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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틀거리는 것을 사랑하십니까?

< 서울 1964년 겨울 > / 나는 그 움직임을 지독하게 사랑합니다

< 서울 1964년 겨울 > 김승옥


서울 1964년 겨울

1960년대 서울은 ‘안’이 말한 것처럼 온갖 욕망이 집결한 도시였다.

제목에 등장하는 ‘겨울’은 무관심과 비인간적인 사회 분위기, 냉혹한 현실을 상징한다.

1964년 겨울 어느 날 저녁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우연히 만난 세 남자의 이야기다. 등장인물들의 이름은 ‘안 형’, ‘김 형’, ‘사내’ 등으로 익명화되어있다. 사내의 불행에 대해 안과 나(김형)는 거리를 둔다. 함께 있지만 사내의 불행이 자신들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안 형’ 은 사내의 죽음을 짐작했으면서도 따로 방을 잡고 다음날 사내의 죽음을 확인한 뒤에는 혼자 두면 죽지 않을 줄 알았다고 모순적으로 말한다. ‘사내’가 죽은 뒤에 여관을 나가려는 ‘나’의 발밑에 개미가 보이자 마치 그 개미가 죽은 사내라도 되는 양 나는 서둘러 다른 곳으로 발을 디딘다. 사내의 죽음에 자신은 책임이 없다고 생각함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김승옥의 소설 < 서울 1964년 겨울 >

1964년 겨울을 서울에서 지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겠지만, 밤이 되면 거리에 나타나는 선술집- 어묵과 군참새와 세 가지 종류의 술 등을 팔고 있고, 얼어붙은 거리를 휩쓸며 부는 차가운 바람이 펄럭거리게 하는 포장을 들치고 안으로 들어서게 되어 있고...


그날 밤 우리 세 사람은 우연히 만났다. 우리 세 사람이란 나와 도수 높은 안경을 쓴 ’ 안‘이라는 대학원 학생과 정체는 알 수 없지만 요컨대 가난뱅이라는 것은 분명하여 그의 정체를 알고 싶다는 생각은 조금도 나지 않는 서른대여섯 살짜리 사내를 말한다.

그는 안 씨라는 성을 가진 스물다섯 살짜리 대한민국 청년, 대학 구경을 가보지 못한 나로서는 상상이 되지 않는 전공을 가진 대학원생, 부잣집 장남. 나는 스물다섯 살짜리 시골출신, 고등학교 졸업 후 육군사관학교를 지원했다가 실패하고 나서 군대에 갔다가 임질에 한 번 걸려본 적이 있고 지금은 구청 병사계에서 일한다.


'안 형’과 ‘김 형’(나)의 대화는 소통으로 보기 어렵다.

“어떤 꿈틀거림이 아닙니다. 그냥 꿈틀거리는 거죠. 그냥 말입니다. 예를 들면...... 데모도......”

“데모가? 데모를? 그러니까 데모......”

“서울은 모든 욕망의 집결지입니다. 아시겠습니까?”

“모르겠습니다.”라고 나는 할 수 있는 한 깨끗한 음성을 지어서 대답했다.

그때 우리의 대화는 또 끊어졌다.

“평화 시장 앞에서 줄지어 선 가로등 중에서 동쪽으로부터 여덟 번째 등은 불이 켜져 있지 않습니다.....” 나는 그가 좀 어리둥절해하는 것을 보자 더욱 신이 나서 얘기를 계속했다. “그리고 화신 백화점 육 층의 창들 중에서는 그중 세 개에서만 불빛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엔 내가 어리둥절해질 사태가 벌어졌다. 안의 얼굴에 놀라운 기쁨이 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건 얘기가 됩니다. 그 사실은 완전히 김 형의 소유입니다.”

“나는..” 이번에는 그가 말할 차례였다. ”서대문 근처에서 서울역 쪽으로 가는 전차의 트롤리가 내 시야 곳에서 꼭 다섯 번 파란 불꽃을 튀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건 오늘 밤 일곱 시 십오 분에 거길 지나가는 전차였습니다. “

“종로 이가 쪽입니다. 영보빌딩 안에 있는 변소문의 손잡이 조금 밑에는 약 이 센티미터 가량의 손톱자국이 있습니다.”

하하하하, 하고 그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건 김 형이 만들어 놓은 자국이겠지요?” 나는 무안했지만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사실이었다.

“어떻게 아세요?”하고 나는 그에게 물었다.

“나도 그런 경험이 있으니까요.”그가 대답했다.


“김형, 꿈틀거리는 것을 사랑하십니까?”

“사랑하고말고요.”

....

“출근 시간의 만원 버스 속, 젊은 여자 앞에 섭니다... 내 앞에 앉아있는 여자의 아랫배 쪽으로 천천히 시선을 보냅니다. 처음엔 얼른 눈에 뜨이지 않지만 시간이 가고 내 시선이 투명해지면서부터 나는 그 여자의 아랫배가 조용히 오르내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오르내린다는 건... 호흡 때문에 그러는 것이겠죠?”

“물론입니다. 시체의 아랫배는 꿈쩍도 하지 않으니까요. 나는 그 아침의 만원 버스 칸 속에서 보는 젊은 여자 아랫배의 조용한 움직임을 보고 있으면 왜 그렇게 마음이 편안해지고 맑아지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그 움직임을 지독하게 사랑합니다.”


“글세 밤거리에 나오는 이유는 뭡니까?”

“하숙방에 들어앉아 벽이나 쳐다보고 있는 것보다는 나으니까요.”

“밤거리에 나오면 뭔가가 좀 풍부해지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뭐가요?”

“그 뭔가가, 그러니까 생(生)이라고 해도 좋겠지요. 난 김형이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내 대답은 이렇습니다. 밤이 됩니다. 집에서 거리로 나옵니다. 모든 것에서 해방된 것을 느낍니다. 아니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느낀다는 말입니다.”

“글쎄요.”

...

“어렵다고 말하지 마세요. 이를 테면 낮엔 그저 스쳐 지나가던 모든 것이 밤이 되면 내 시선 앞에서 자기들의 벌거벗은 몸을 송두리째 드러내놓고 쩔쩔맨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게 의미 없는 일일까요?”


우리 곁에서 술잔을 받아놓고 연탄불에 손을 쬐고 있던 사내. 어디선지는 분명하지 않았지만 가난뱅이 냄새가 나는 서른대여섯 살짜리 사내였다. 그 사내가 말을 걸어왔다

“미안하지만 함께 가도 괜찮을까요? 제게 돈은 얼마든지 있습니다만...”

우리는 근처의 중국요릿집으로 들어갔다.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들어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오늘 낮에 제 아내가 죽었습니다.... 아내와는 재작년에 결혼했습니다. 우연히 알게 됐습니다.... 난 처갓집이 어딘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었어요”

그는 고개를 떨구고 입을 우물거렸다.

“뭘 할 수 없었다는 말입니까?”

“아내의 시체를 병원에 팔았습니다. 할 수 없었습니다. 난 서적 외판원에 지나지 않습니다. 할 수 없었습니다. 돈 사천 원을 주더군요.. 아내는 어떻게 될까요. 학생들이 해부 실습을 하느라고 톱으로 머리를 가르고 칼로 배를 찢고 한다는데 정말 그러겠지요?”

“기분 나쁜 얘길 해서 죄송합니다. 다만 누구에게라도 얘기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이 돈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저는 오늘 저녁 다 써버리고 싶은데요.”

“쓰십시오.”

“ 이 돈이 다 없어질 때까지 함께 있어주시겠어요?”


중국 집에서 거리로 나왔을 때 우리는 모두 취해 있었고... 사내는 한쪽 눈으로는 울고 다른 쪽 눈으로는 웃고 있었다.

“이제 어디로 갈까?” 하고 아저씨가 말했다.

“어디로 갈까?” 안이 말하고

“어디로 갈까?” 나도 그들의 말을 흉내 냈다.


양품점 안으로 들어갔다

“넥타이를 가져. 내 아내가 사주는 거야.” 사내가 호통쳤다. 우리는 알록달록한 넥타이를 골랐고...

“어디로 갈까?”사내가 말했다.

갈 데는 계속해서 없었다. 양품점 앞에는 귤장수가 있었다.

“아내는 귤을 좋아했다.”사내는 귤을 향해 돌진했다.

“택시!” 사내가 외쳤다.

우리가 차에 오르자마자 사내는 “세브란스로”외쳤다.

“안 됩니다. 소용없습니다”안이 재빠르게 외쳤다.

“갈데없으면 빨리 내리쇼”운전사가 짜증 난 음성으로 말했다.

거리 저쪽 끝에서 소방차 두 대가 나타나 빠르게 지나쳤다.

“택시!”사내는 고함쳤다.

우리가 택시에 오르자마자 사내는 “저 소방차 뒤를 따라갑시다.”


미용학원 이층에서 불길이 창으로 뿜어 나오고 있었다. 경찰 호각 소리, 사이렌 소리, 불길 속에서 나는 탁탁 소리, 물줄기가 건물 벽에 부딪쳐서 나는 소리, 사람들의 소리는 아무것도 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불빛에 비쳐 무안당한 사람처럼 붉은 얼굴로, 정물처럼 서 있었다.

우리는 발 밑에 굴러있는 페인트 든 통을 하나씩 궁둥이 밑에 깔고 웅크리고 앉아 불구경을 했다. 미용학원이안 간판에 불이 붙고 있었다. ’ 원‘자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이젠 ’ 학‘자에 불이 붙고 있는 것을 보았다.

물줄기 하나가 불타고 있는 ’ 학‘으로 달려들고 있었다. 힘없는 아저씨가 갑자기 힘차게 깡통으로부터 일어섰다.

“내 아냅니다. 내 아내가 머리를 막 흔들고 있습니다. 골치가 깨질 듯 아프다고 머리를 막 흔들고 있습니다...

불은 날쌔게 ’용‘을 핥고 있었다. 나는 ’ 미‘까지 불붙기를 바라고 있었다.

무언가 하얀 것이 우리가 웅크리고 앉아있는 곳에서 불타고 있는 건물 쪽으로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순경이 아저씨를 붙잡으며 “방금 불 속으로 무얼 던졌소?”

“돈입니다.”

우리는 모두 오랫동안 불꽃이 튀는 탁탁 소리애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한참 후 안이 사내에게 말했다.

“결국 그 돈은 다 쓴 셈이군요.... 자 이젠 그럼 약속이 끝났으니 우린 가겠습니다.”


안과 나는 돌아서서 걷기 시작할 때 사내가 달려와 안과 나의 팔을 붙잡았다.

“나 혼자 있기 무섭습니다.”
... “함께 갈 수 없겠습니까? 오늘 밤만 같이 지내주십시오. 부탁입니다.”

우리는 어두운 골목길로 들어섰다. 사내는 전등이 켜져 있는 대문 앞에서 벨을 눌렀다,

“월부 책값 받으러 온 사람입니다. 월부 책값....”

“내일 낮에 오세요.” 대문이 탁 닫혔다.

사내는 울고 있었다,

“추운데 빨리 여관으로 갑시다.” 안이 말했다.

“방을 한 사람씩 따로 잡을까요?” 여관에 들어갔을 때 안이 우리에게 말했다.

“모두 한 방에 드는 게 좋겠지요.” 나는 아저씨를 생각해서 말했다.

벽으로 나누어진 방들. 그것이 우리가 들어가야 할 곳입니다.

“난 지금 아주 피곤합니다. 방은 각각 하나씩 차지하고 자기로 하지요.” 안이 말했다

“혼자 있기 싫습니다.” 아저씨가 중얼거렸다.

우리는 복도에서 헤어져 사환이 지적해 준, 나란히 붙은 방 세 개에 각각 한 사람씩 들어갔다.

숙박계엔 거짓이름, 거짓 주소, 거짓 나이, 거짓 직업을 쓰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웠다.


다음 날 아침 안이 나를 깨웠다.,

“그 양반 역시 죽어버렸습니다.” 안이 내 귀에 입을 대고 속삭였다.

“예?” 나는 잠이 깨끗이 깨어버렸다.

“방금 그 방에 들어가 보았는데 역시 죽어버렸습니다.”

“역시...”나는 말했다.

“우린 빨리 도망해 버리는 게 시끄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자살이지요?

“물론 그것이겠죠.”

나는 급하게 옷을 주워 입었다. 개미 한 마리가 방바닥을 내 발이 있는 쪽으로 기어 오고 있었다. 그 개미가 내 발을 붙잡으려고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나는 얼른 자리를 옮겨 디디었다.

밖의 이른 아침에는 싸락눈이 내리고 있었다.

“난 그 사람이 죽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안이 말했다.

“난 짐작도 못했습니다.” 나는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난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합니까.”

안을 눈을 맞고 있는 어느 앙상한 가로수 밑에서 멈췄다. 나도 그를 따라 멈췄다.

그가 이상하다는 얼굴로 나에게 물었다.

“김형 우리는 분명히 스물다섯 살 짜리죠?”
“난 분명히 그렇습니다.”

“나도 그건 분명합니다.”

그는 고개를 한 번 갸웃했다.

“두려워집니다.”

“뭐가요?” 내가 물었다.

“그 뭔가가, 그러니까....” 그가 한숨 같은 음성으로 말했다.

“우리가 너무 늙어버린 것 같지 않습니까?”
“우린 이제 겨우 스물다섯 살입니다.” 나는 말했다.

“하여튼.....” 하고 그가 내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자 여기서 헤어집시다. 재미 많이 보세요.” 하고 나도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우리는 헤어졌다. 나는 마침 버스가 막 도착한 길 건너편의 버스 정류장으로 달려갔다. 버스에 올라서 창으로 내다보니 안은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내리는 눈을 맞으며 무언지 곰곰이 생각하고 서 있었다. (1965)


1964년 서울... 그리고 겨울의 풍경이 그려진다

사내가 자살하리라는 예측을 하면서도 방을 따로 잡는 것.

숙박부에 거짓 이름을 쓰고 일이 복잡해지기 전 서둘러 여관을 벗어나는 것.

그리고 눈을 맞고 있는 앙상한 가로수 아래서

"김형 우리는 분명히 스물다섯 살 짜리죠?”
그는 고개를 한 번 갸웃했다.

“두려워집니다.”

“뭐가요?” 내가 물었다.

“그 뭔가가, 그러니까....” 그가 한숨 같은 음성으로 말했다.

“우리가 너무 늙어버린 것 같지 않습니까?”
“우린 이제 겨우 스물다섯 살입니다.”


어떤 상황이 관통하고 지나간 스물다섯은

관통하기 전의 스물다섯과 다르다. ’ 안‘의 말처럼 이제 겨우 스물다섯인데 세상을 다 살아버린 것 같은 느낌.

아내의 시체를 팔아 손에 쥔 사천 원을 다 써버린 사내는 아내의 곁으로 갔다.

아마 거짓 숙박정보를 입력하였기에 사내 또한 신원미상으로 무연고 카데바가 될 수도 있겠다. 어쩌면 그리 처리해 달라는 유서가 사내의 곁에 남아있었을지도 모르겠단 상상을 잠시 해본다.


’ 안‘이 ’ 김‘에게 물었던 말

“김형, 꿈틀거리는 것을 사랑하십니까?”

“사랑하고말고요.”

2025년 대한민국에서.. 우리는 꿈틀거리는 것을 사랑하며 살고 있을까?

“사랑하고말고요.”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낮엔 그저 스쳐 지나가던 모든 것이 밤이 되면 자기들의 벌거벗은 몸을 송두리째 드러내놓고 쩔쩔매는 그런 밤에 '안'은 해방감을 느낀다고 했다.

지금은 ’ 밤‘이다.

하루의 끝. 해방감을 느끼는 시간이다.

’ 안‘의 모습에 ’나‘의 모습이 자꾸 겹쳐 보였다.

어떤 번거로움, 귀찮은 연결을 떨어 버리려는 이기적인 태도... 사내의 죽음 앞에서도...

월요일부터 갑자기 한파가 밀려왔다. 그리고 이제 서서히 봄의 기온을 찾아가고 있다.


우리가 너무 늙어버린 것 같지 않냐는 '안'의 물음처럼...

우리 안에서 꿈틀거리는 것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이 봄은 너무도 삭막하지 않을지... / 려원


<빨강 수집가의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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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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