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떨림'의 열매들이 남아있다면 올해 제일 아름다운 불을 피울 것
샤갈의 마을에서 그해 가장 아름다운 불을 지펴야 할 때
3월... 춘분이 머지않았는데 눈이 내린다.
간 밤에 자다가 하늘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다.
하얀 것들.. 온통 새하얀 것들이 바람의 결대로, 지체 없이, 머뭇거림 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새하얀 것들이 드러내는 밝음을 응시했다.
옥탑방 베란다 화분들이 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한 밤중 부랴부랴 화분들을 방 안으로 넣었다.
샤갈의 마을에는 3월에도 눈이 온다고 하지 않은가.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김춘수
샤갈의 마을에는 삼월(三月)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는 정맥(靜脈)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는 정맥(靜脈)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數千) 수만(數萬)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삼월(三月)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 한 겨울 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네들은
그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샤갈의 마을에는 삼월에 눈이 온다. 샤갈의 마을은 현실의 마을일 수도 있지만 상상 속의 마을일 수도 있다. 샤갈의 마을에는 봄을 바라는 사나이가 살고 봄을 바라느라 바르르 떠는 그의 관자놀이에 수천수만의 날개를 단 새하얀 것들이 내려온다.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새하얀 눈들이 덮는다. 샤갈의 마을에 3월에 눈이 내리면 쥐똥만 한 겨울 열매들이 올리브 빛으로 물들고 아낙들은 그해의 가장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봄눈이 수천수만의 날개를 달고 사뿐히 내려앉는다.
김춘수의 시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을 읽다 보면 마르크 샤갈의 작품 <나와 마을>이 자동적으로 떠오른다. 마르크 샤갈의 <나와 마을>은 샤갈이 러시아에서 파리로 돌아와 1911년 완성한 작품으로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추억이 투영된 작품이라 한다. 다채로운 색채, 빨강과 녹색의 보색대비, 원근법을 무시한 비현실적인 구도로 강렬한 느낌을 준다. 상징적인 장치를 통해 시적이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준다.
유대인 전통에서 염소는 죄인이 죽은 후 영혼을 맞이해 주는 존재로 흔히 표현되는데 초록 얼굴빛의 남자는 손에 올리브나무를 들고 염소와 마주 보고 있다. 초록 얼굴의 남자와 염소 사이의 동심원은 운동감을 주면서도 작품의 여러 요소들을 통합한다.
젖을 짜는 여인과 낫을 들고 가는 농부, 동그란 올리브 열매들, 옹기종기 늘어선 집들, 동화 속 세계처럼 거꾸로 서있는 여인과 집, 십자가가 선명히 보이는 교회가 그려져 있다. 선으로 구획된 배치 속 빨강과 파랑과 초록은 따뜻하고 몽환적이고 아름답다. 캄캄한 밤하늘과 파란 하늘, 동물과 인간, 빨강과 초록이, 거꾸로 존재하기와 바로서기가 공존해 있다.
저마다의 터전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고, 축복처럼 열리는 열매들이 있다. 초록남자의 미소 짓는 입과 염소의 검은 눈동자, 샤갈의 마을은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3월에 수천수만의 날개를 달고 새하얀 눈이 내릴 리도 없고 올리브빛 얼굴의 사내의 관자놀이가 파르르 떨릴 리도, 쥐똥만 한 겨울 열매들이 올리브빛으로 물들 리도 없다. 아낙네들은 더더욱 그해 가장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필 일도 없으리라.
그럼에도 샤갈의 그림과 김춘수의 시를 동시에 바라보고 있으면 샤갈의 마을에 들어와 있는 것만 같다. 김춘수도 샤갈도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뒤에 남은 누군가는 그들의 시와 그림으로 위로를 받고 있지 않은가. 설령 이곳이 샤갈의 마을이 아닐지라도 한없이 그림을 바라보고 단어 한 자 한 자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마음도 올리브빛으로 물들고 그해 아름다운 불이 지펴지지 않을까.
색이 전부다.
색채가 올바르다면 그 형식이 맞는 것이다,
색이 전부이고, 음악처럼 진동한다.
그 전부는 떨림이다.
- 마르크 샤갈-
샤갈이 말한 '떨림'이라는 단어 앞에 멈춘다. 3월에도 눈 내리는 오늘, 나는 샤갈의 마을에 들어와 있다.
대책 없이 쏟아지는 눈보라 앞에서 다시 '떨림'을 생각한다. 안주하려는 것, 익숙한 것에 길드는 것, 포기하려는 것, 접어버리는 것은 모두 '떨림'을 모독하는 일일 것이다.
세월이, 시간이 내 안의 '떨림'마저 빼앗아가지는 못하리라..
샤갈의 마을은 삼월에도 눈이 내리고 눈은 수천(數千) 수만(數萬)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마을에 있는 쥐똥만 한 겨울 열매들이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 들면 아낙네들은 그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고 하지 않은가.
내 안에 쥐똥만 한 '떨림'의 열매들이 아직 남아있다면
나는 기꺼이 올 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마음의 아궁이에 지필 것이다.
안내문자에 '대설주의보'가 뜬다. 이 모든 풍경과 이 모든 시간이 낯설고 생경하지만 다시 힘을 내기로!/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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