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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

내 유년의 봄날을 기억한다. 두부처럼 순정했던.

봄날,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

봄날

이진명


문방구점에 가고 싶다

백동전을 두 손에 모아 쥐고

발을 들어 올리며

저 횡단보도를 건너


자전거 지나가고 나서

머리를 두 갈래로 땋은 소녀들이 이르면

그 소녀들을 몇 발짝 앞세운 채

짐짓 뒤에서 늦게 문을 열고 싶다


비밀스럽게 지퍼가 채워진 필통을 골라

한 자루의 일용할 연필을 사 넣고

찰고무 지우개도 하나 사서

필통 모서리에 살짝 끼워 두고 싶다

점을 두 개나 찍어 틀렸을 때

얼른 꺼내 그 하나를 하얗게 지우리라


그러고는 백동전을 내고 싶다

큰 백동전 위에

작은 백동전을 하나씩 하나씩

머리를 두 갈래로 땋은 소녀들을 뒤로하고

먼저 문을 나서고 싶다

하늘빛이 셀로판지처럼 퍼지리라


큰길을 건너가지 않고

집집의 대문 앞을 지나

골목으로 해서 늦게 돌아오고 싶다

담 밖으로 조심 내려서고 있는 새 잎줄기를 보면

슬쩍슬쩍 당겨 주면서


시인이 봄날 가고 싶은 곳은 문방구점이다.

백동전을 두 손에 모아 쥐고 횡단보도를 건너, 자전거 지나가고 나서, 머리를 두 갈래로 땋은 소녀들 뒤로

짐짓 뒤에서 늦게 문을 열고 싶다.

비밀스럽게 지퍼가 채워진 필통, 한 자루의 연필, 지우개를 사서 필통 모서리에 살짝 끼워 두고 점을 두 개나 찍어 틀렸을 때 얼른 꺼내 그 하나를 하얗게 지우고 싶다.

큰 백동전 위에 작은 백동전을 하나씩 하나씩 내고 머리를 두 갈래로 땋은 소녀들을 뒤로하고 먼저 문을 나서면 하늘빛이 셀로판지처럼 퍼질 것이라고....

큰길로 가지 않고 골목길로 가서 집집의 대문 앞을 지날 때 담 밖으로 조심 내려서고 있는 새 잎줄기를 보면 슬쩍슬쩍 당겨 주면서


봄날 문방구점으로 가서 가장 기본적인 세 가지를 산다. 필통과 연필, 지우개...

연필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물이다. 연필로 쓴 글씨를 지우개로 지우고

비밀스러운 필통에 담아 지퍼를 잠근다.

주머니에서 짤랑거리는 경쾌한 동전소리를 들으며

문구점으로 가고.... 문구점에서 돌아오는 길...


문득 오래전 기억이 난다.
봄날이었다. 문구점이 아닌 두부를 파는 곳 (두부를 직접 만드는 곳)으로 심부름을 가던 내 유년의 봄날...

주머니에 동전을 넣고 개울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 길을 걷다 보면 아담한 두부 공장이 있었다. 공장이라기보다는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수제 두부 만드는 곳' 정도일 것이다.

가까이 갈수록 삶은 콩 냄새가 진하게 풍겨오고 유리문을 밀고 들어서면 문에 걸린 청동 종이 찰랑거린다.

뜨거운 김이 얼굴에 와닿을 때 쭈빗거리며 동전을 내밀고... 엄마가 담아 오라고 주신 작은 그릇을 내밀면

두부처럼 순한 인상의 아주머니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두부 두 모를 그릇에 담아준다.

뜨거운 두부를 가슴에 안고 돌아오는 길.

어린아이가 대단한 일을 한 것 같아 가슴 뿌듯하던 그 유년의 봄날 아침...


그 시절 먹었던 두부는 내 안에 들어와 내 몸의 일부가 되었으리라

두부처럼 순정하고

두부처럼 깨끗하게

두부처럼 보드랍게...

칼의 결에 따라 그대로 순명하는 두부처럼

맞서지 않고 겸허히 받아들이는 자의 모습으로 나는 살아왔을까....

아니리라.

아닐 것이다.

세상은 두부처럼 따뜻하지도 부드럽지도 순수하지도 않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세상에 맞서고 싶었다. 세상의 질서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세상의 닮아갔다.


시인의 <봄날>을 읽으며

이 봄날 다시 가야 할 곳이 있다면

그 햇살 찬란하던 날의 봄날, 개울물이 흐르던 길가에 있던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풍기던 두부공장....

그곳으로 가고 싶다.

주머니에서 짤랑거리는 동전 소리를 들으며

두부와 같은 순정한 세상을 꿈꾸며

마냥 해맑게, 근심도 걱정도 두려움도 불안도 없이... 그렇게...


4월이 지고 있다. 그렇게 힘들게 피고선 그렇게 쉽게 지는 꽃들을 본다.

붉은 철쭉의 시간이다. /려원


<빨강 수집가의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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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도서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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