킬 뿐이다.”


“나는 코스모스(cosmos)란 단어를 생각한다... 시의 원천은 바로 섬광 속에서, 때론 천천히 배어드는 과정을 통해... 저열한 것만큼이나 틀림없이 존재하는 아름다움, 그 정연한 세계가 솟구친다. 지독한 의심을 거쳐, 결국은 시인들이 다시 돌아오고 마는 특이한 미끼, 함정.”

-필립 자코테


시인은 시를 쓰기 위해 ‘지독한 의심’이라는 과정을 통과한다.

시뿐만 아닐 것이다.

글을 쓰는 이들 모두에게 ‘지독한 의심’은 좋은 글을 잉태하기 위한 기본일 것이다.

하지만 ‘지독한 의심’의 결과가 항상 긍정적인 영향력으로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지독한 의심’은 자신과 자신의 글에 대해 낱낱이 까빨려지면서 느끼는 절망과 부끄러움, 자괴감을 양산하기도 한다. ‘지독한 의심’을 통해 걸러진 문학의 정수, 더 나아가 삶의 정수를 누리는 자는 몇이나 될까 싶다.


<폐허 이후>

도종환

사막에서도 저를 버리지 않는 풀들이 있고

모든 것이 불타버린 숲에서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믿는 나무가 있다

화산재에 덮이고 용암에 녹는 산기슭에도

살아서 재를 털며 돌아오는 벌레와 짐승이 있다

내가 나를 버리면 거기 아무도 없지만

내가 나를 먼저 포기하지 않으면

어느 곳에서나 함께 있는 것들이 있다

돌무더기에 덮여 메말라 버린 골짜기에

다시 물 고이고 물줄기를 만들어 흘러간다.

내가 나를 먼저 포기하지 않는다면


도종환 <부드러운 직선>.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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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어수선한 날들이 이어진다.

새해라고 하여 특별할 것이 없지만....

아침 일찍 양배추, 브로콜리, 생감자를 간 것을 마시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삶은 계란 두 개와, 채 썬 당근과 양배추, 사과와 귤을 적당히 슬라이스 한 샐러드로 아침을 먹고 쓰고 진한 커피를 마시고...

무언가를 검색하고 읽고 쓰고... 누군가를 만나고.. 가르치고... 또다시 돌아와 읽고 쓰는 일의 반복... 단조롭지만 지루하지 않다.

‘지독한 의심’ 이란걸 품어보기로 결심한다.

내가 하는 말과 글과 행동. 생각에 이르기까지

'지독한 의심‘' 결과 태어날 정수를 상상하며... 그러나 나를 자학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나를 버리면 거기 아무도 없지만

내가 나를 먼저 포기하지 않으면

어느 곳에서나 함께 있는 것들이 있다

돌무더기에 덮여 메말라 버린 골짜기에

다시 물 고이고 물줄기를 만들어 흘러간다

내가 나를 먼저 포기하지 않는다면


내가 나를 먼저 포기하지 않는다면

내가 나를 먼저 버리지 않는다면

어디에서나 함께 있는 것들이 있고... 메마른 골짜기에도 다시 물 고이고 물줄기를 만들며 흘러간다고 이야기한다.

어느 누구도 나를 대신하여 살아줄 수도 죽어줄 수도 없는 세상에서

나를 버리지 말아야 할 책임과 의무가 나에게 있다.

다시 물 흐르고... 다시 이어지는 아름답고 선한 것들을 위하여... 올 한 해 묵묵히 살아가야 한다./려원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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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 수집가의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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