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워 깃털처럼 가벼웠고, 불확실하여 납처럼 무거웠던 그 시간에
형태가 잡히지 않은 채 우리 앞에 놓여 있던 그 열린 시간에 우린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무엇을 해야 했을까, 자유로워 깃털처럼 가벼웠고, 불확실하여 납처럼 무거웠던 그 시간에.
과거는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갔으나 미래는 아직 시작되기 전이었던 그 순간의 학교 운동장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때 시간은 머뭇거리며 숨을 멈추고 있었다. 그 뒤로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던 일..... 지금의 내가 아닌,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었던 그 시절로 다시 가고 싶은- 꿈과 같이 격정적인- 갈망인가.
이 갈망은 약간 이상하고 역설의 냄새가 나며, 논리적으로 독특하다. 아직 미래를 경험하지 않은, 생의 갈림길에 서 있는 사람은 이런 갈망이 없기 때문이다. 이미 지나온 그래서 과거가 되어버린 미래를 겪은 사람이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돌이키기 위해 옛날로 돌아가길 원한다. / 파스칼 메르시아 <리스본행 야간열차> 중에서
누구나 돌아가고 싶은 시기가 있다.
자유로웠기에 깃털처럼 가벼웠지만
불확실하였기에 납처럼 무거웠던 그 시간이 누구에게나 있었으리라
자유로움과 불확실성이 주는 두려움
아마도 이 두 가지는 살아가는 내내 우리를 동요시킨다.
이미 지나온, 그래서 과거가 되어버린 미래를 겪은 우리들...
나는 어느 시기로 돌아가고 싶은 것일까. 하얀 상의에 남색 플리츠스커트 교복을 입던 시절로..... 그 교실은 질식할 것 같았던 중압감을 주었지만 ‘꿈’을 만들어내는 (찍어내는) 공장 같은 곳이기도 했다. 네모난 교실에서 자유를 갈망했지만 사실은 그 네모에 길들여지는 것이 어쩌면 더 나은 인생을 가져다주었을까 생각해보곤 한다. 그러면 나는 지금, 다른 길에 서 있을 테니까.
내가 ‘나’라고 부를 수 있는 지금의 모습이 아닌 내 안의 전혀 다른 것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또 다른 ‘나’를 만날 수 있을 테니까
그 안에서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아직 인생의 틀에 짓눌리기 전이었으니까... 무엇이든....
지금의 나와는 다른 또 다른 ‘나’로... 이상한 갈망을 하는 밤이다.
소리 없는 우아함, 익숙한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이 격렬한 내적 동요를 동반하는 요란하고 시끄러운 드라마일 것이라는 생각은 오류다... 인생의 경험을 결정하는 드라마는 사실 믿을 수 없을 만큼 조용할 때가 많다.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고 인생에 완전히 새로운 빛과 멜로디를 부여하는 경험음 소리 없이 이루어진다. 이 아름다운 무음에 특별한 우아함이 있다. /파스칼 메르시아 <리스본행 야간열차> 중에서
우리의 인생을 바꾸는 것은 소리 없는 우아함일까?
격렬한 사건이 아닌??
사소함이 축적된 일상... 그것이 곧 인생이 되어버린다.
니체는 ‘자신이라는 인간을 체험하는 것이 바로 인생이다.’라고 이야기했다.
내 안의 나를 체험하는 과정.
낱낱이 펼쳐두고 해부하고 분석하고 다시 뭉쳐보고... 수많은 형태의 나를 체험하는 과정.
여전히 나는 나를 체험하는 중이다.
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이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영혼의 그림자, 사람들이 어떤 한 사람에 대해 하는 말과 한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 하는 말 가운데 어떤 말이 더 진실에 가까울까? 다른 사람에 대해 하는 말이 스스로에 대해 하는 말처럼 확실한가? 스스로의 말이라는 것이 맞기는 할까? 자기 자신에 대해 사람들은 신빙성이 있을까?... 다른 사람의 내면을 이해하기 위해 길을 떠날 때는? 이 여행이 언젠가 끝이 나기는 할까? 영혼은 사실이 있는 장소인가, 아니면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우리 이야기의 거짓 그림자에 불과한가? /파스칼 메르시아 <리스본행 야간열차> 중에서
사람의 눈은 카메라의 렌즈와 비슷한 역할을 하지만 렌즈처럼 앵글에 비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투과시키지는 않는다. 석양에 물든 산자락을 바라볼 때도 자연의 풍광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다. 본인 스스로는 마음을 비우고 본다 생각할지라도, 실상은 바라보는 대상 위에 영혼의 얇은 막을 무의식적으로 덮어 씌운다. 그 얇은 막이란 어느 사이엔가 성격이 되어버린 습관적인 감각, 찰나의 기분, 다양한 기억의 편린들이다. 풍경 위에 이러한 막을 얹고, 막 너머를 희미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즉 인간이 바라보는 세계란 이미 그 사람의 일부이다. ‘인식한다’는 것은 결국 모든 것을 자기 방식대로 이해하고 포장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 니체의 말, 생성의 무죄 -
실망이라는 향유, 실망은 불행이라고 간주되지만, 이는 분별없는 선입견일 뿐이다. 실망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무엇을 기대하고 원했는지 어떻게 발견할 수 있으랴? 또한 이런 발견 없이 자기 인식의 근본을 어떻게 알 수 있으랴? 그러니 실망이 없이 자기 자신에 대한 명확함을 어떻게 얻을 수 있으랴?
그러므로 우리는 실망을, 없으면 우리 인생에 더 도움이 되는 것이라 생각하고 한숨을 지으며 할 수 없이 견뎌야 하는 그 무엇이라고 취급해서는 안 된다. 우린 실망을 찾고 추적하며 수집해야 한다.
“뭘 기대하는 겁니까?”
그들은 대답하지 못한다. 이들은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기대, 실망할 수도 있는 기대를 오랫동안 품고 다녔다는 사실에 놀란다.
자신에 대해 정말 알고 싶은 사람은 쉬지 말고 광신적으로 실망을 수집해야 한다. 실망스러운 경험의 수집이란 중독과도 같을 것이다. 삶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중독. 그에게는 실망이 뜨겁게 파괴되는 독이 아니라 서늘하게 긴장을 풀어주는 향유임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우리 스스로의 진정한 윤곽이 무엇인지 눈을 뜨게 해주는 향유...
그에게는 다른 사람이나 상황에 대한 실망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실망이 스스로를 향한 길잡이라고 인식한 사람은, 없는 용기와 모자라는 성실함 또는 자신의 감각과 행동과 말에서 끔찍하도록 좁은 한계들 스스로에 대한 실망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아내기 위해 온 힘을 쏟는다. 우리가 우리에게서 바라고 기대했던 것은 무엇이었나? 우리에게 한계가 없다는 것? 아니면 우리가 사실은 아주 다른 사람이었다는 것?
기대를 줄임으로써 더 현실적이 되고 단단하고 신뢰할 만한 본질만 남아 실망의 고통에 맞서는 저항력을 지니게 되리라는 희망을 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포괄적이고 원대한 기대를 금지하고, 버스의 도착 여부와 같은 무의미한 기대만이 존재하는 삶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파스칼 메르시아 <리스본행 야간열차> 중에서
자신에 대해 정말 알고 싶은 사람은 쉬지 말고 광신적으로 실망을 수집해야 한다. 실망스러운 경험의 수집이란 중독과도 같을 것이다. 삶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중독
실망 수집가가 되라는 말은 사실 받아들이기 어렵다.
실망스러운 경험을 수집하고 그 수집의 결과 우리 스스로의 진정한 윤곽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지만 우리의 진정한 윤곽을 확인하기도 전에 대부분의 우리는 실망 앞에 무너진다.
기대를 줄이고 더 현실적인 사람이 되면 실망의 횟수가 줄어들 수도 있겠지만...
기대를 줄일 수는 있어도 기대를 없앨 수는 없는 인생에서 우리는 늘 실망하고 무너질 수밖에 없다.
무언가로 채우기 위해 헤매고 있다. 결핍과 허기를...
습하면서 무더운.... 그러면서도 서늘한... 5월의 날씨다
지천이 초록이다. 흐드러진 초록들은 광신적으로 실망을 수집한 결과물이라 할 수 있을까?
끝없이 번져나가는 맹렬한 초록을 생각하는 밤.
형태가 잡히지 않은 채 우리 앞에 놓여 있던 그 열린 시간에 우린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무엇을 해야 했을까, 자유로워 깃털처럼 가벼웠고, 불확실하여 납처럼 무거웠던 그 시간을 떠올린다. /려원
<빨강 수집가의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4/12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