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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우리가 길이라고 부르는 망설임..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기형도

그는 어디로 갔을까

너희 흘러가버린 기쁨들이여

한때 내 육체를 사용했던 이별들이여

찾지 말라,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

이제 해가 지고 길 위의 기억은 흐려졌으니

..........

어디선가 굶주린 구름들은 몰려왔다

......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돌아갈 수조차 없이

이제는 너무 멀리 떠내려온 이 길

구름들은 길을 터주지 않으면 곧 사라진다

눈을 감아도 보인다


어둠 속에서 중얼거린다

나를 찾지 말라..... 무책임한 탄식들이여

길 위에서 인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이여


유채꽃이 함석 담장에 기대어 피어있다. 해마다 그 자리에서 바락바락 외치는 듯 피어있는 유채꽃들을 본다. 샛노란 희망들, 살고 싶다는 희망, 살아야 한다는 절규 같은 흔들림을.

언젠가는 해체되고 말 좁은 길. 그런 길을 보면 어김없이 차를 멈추고 그 길을 걸어본다.

인근에서 아파트가 올라갈수록 길이 사라지는 시간은 빨라질 것이다.

머지않아 그곳에 샛노란 유채꽃이 피어있었다는 흔적조차 없이.. 땅 속 깊숙이 뿌리내린 기억조차 없이.. 모든 것이 콘크리트로 뒤덮일 것이다.



길 위를 달렸다.

벚꽃이 만개한 길을 달릴 때는 오래전 시엄마를 모시고 암전문 병원을 향해 가던 그때 생각이 난다. 췌장암이라는 그 무시무시한 명칭을 확인하러 가는 길.... 시엄마는 뒷 좌석에서 묵주기도를 하고 계셨다. 운전을 하면서 백미러로 그녀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묵주기도.... 간절함........

이 길이 이름 없던 병의 ‘이름’을 확인하는 길이라는 사실이 서글펐다.

하릴없이 벚꽃 잎이 초속 5cm 속도로 떨어지며 차창을 두드릴 때 이 길이 ‘봄 나들이 길'이길 바랐다.

시엄마가 모처럼 꺼내 입은 꽃무늬 재킷...... 오래도록 옷장 안에 텍도 제거하지 않고 두었던 그 옷을 꺼내 입고 우리가 가는 곳은 암 전문 병원.......

그래서일까... 벚꽃이 눈처럼 날리는 길을 달릴 때면 오래전 그날이 생각나곤 한다.

부질없음과 덧없음을 연상시키는 그 새하얀 군무, 꽃잎이 흩날리는 것이 차가운 눈송이처럼 여겨지던 봄날이었다.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돌아갈 수조차 없이

이제는 너무 멀리 떠내려온 이 길


그녀는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돌아올 수조차 없이

너무도 멀리... 꽃비 맞으며 떠나간 길...


차를 세우고 함석판에 위태롭게 기대어 핀 유채꽃을 바라본다.

그 샛노랑이 눈부시다.

반드시, 언젠가는 사라지고 말 그 길 위에서 이 봄도 끄덕 없이 피어있다.

찬란하다고 해야 할까, 대견하다고 해야 할까

걸맞은 동사를 찾느라 한참을 궁싯거렸다.

그 좁은 길로 차들이 달릴 때마다 샛노란 유채꽃들이 일제히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웃음으로 가득 찬 율동


커다란 나무 한 그루 서 있다

해 질 녘... 황톳길... 어둠이 내리고 있다.

사람들은 모두 제 갈 길을 갔다.

적요가 감도는 곳... 흙빛 길 위로 흙빛 그리움이 쌓인다.


찾지 말라,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

이제 해가 지고 길 위의 기억은 흐려졌으니....

....

어둠 속에서 중얼거린다

나를 찾지 말라..... 무책임한 탄식들이여

길 위에서 인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이여


저 길을 걸어간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길 위에서 인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을 탐하느라 고단하였을까... 곧 무너질 것들만.... 무너지고 말 것들만 그리워하느라 그의 가슴도 무너져 내리고 말았을까...


길 위에 서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 선종 소식을 듣고 제일 먼저 떠올린 것은 솔뫼성지 방문 때의 사진 한 장이었다.

2014년이었다. 교황님이 김대건 신부님 생가를 찾아 나무 의자에 앉아 묵상하던 모습이 담긴 사진... 가장 한국적이면서 가장 종교적인... 거룩하면서 슬픈 사진 한 장

작은 나무 의자에 앉아 묵상하던 교황님은 그로부터 11년 뒤 다시 말하면 2025년 봄날

자신이 세상에 없으리란 사실을 알 수 있었을까.... 죽음을 예견할 수는 없으리라.

교황님은 이제 어느 길을 걷고 계실까..... 이곳과는 다른 길. 건너올 수 없는 길.....


<빨강 수집가의 시간> 제1부 빨강의 기억 / 우리가 길이라고 부르는 망설임 P 77~

이제는 길을 잃고 싶지 않다. 우리가 길이라고 부르는 그 망설임 앞에 머뭇거리고 싶지 않다.


나는 어느 길 위에 서서 중얼거리고 있는 것일까.

봄길인가... 한겨울 빙판길인가... 낙엽의 길인가...

새벽녘일까, 정오일까, 해 질 무렵일까... 한 밤중일까

11년 뒤의 나를 상상하는 일은 조금 두렵다.

짧은 시간일 것 같으면서도 먼 미래일 것 같은...

상념이 많아진다. 봄의 밤에는.

인간이란 늘 그런 존재가 아닌가?

길 위에서 서성이고

길 위에서 중얼거리고

길 위에서 희로애락을 다 경험하고 마는

또 4월의 밤 하나가 떨어지고 있다.

길을 생각한다. 어둠이 내려앉은 함석판 옆 샛노란 유채꽃들의 밤을 생각한다

사라지고 말 인연들을....... / 려원


<빨강 수집가의 시간> / 수필과 비평사/려원산문집/ 2024.12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2022

2022 아르코문학 나눔 우수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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