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마음이 건천이 된 지 오래인 날, 문득 짐을 싸서 가고

싶은 길 하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려니 숲길 / 도종환


어제도 사막 모래언덕을 넘었구나 싶은 날

내 말을 가만히 웃으며 들어주는 이와

오래 걷고 싶은 길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

이제 그만 초록으로 돌아오라고 우리를 부르는

산길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것들을 주체하기 어려운 날

마음도 건천이 된 지 오래인 날

.....

나도 그대도 단풍 드는 날 오리라는 걸

받아들이게 하는 가을 서어나무 길

....

문득 짐을 싸서 그곳으로 가고 싶은

길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한라산 중산간

신역(神域)으로 뻗어 있는 사려니 숲길 같은

20250504_103931 (1).jpg

5월은 숲의 계절이다. 온통 초록의 절정에 오른 듯한 봄...

그 초록에 눈이 부시다.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판타레이’(panta rhei) : 모든 것은 흘러간다.‘고 이야기했다.

물도 사람도 사랑도 시간도 나무도 풀도... 모두 한데 초록으로 뒤엉켜 흘러가는 5월.

마음이 사막으로 가득 찬 날은 온통 숲 생각이 간절하다.....

오전에 잠깐 산책을 했고... 수업에 올 아이들의 수업 내용을 확인하고... 간간이 창문으로 비치는 하늘을 보았다. 웬일인지 심란한 마음이 들었다. 문득 짐을 싸서 숲으로 떠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맞은편 피아노 교실에선 아이들의 어설픈 연주소리가 들려온다.

미술, 바둑, 영어, 수학.... 등등을 찾아 아이들이 움직인다. 쉼 없는 재잘거림 속에....

숲 한가운데 앉아 그 발소리들을 가만가만 듣고 있었다.

수업이 끝난 후에는 성당에 들렀다. 신부님의 저녁 성경 강의가 있는 날, 30분이나 일찍 출발하여 지하 강의실, 십자고상과 램브란트의 <돌아온 탕자> 그림을 바라보았다.

묵상이라고 보기엔 미숙한 묵상이지만 멍 때리듯... 십자가를 바라본다. 계단을 내려오는 발걸음 소리들... 의자에 앉는 소리... 성경책 넘기는 소리들...

20250529_103142.jpg

매주 수요일 저녁... 성당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한라산 중간산 신역으로 가는 사려니 숲길로 향하는 발걸음과 같다. 적어도 내게는..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것들을 주체하기 어려운 날

마음도 건천이 된 지 오래인 날

이제 그만 초록으로 돌아오라고 우리를 부르는

산길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산길 하나 품고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20250504_103923.jpg

일본에 있는 아오키가하라(Aokigahara) 숲은 하늘을 향해 높이 솟은 나무들이 빼곡하게 자리 잡아 '수해(樹海 : 나무들의 바다)'라 하고, 일본어로 주카이(じゅかい),라고도 불리며 제일 유명한 이름은 ‘자살의 숲(自殺の森, Suicide Forest)’, ‘죽음의 숲’이다.

일본 혼슈지방의 야마나시현(山梨県) 후지산 북서쪽 기슭에 위치하는데 화산암 지형으로 형성된 깊은 숲으로 나침반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다. 후지산이 분출하면서 생긴 용암지대 위에 형성된 숲이라 동굴도 많고 빽빽이 나무들이 우거져있어 울림이 적다고 한다. 지형이 복잡하여 길을 잃기 쉽다.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에도 불구하고, 자살과 관련된 슬픈 이야기를 지니고 있는데

마츠모토 세이초(松本清張)의 소설 『파도의 탑(波の塔)』 (1960년대 출간): 등장인물이 아오키가하라에서 자살하는 장면이 등장하면서 자살 명소로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실제로 1965년 이후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는데 2000년대 초반에는 매년 50~100구 이상의 시신이 발견되었다고 알려졌다. 2003년에는 사상 최고치인 105건의 자살 사례가 보고됐으며, 이후 일본 정부는 통계를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고...

오랫동안 미신과 관련된 장소로 특히, ‘우바스테야마(姥捨て山, 노인을 버리는 산)’ 전설과 관련이 있는데 과거 일본에서는 가난한 집안이 입을 줄이기 위해 노인을 깊은 산속에 버렸다는 설이 있으며, 아오키가하라 역시 그런 장소 중 하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오키가하라>

외로움이란 자꾸 발견되는 이상 기후

나는 지금부터 나를 고백하는 것으로

숲에 도달할 수 있다.

....

녹아버린 빙하처럼

외로움은 누군가가 주목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

나는 선풍기로 외로운, 혼자인, 함께는 불가능한 스스로를 견뎌낸다 곧이어 풀과 꽃을 기록했다

푸르다, 푸른 것이다 나무는 나무라는 이름으로 죽어간다

아직 나 살아있어요, 하고서

- 이지우


외로움이란 마음의 이상 기후 같은 것이다. 지금부터 나를 고백함으로써 숲에 도달할 수 있다.

시인은 외로움에 대한 해결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스스로에게 하는 고해성사.

세상에는 끝내 ‘더불어’ ‘함께’가 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불가능한 모든 것을 스스로 견뎌내는 일. 어쩌면 우리는 날마다 ‘아오키가하라’ 숲의 경계를 더듬고 살아가는지 모른다.

나침반을 가지고 들어가도 길을 잃어버린다는 말이 사실인지 그 숲에 가보지 않아서 확인할 수 없지만

빽빽한 삼림과 올망졸망한 동굴.... 그 길이 그 길 같은 숲이라면....

아무리 나침반이 있더라도 길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숲길을 걸으며 저마다 마음 어딘가에 자리 잡은 ‘아오키가하라’를 생각했다.

때로는 의도적으로 길을 잃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드는 날도 있으니까.

길을 잃은 곳이 도시의 시멘트 바닥이 아니라

숲.... 나무들이 우거진 흙길이라면......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20250529_093046.jpg

시간이 참 빠르게 간다.

20250529_103142.jpg

이번 주가 지나면 다시 달력 한 장을 넘겨야 한다.

나무는 나무라는 이름으로 푸르고

나무는 나무라는 이름으로 죽어간다

그러하다면

나는 감히 무엇으로 푸르고

나는 감히 무엇으로 죽어갈 수 있을까. /려원


<빨강 수집가의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4.12


20241226_170735.jpg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2022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

20240814_093321.jpg


keyword
작가의 이전글우리에게 일어나고, 맞히고, 덮치고, 뒤집어버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