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시작되면 대지에 구멍 하나를 파고 봉인시킨 나의 죄를..
정화
봄이 시작되면 나는 대지에
구멍 하나를 판다. 그리고 그 안에
겨울 동안 모아 온 것들을 넣는다
종이 뭉치들, 다시 읽고 싶지 않은
페이지들, 무의미한 말들,
생각의 파편들과 실수들을,
또한 헛간에 보관했던 것들도
그 안에 넣는다.
한 움큼의 햇빛과 함께, 땅 위에서 성장과
여정을 마무리한 것들을.
그런 다음 하늘에게, 바람에게,
충직한 나무들에게 나는 고백한다.
나의 죄를,
....
그러고 나서 그곳에 모여진
몸과 마음의 부스러기들 위로 구멍을 메운다.
그 어둠의 문을, 죽음이라는 것은 없는 대지를
다시 닫으며.
그 봉인 아래서 낡은 것이
새것으로 피어난다.
웬델 베리
봄이 되면 나도 대지에 구멍 하나를 깊게 파고 겨울 동안 모아 온 것들을 넣고 싶다.
종이 뭉치, 아무것도 아닌 끄적임들, 불안과 번민들, 무의미하게 뱉어버린 말들,
상투적인 것들, 생각의 파편들, 발설해서는 안될 것들, 부끄러움과 후회들을 넣어 봉인하고 싶다.
그리고 그 봉인을 묵인하던 나무 곁에서 고해성사를 하고 싶다.
하늘에게, 바람에게, 다가오는 봄에게 천천히 느릿느릿...
구멍 안에서 그 모든 것들이 대지로부터 ‘죄 사함’을 받고 정화된다면
꽃이 피리라.
꽃이 피어나고 말리라.
반드시....
입을 오므린 초록들
나무 아래 옹기종기 모여 앉은 초록의 침묵을 보았다.
초록의 선연한 핏줄기가 기필코 무슨 일을 벌이고 말 것 같은 그 봄날...
나무는 무심하게 그 초록 음모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런 표정 없이.
노란색 수선화가 피어났다. 구덩이에 묻어둔 것들이 대지의 죄 사함을 받고 피어난 꽃이다.
경이롭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청년 나르키소스와 샛노란 수선화의 모습을 연관 지어 보려 하지만 신화 속 이야기일 뿐... 실체에 와닿지는 않다.
봄이 이루어내는 것들을 바라본다.
묵묵히
한 걸음 한 걸음씩...
피어나는 봄꽃들은 누군가 구덩이를 파고 묻어둔 지난겨울의 이야기들이 아닐까.
봉인된 것. 대지의 죄 사함을 받고 거듭난 것.....
변덕스러운 날씨. 3월도 끝을 향해간다.
봄이 세상을 점령하는 속도. 연두로 노랑으로 물드는 봄의 속도.. 그 봄날의 속도가 두려운 날들.
어디로, 어떻게를 생각하는 밤이다./ 려
<빨강 수집가의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4/. 12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