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우리를 변신시킨다는 것..... 그것이 인생이라는 것인가....
경험을 위해서는 행동하는 주체의 활동성에서 벗어나 있는 무언가의 다가옴을 허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사물이든, 인간이든, 신이든, 어떤 것과 경험을 한다는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일어나고, 우리를 맞히고, 우리를 덮치고, 우리를 뒤집어버리고 우리를 변신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 하이데거
신화의 힘 제8강 <영원의 가면>
신화의 이미지는 우리 모두의 영적 잠재력을 반영하고 있다..
바로 이 신화 이미지를 명상함은 우리 내부에 있는 잠재력을 촉발하는 것이다.
삶에서 무언가를 결정해야 할 때 우리 마음속에서도 전쟁이 일어난다.
우리가 내릴 가능성이 있는 결정은 네댓 가지나 되는데 마음속에 있는 가장 힘센 신의 영향력이 결정을 주도한다. 결국 그 힘센 신이 잔인하다면 결정은 잔인한 결정일 것이다.
기도는 신비에게 말을 걸고 명상하는 행위.
가톨릭 교회에서 묵주를 굴리면서 같은 기도를 여러 번 되풀이하는 명상법이 있는데 이렇게 하면 마음이 한 곳에 모이게 된다. 이런 방식의 기도를 산스크리트어로 ‘자파(japa)’ 즉 '거룩한 이름을 되풀이해서 부름‘이라는 뜻이다. 한 가지에 정신을 집중시키면 상상력에 따라 갖가지 차원의 신비 체험이 가능해질 수 있다.
종교 (religion)라는 말은 렐리기오( religio) 즉 ’ 뒤로 연결됨‘을 의미
둘이서 나누어 사는 하나의 삶이 있다면 내가 사는 조각난 삶은 한 삶과 연결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 렐리기오‘되어있는 것이다.
분석 심리학자 융은 종교의 상징 중에서 가장 강력한 상징은 ’ 원‘이라고 했다.
세계에 있는 원꼴의 둥근 이미지는 모두 인간의 정신을 상징한다.
마술사는 마술을 시작하기 전에 자기 주위에 원을 하나 그리는데 그의 마술은 이 원, 신비스럽게도 성화된 영역에서만 가능하다. 천막을 칠 때도 원형으로 독수리가 둥우리를 지을 때도 원 모양으로 짓는다. 수메르 신화에서 기본 사방과 360도의 방위각이 들어있는 원을 물려받았다.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날마다 '라'를 만들며 걷는 사람들 p 162~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시간을 원의 상징과 관련시켜 생각하는 감각을 잃어버렸다.
우리에게는 째깍거리면서 그저 그렇게 지나버리는 디지털 시간이 있을 뿐이다. 디지털 시간에서 벗어나야 우리는 진정으로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있다.
원은 한편으로는 전체성을 상징하기도 한다. 원 안에 들어있는 것은 모두 원으로 둘러싸여 있다. 원이라는 공간의 프레임, 원에는 시간적인 측면도 들어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어딘가로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듯 원도 그러하다. 따라서 원은 바로 시간의 장과 공간의 장에서 완결된 완전성을 상징한다.
자궁(womb)과 무덤(tomb)의 신비도 원의 보편적인 상징과 관련 있다.
시신을 매장하는 것은 재생을 위한 준비 작업이라 할 수 있는데 고대 여신의 이미지를 보면 여신이 죽은 자의 영혼을 다시 받아들이는 어머니로 그려져 있다.
결혼반지, 왕이나 여왕의 즉위 때 받는 대관반지도 모두 원형이다. 결혼반지는 하나의 반쪽과 또 하나의 반쪽이 서로 엮이어 하나가 된다는 의미. 원 안에서 하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새 교황이 취임하면 어부의 반지를 끼는데 종교라는 낚싯줄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는 의미.
대관반지는 굴레를 상징하는데 왕이 되었으니 원칙이라는 굴레 속으로 들어가라는 의미다.
성배 전설에 따르면 바다의 신들 집에 가마솥이 많다는 대목이 있는데, 바다의 신들의 집은 우리의 심층 무의식을 말한다. 우리 삶의 에너지는 바로 이 무의식의 심층에서 솟아오르므로 가마솥은 무궁무진한 근원, 중심, 부글부글 끓고 있는 셈이다. 우리 삶은 어디에선가 쉴 새 없이 솟아오르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세상으로 끊임없이 생명을 내어 보내는 곳, 이곳이 바로 무궁무진한 에너지의 근원이다.
엘리엇은 변전하는 세계의 고요한 중심 이야기를 하는데 이 고요한 중심에서는 움직임과 움직이지 않음이 함께 있다. 시간의 흐름과 영원의 흐르지 않음이 공존하는 바퀴의 굴대.
삶의 시작에는 두려움도 없고 욕망도 없다. 그냥 시작될 뿐이다. 그러다 존재하게 되니까 여기에서 두려움과 욕망이 시작된다.
우리 내부의 발화점은 존재의 모습이 확정되기 전의 상태이기 때문에 세상의 선악과도 무관하고 공포도 없고 욕망도 없는 순수무구한 점이라 할 수 있다. 죽음의 두려움을 모르는 채 용감하게 전장으로 달려 나가는 병사의 마음이 바로 이 한 점의 상태와 같다. 끊임 생성되는 삶의 모습이다.
어떤 사고 체계를 지닌 사람에게든 사고 체계 자체가 무한한 삶의 의미일 수는 없다. 게르만 신화와 켈트 신화에는 광대 이미지가 굉장히 많이 등장하는데 광대 이미지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봐라. 나는 궁극적인 이미지가 아니다. 나는 투명해서 속이 들여다 보인다. 나를 통해서 보라. 나의 이 우스꽝스러운 형상을 통해서 봐라.”이다.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제3부 얼굴들은 서로 다른 이를 향하고 있다 P 187
시간이 있는 데엔 슬픔이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이 슬픔은 우리의 온 존재를 뒤덮고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삶의 참모습이다
쇼펜하우서 <개인의 운명에서의 명백한 의지에 대하여>
어떤 사람이, 나이를 먹고 지나온 세월을 돌이켜보면 자기 인생이 누군가의 명령과 계획에 의해 끊임없이 수정되어 온 것 같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경우가 있다. 말하자면 어떤 소설가에 의해 쓰인 소설 같다는 느낌을 받는 것. 이렇게 놓고 보면 인생을 살면서 당한 중요한 사건은 외견상으로는 우연히 일어난 것 같지만 사실은 일관된 구상에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 듯 보인다.
그렇다면 이 일관된 구성은 누구의 손에 의해 이루어지는가? 쇼펜하우어의 생각은
우리 인생도 우리 안에 있되 우리는 잘 알지 못하는 어떤 의지에 의해 구성되고 계획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모르는 중에 만사가 만사의 구조를 결정함으로써 인생의 만사는 하나의 교향악단처럼 아귀가 맞아 들어간다.
우주의 의지라고 할 수 있는 한 개인 의지의 동기 부여에 따라 만사와 만사가 빈틈없이 연결되는 것.
<글>
-옥따비오 빠스-
어느 고적한 시간
종이에 붓이 글을 쓸 때, 누가 그 붓을 움직이나?
나를 대신해 글을 쓰는 사람은 누구에게 쓰나?
입술과 꿈으로 얼룩진 해변,
조용한 언덕, 좁은 항만,
세상을 영원히 잊기 위해 돌아선 등허리.
누군가 내 속에서 글을 쓰는 사람이 있다.
내 손을 움직이고 말을 고르고 잠깐 멈춰 주저하고
푸른 바다일까 파란 산등성이일까 생각하면서
차가운 불길로
내가 쓰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모든 것을 불태운다, 정의의 불
그러나 재판관도 역시 희생자일 수밖에 없다.
나를 벌한다는 것이 재판관 스스로를 벌하는 일
실은 이 글은 아무에게 쓰는 것도 아니다,
아무도 부르지 않고 자기 스스로를 위해 쓴다,
자기 자신 속에 스스로를 잊는다,
이윽고 뭔가 살아남을 것이 있으면
그건 다시 나 자신이 된다.
나의 시는 나의 망각이거나 죽음이다. 그것이 독자에게 전달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의 부활이다. - 옥따비오 빠스의 말
< 개인의 운명애서의 명백한 의지에 대하여>
어떤 사람이, 나이를 먹고 지나온 세월을 돌이켜보면 자기 인생이 누군가의 명령과 계획에 의해 끊임없이 수정되어 온 것 같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경우가 있다. 말하자면 어떤 소설가에 의해 쓰인 소설 같다는 느낌을 받는 것.... 쇼펜하우어의 말에 공감이 갈 때가 있다.
내 인생인데 마치 연극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분명 내 의도이자 내 선택인 듯싶으면서도
내 의도가 아니고 내 선택도 아닌 것 같은 이율배반적인 감정에 휩싸일 때
이건 아니지 않으냐고 따지고 싶으면서도 그냥 그 상황에 휩쓸려 들어갈 때...
휩쓸려 들어가며 절망하면서도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무심한 낙천주의자 같은 생각을 할 때...
삶에 슬픔이 잠복되어 있는 것은 유한하기 때문이다.
인생 무대에서 나는 벌써 몇 번째 배역을 맡은 것일까....
원하든 원하지 않든......
바라는 것이 있다면 감정에 매몰되지 않는 사람으로 남는 것.
정신의 균형을 가지고 어떤 배역을 맡든 그 배역을 견뎌내는 것...
강해지고 싶었다.
순응하고 순종하고 길들여지는 것은 나의 성향에 맞지 않는다.
인생 무대에서
어울리지 않는 배역, 혹은 어쩌다 어울리는 배역을 맡았다 하더라도
내 심장 안에는 아직 죽지 않은 꿈틀거림이 있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자판을 두드리는 나의 손가락의 움직임마저도 통제하고 있다 하더라도
내 의식을, 내 인생의 방향을 지시하고 있다 하더라도
나는 붉은 심장의 언어를 따라 살아가고 싶다.
벌써 5월도 종반을 향해간다. 슬로 리딩으로 읽었던 조셉 캡벨의 < 신화의 힘>을 완독 했다.
분주했던 봄날이 가고... 붉은 심장 같은 장미의 계절이다.
아직 불이 꺼지지 않은 인생 무대에서....
언제 무대의 불이 꺼질지 모르지만........
주어진.... 유한한.... 시간에 충실하기로 / 려원
<빨강 수집가의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4.12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