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을 새워 글을 쓰고 있으면 원고지 속으로 진눈깨비가 내립니다/이외수/
< 3월 >
이외수
밤을 새워 글을 쓰고 있으면
원고지 속으로 진눈깨비가 내립니다
춘천에는 아직도 겨울이 머물러 있습니다
오늘은 꽃이라는 한 음절의 글자만
엽서에 적어 그대 머리맡으로 보냅니다
꽃이라는 글자를 자세히 들여다보신 적이 있나요
한글 중에 제일 꽃을 닮은 글자는
꽃이라는 글자 하나뿐이지요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 속에 가득 차 있는 햇빛 때문에
왠지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2022년 4월 이외수선생님의 소천
벌써 3년 차에 접어든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그의 아들은 “가족들이 모두 지키는 가운데 외롭지 않게 떠나셨어요. 마치 밀린 잠을 청하듯 평온하게 눈을 감으셨습니다”라고 페이스 북에 글을 남겼었다.
밀린 잠을 청하시듯, 너무 곤히 잠이 들어서 차마 깨울 수 없었다는 그의 마지막을 생각한다.
병마와의 투쟁 끝에 얻은 평안이었을까...
<들개>라는 소설을 읽고 전율이 일었던 기억이 난다.
어떤 서사보다 짧지만 강력한... 우연히 산책로에서 버려진 개들을 볼 때마다 ‘들개’ 생각이 나곤 했다.
그의 시 <3월>을 읽는 밤
밤을 새워 글을 쓰고 있으면 원고지 속으로 진눈깨비가 내리고... 그가 머무는 춘천에는 아직도 겨울이 머물러 있다. 꽃이라는 한 음절의 글자만 엽서에 적어 그대 머리맡으로 보내는 시간
한글 중에 제일 꽃을 닮은 글자는 '꽃'이라는 글자 하나뿐이라는 말에 ‘꽃’이란 글자를 찬찬히 들여다본다.
아닌 게 아니라 글자 자체가 한 송이 꽃이다.
뿌리와 줄기와 봉오리로 구성된 온전한 한 송이 '꽃'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 속에 가득 차 있는 햇빛 때문에 왠지 눈시울이 뜨거워진다는데.... 세상 살다 보면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때가 어디 한 두 번일까.
꽃 속에 가득 차 있는 햇빛들...
그 한 송이 피워내겠다고 견뎌온 혹한의 시간들, 눈물과 고통.... 인내 같은 것들...
순간의 개화를 위해 침묵한 것들. 기다림들, 시련들....
'꽃'이라는 글자 하나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쩐지 우리들의 '삶'같은 것이 들어있는 것만 같다.
3월 마지막 주.....
산불 소식에 온 나라가 불타는 것처럼 뒤숭숭하다.
까맣게 타버린 은행나무.... 사망자.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 사찰의 누각들, 폐허가 된 집들, 산속의 모든 동식물들, 소박한 꿈을 꾸며 옹기종기 살아가던 평범함이 한순간에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이제 3월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시인은 원고지 속으로 진눈깨비가 내린다고 하였는데....
불타는 대지 속으로 거센 비가 내려주기를 바란다.
희생, 눈물, 슬픔, 고통, 위로.... 2025년 우리의 3월이 찬란하지 않다.
스산하고 두렵고 불안한 우리의 3월............
꽃들은 아무 생각 없이 지천에 흐드러지게 필 터인데...
불이 지나간 자리........ 홀로 남은 이에겐 그 꽃마저도 고통으로 다가올 텐데....... /려원
<빨강 수집가의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4.12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