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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거기엔 축적이 있다. 책임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너머에 혼란이

우리의 기억은, 아니 우리가 기억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은 얼마나 자주 우리를 기만하고 농락하는가. 그런 기억에 의존해 진리를 만들어가는 우리의 이성이란 얼마나 얄팍하고 안이한가.


거기엔 축적이 있다. 책임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너머에, 혼란이 있다. 거대한 혼란이.


누구나 그렇게 간단히 짐작하면서 살아가지 않는가. 예를 들면, 기억이란 사건과 시간을 합친 것과 동등하다고. 그러나 그것은 그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기이하다. 기억은 우리가 잊어버렸다고 생각한 것이라고 말한 사람이 누구였더라. 또한 시간이 정착제 역할을 하는 게 아니라, 용해제에 가깝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백히 알아야만 한다.

시간이란... 처음에는 멍석을 깔아줬다가 다음 순간 우리의 무릎을 꺾는다. 자신이 성숙했다고 생각했을 때 우리는 그저 무탈했을 뿐이었다. 우리가 현실주의라 칭한 것은 결구 삶에 맞서기보다는 회피하는 법에 지나지 않았다. 시간이란... 우리에게 넉넉한 시간이 주어지면, 결국 최대한의 든든한 지원을 받았던 우리의 결정은 갈피를 못 잡게 되고 확실했던 것들은 종잡을 수 없어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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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줄리언 반스의 장편소설로, 2011년 맨부커상 수상작이다. 「인디펜던트」, 「타임스」 등 영미권 주요 매체들과 평론가들은 기억과 윤리의 '심리 스릴러'라는 말을 썼다. 독자를 몰아치는 힘과 서스펜스, 섬세하고 정교한 구성력 때문이다. 불완전하고 믿을 수 없는 1인칭 화자의 시점에 의존하여 인간의 기억과 시점의 왜곡을 탐색하고, 마침내 진실이 모습을 드러낼 때 묵직한 울림을 전한다는 점에서다.

역사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교사의 질문에 에이드리언이 라그랑주를 인용해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라고 대답하는 지점에서 작가의 성찰은 시작된다.


이 책의 첫 페이지는 이렇게 시작한다.

특별한 순서 없이, 기억이 떠오른다. 반들반들한 손목 안쪽

뜨거운 프라이팬이 젖은 싱크대로 아무렇지도 않게 던져지면서 솟아오르는 증기.

방울방울 떨어져 수챗구멍 속을 빙글빙글 돌다가, 층고 높은 집의 기다란 홈통 전체를 타고 흘러내려가는 정액.

터무니없게도 상류로 치닫는 강물. 그 물살과 너울을 좇는 여섯 개의 회중전등.

또 다른 강, 거센 바람이 수면에 물살을 일으켜 물길을 읽을 수 없는 드넓은 잿빛 강.

잠긴 문 뒤의, 오래전에 차갑게 식은 목욕물.

마지막 것은 내 눈으로 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결국 기억하게 되는 것은, 실제로 본 것과 언제나 똑같지 않은 법이다.

우리는 시간 속에 산다. 시간은 우리를 붙들어, 우리에게 형태를 부여한다. 그러나 시간을 정말로 잘 안다고 느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시간에 박차를 가하는 감정이 있고, 한편으로는 그것을 더디게 하는 감정이 있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란 제목은 한국에서 통용되는 제목이고 원제는 『The Sense of An Ending』이다. 인간이 저지르는 기억의 왜곡에 관한 처절한 반성적 사유를 주제 삼은 작품이다.


토니는 런던에서 작은 카메라 상점 ‘Leica Sales & Repair’을 운영하는 영국인 남성이다. 20대 시절의 옛 연인 베로니카가 어머니 사라의 유품 전달을 반대하면서 토니와 베로니카 사이에 갈등이 시작된다. 수소문 끝에 어렵사리 재회한 베로니카는 “일기장을 이미 태워버렸다”라고 한다. 그 과정에서 토니는 사라가 남긴 일기장이 사라의 일기장이 아니라, 오래전 자살했던 친구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 옛 친구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을 왜 베로니카의 어머니 사라가 갖고 있었던 것일까?


‘토니, 나는 토니가 이 편지에 첨부한 것을 꼭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 에이드리언은 토니 얘길 할 땐 늘 애정을 담아 말했었지. 토니가 보면 재미있을지도 몰라. 옛날 일 때문에 가슴이 아플 수도 있고, 그리고 얼마 안 되는 액수이지만 토니 앞으로 남겼어. 토니는 이상하다고 생각할 법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어쨌건 그때 그 시절, 나와 우리 가족들이 토니에게 잘못 대했던 것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어. 앞으로 토니가 하는 모든 일이 잘되기를 저세상에 가서도 기원할게. 사라 포드 씀. 추신,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세상을 떠나기 전에 보낸 마지막 몇 달 동안 에이드리언은 행복했다고 생각해.‘



10대 시절, 토니와 에이드리언은 절친한 친구였다. 에이드리언은 이 세상이 얼마나 비논리적 사고로 가득한지, 사람이 기술한 역사란 얼마나 불충분한 가설인지를 고민하며 10대를 보냈다. 베로니카와 사귀던 토니는, 에이드리언에게 베로니카를 소개했는데 에이드리언에게 “네 여자친구 베로니카와 사귀게 되었다”는 편지를 받게 된다.


오랜 시간이 흘러 노인이 된 토니는, 그 시절 자신이 두 사람에게 ‘열애 사실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쿨’한 답장을 보냈다고 기억하지만 토니의 편지를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에이드리언은 욕조에서 자살한다.

노인 토니는 ‘옛 친구 에이드리언이 자살했다’는 팩트만 기억할 뿐, 자신이 보낸 편지 속 내용까지 망각하고 살아왔다. 의문스러운 한 권짜리 일기장, 자살한 에이드리언. 자신을 배신했던 여자친구 베로니카와 그의 어머니 사라. 토니 앞에 부메랑처럼 다가온 진실은 혼돈스럽다.

토니는, 자신의 기억과는 달리, 에이드리언과 베로니카에게 ‘결코 해서는 안 될 악담’이 담긴 욕설 편지를 보냈던 것이다. 둘 사이에 ‘아이’가 생기길 바라며, 베로니카의 모친 사라도 찾아가 만나보라는 외설적인 악담이 깃든 내용이었다. 에이드리언은 베로니카의 ‘젊은’ 어머니 사라를 만났다가 둘 사이에 아이가 생긴다. 베로니카는 에이드리언의 자살. 아머니의 죽음 이후 약 20년 터울, 장애를 지닌 남동생 에이드리언을 부양하며 살아야 했다. 젊은 날 토니의 저주 편지가 이 모든 불행의 시작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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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의 삶은 반듯하다. 규칙적이다. 자신이 오래전 ‘쿨’한 편지를 보냈다고 생각하지만 그의 기억은 심각하게 왜곡된 것이다. 저주받은 편지는 최소 다섯 명의 삶에 영향을 끼쳤다. 베로니카와 에이드리언, 사라, 에이드리언의 아들, 그리고 토니 자신. 결국 모든 기억은 '중고'다


"잘은 모릅니다. 선생님. 하지만 하나의 사유방식은 있는데 그에 따르면 모든 역사적 사건... 예를 들어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까지도- 에 대해 우리가 진실되게 할 수 있는 말은 ‘뭔가 일어났다’는 것뿐입니다. "

“탄생, 성교, 그리고 죽음.” 이것이 T.S엘리엇이 말한 인생의 총체이지. 뭔가 덧붙이고 싶은 사람?

“ 에로스와 타나토스... 경우를 막론하고 죽음의 원칙과 충돌하는 에로스의 원칙이죠. 그리고 그 충돌이 결과로 뒤이어 나타나는 것들까지도요”


p 22

앨릭스가 러셀과 비트겐슈타인을 읽었다면 에이드리언은 카뮈와 니체를, 나는 조지 오웰과 올더스 헉슬리, 콜린은 보들레르와 도스토렙스키를 읽었다. 그렇다. 당연히 우리는 허세덩어리였다. 달리 청춘이겠는가

‘벨트안샤웅’ ‘ 슈투름 운트 드랑’을 즐겨 썼고 ‘그건 철학적으로 자명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P 25

“핀, 이 토론의 계기를 마련한 장본인 아닌가? 말하자면 이 시간의 세르비아 저격수인 셈이지?”

사실 책임을 전가한다는 건 결국 회피가 아닐까요? 우린 한 개인을 탓하고 싶어 하죠

그래야 모두 사면을 받을 테니까. 그게 아니라면 개인을 사면하기 위해 역사를 탓하거나 그도 아니면 죄다 무정부적인 카오스 상태 탓이라 해도 결과는 똑같습니다. 제 생각엔 개인의 책임이라는 연쇄사슬이 이어져 있는 걸로 보입니다... 주관적 해석 대 객관적 해석의 문제, 우리 앞에 제시된 판본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가 개인의 역사를 알아야만 한다는 사실 말입니다.”


“언뜻 생각하기엔 단순한 질문으로 시작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역사란 무엇인가,라고 말이지. 뭐 생각나는 것 있나, 웹스터?”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입니다.” 내 대답은 좀 빠르다 싶게 튀어나왔다.

“그래, 안 그래도 자네가 그렇게 말할까 봐 걱정을 좀 했는데. 그게 또한 패배자들의 자기기만이기도 하다는 것 기억하고 있나? 심슨...”
“핀?”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입니다.”

“그런가? 어디에서 읽었나?”

“라그랑주, 파트리크 라그랑주”

“그 예는?”

“롭슨의 자살이 그 예입니다.”



역사는 살아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더 가깝다는 것을 토니는 나이 들어서야 깨닫는다.

나는 살아남았다. 그는 살아남아 이야기를 전했다. 후세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을까? 과거, 조 헌트 영감에게 내가 넉살 좋게 단언한 것과 달리,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이 아니다. 이제 나는 알고 있다. 역사는 살아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더 가깝다는 것을.

앞을 내다보고, 그러고 나서 그 미래로부터 과거를 돌아보는 자신을 상상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시간이 가져다주는 새로운 감정을 익히는 것. 예를 들면, 우리의 삶을 지켜봐 온 사람이 줄어들면서 우리의 인간됨과 우리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는가를 증명해 줄 것도 줄어들고, 결국 확신할 수 있는 것도 줄어듦을 깨닫게 되는 것. (…)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다.’

어릴 때는 그렇게도 결정적이고 그렇게도 역겹던 몇 살 되지도 않는 나이차가 점차 풍화되어 간다. 결국 우리는 모두 ‘젊지 않음’이라는 동일한 카테고리로 일괄 통합된다.


기억이란 사건과 시간을 합친 것과 동등하다고. 그러나 그것은 그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기이하다. 우리는 살면서 우리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얼마나 자주 할까. 그러면서 얼마나 가감하고, 윤색하고, 교묘히 가지를 쳐내는 걸까. 그러나 살아온 날이 길어질수록, 우리의 이야기에 제동을 걸고, 우리의 삶이 실제 우리가 산 삶과는 다르며, 다만 이제까지 우리 스스로에게 반기를 드는 사람도 적어진다., 타인에게 얘기했다 해도, 결국은 주로 우리 자신에게 얘기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회한의 감정. 더 복잡하고, 온통 엉겨 붙어버린 원시적인 감정이다. 그런 감정의 특징은 속수무책으로 견디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세월이 흘렀고, 그만큼 상처도 깊어 개선의 여지조차 없는 감정이었다.


시간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말한다. 마흔은 아무것도 아니야. 쉰 살은 돼야 인생의 절정을 맛보는 거지. 예순은 새로운 마흔이야… 시간에 대해 내가 아는 건 이 정도다. 객관적인 시간이 있다. 그리고 주관적인 시간도 있다. 가령 손목의 요골동맥 바로 옆에 시계의 앞면이 오도록 차는 경우, 이런 사적인 시간이야말로 진정한 시간이며, 기억과 맺는 관계 속에서 측정될 수 있다. 그래서 이 기묘한 일이 일어났을 때 – 새로운 기억이 느닷없이 나를 엄습했을 때 – 는 마치 시간이 거꾸로 흐른 것만 같았다. 그 순간, 마치 강물이 역류한 것 같았다.

사람은 가끔 어떠한 기척이라든가 불길하던 좋든 간에 그것은 틀리지 않는 법입니다 -

불길하던 좋던 예담은 틀리지 않는 법 -

어쩌면 이것이 젊은 사람과 나이 든 사람의 차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젊은 시절에는 자신의 미래를 꾸며내고, 나이가 들면 다른 사람들의 과거를 꾸며내는 것. 이십 대에는 자신의 목표와 목적이 혼란스럽고 확신이 서지 않는다 해도, 인생 자체와, 또 인생에서의 자신의 실존과 장차 가능한 바를 강하게 의식한다. 그 후로…… 그 후로 기억은 더 불확실해지고, 더 중복되고, 더 되감기 하게 되고, 왜곡이 더 심해진다. 젊을 때는 산 날이 많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온전한 형태로 기억하는 게 가능하다.

노년에 이르면, 기억은 이리저리 찢기고 누덕누덕 기운 것처럼 돼버린다.


그 시절, 우리는 우리 자신이 닭장 같은 데 갇혀 있는 신세라고 생각했고, 그곳을 벗어나 우리의 인생으로 풀려날 날을 기다렸다. 그 순간이 오면, 우리 인생-과 시간 자체-의 속도는 빨라질 것이다. 우리의 인생이 상황을 막론하고 이미 시작 돼버렸음을, 그래서 이미 얼마간 득을 봤고, 또 얼마간 손해를 감수했음을 우리가 어찌 알 수 있었을까. 그런데다 우리가 닭장에서 풀려난다 한들, 처음엔 그 크기조차 가늠할 수 없는 더 큰 닭장으로 결국 들어가게 될 텐데.


학교는 런던 중심부에 있었고, 우리는 매일 각자의 집이 있는 자치구에서 학교까지, 하나의 통제시스템에서 다른 시스템으로 이동했다. 그 시절엔 모든 게 지금보다 명백했다. 돈은 모자랐고, 전자기기도 없었고, 패션의 전제정치는 미약했고, 여자친구는 전무했다. 인간 된, 또는 자식 된 도리, 즉 공부를 하고, 시험에 합격하여 구직에 필요한 자격을 갖춘 후, 이 모든 것을 합쳐 우리 부모의 인생, 즉 우리의 것과 몰래 비교해 볼 때 소싯적에 더 단순하고, 그래서 더 우월한 인생을 살았던 양반들의 인생에 견주어 눈에 거슬리지 않을 만한 선에서 약간 더 충족된 정도로 삶의 방편을 이루고 용인받는 것으로부터 한눈을 팔게 할 만한 일은 거의 없었다. 이런 것들 중 어느 하나도, 단 한 번도 공공연히 거론된 적이 없음은 당연하다. 영국중산층 특유의 고상하신 사회진화론은 언제나 암묵적으로만 존재한다.


P. 66 그러다가 강물이 마음을 바꾼 듯, 파도가 일 미터 남짓한 높이로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강물이 강 너비를 고스란히 장악하며 밀려와 이 둑, 저 둑에서 부서지기 시작하자 여기저기서 속삭이는 소리, 길게 목을 빼는 모습과 함께 습하고 추운 생각도 일제히 사라져 버렸다. 부풀어올라 굽이치는 물결이 키 높이로 다가오더니, 순식간에 우리를 지나쳐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멀리 물러갔다. 함께 있던 친구 몇몇은 물살이 그들을 앞지르는 동안 쫓아가면서 고함을 치고 욕을 퍼붓다가 고꾸라졌다. 나 혼자 강둑에 남아 있었다. 그 순간이 내게 가져다준 느낌을 나는 지금도 적절히 형용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그것은-내가 그것들을 직접 봤다는 뜻은 아니지만- 토네이도 같지도 지진 같지도 않았다. 자연이 난폭하고 파괴적인 방식으로 우리에게 우리의 본분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 뭔가가 고요한 가운데 잘못된 것처럼 보이고 느껴져서 더욱 혼란스러웠다. 마치 우주의 작은 레버가 눌리는 바람에 바로 이곳에서 불과 몇 분 동안, 자연이 뒤집히고 시간도 거꾸로 흐른 것처럼. 또한 해가 진 후에 그 현상을 목격해서인지 한층 신비로웠고, 더욱 속세의 것이 아닌 듯 느껴졌다.


“로마식이라고 해야 할 것 같은데. 동맥을 끊었으니까. 방법도 제대로였다고. 대각선으로 그었으니까.”

“그럴 바엔 물에 빠져 죽으면 되잖아?”

“ 그렇게 하면 2등급 밖엔 안되잖아, 에이드리언은 1등급을 원했을 거야.”

"성적 1등급, 자살 1등급"

마지막으로 남긴 편지에서 에이드리언은 검시관에게 자신의 자살 이유를 설명해 놓았다. 그는 삶이 바란 적이 없음에도 받게 된 선물이며, 사유하는 자는 삶의 본질과 그 삶에 딸린 조건 모두를 시험할 철학적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가 만약 바란 적이 없는 그 선물을 포기하겠다고 결정했다면, 결정대로 행동을 취할 윤리적, 인간적 의무가 있다는 것이었다. 결론 부분은 실질적으로 자신의 논지가 타당함을 알리고자 하는 내용이었다. 에이드리언은 검시관에게 자신의 주장을 공표해 줄 것을 부탁했고, 검시관은 그의 말대로 했다.

앨릭스가 <케임브리지 이브닝 뉴스>에 실린 기사를 가져왔다

‘장래가 촉망되는 한 청년의 비극적인 죽음’

에이드리언 핀(22)이 ‘심리적 평형상태를 상실할 것이 계기가 되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나는 그 고루한 표현에 화가 났다.

하늘이 무너진다 해도 에이드리언의 정신이 평형 상태를 상실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데 선서라도 했을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우리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얼마나 자주 할까. 그러면서 얼마나 가감하고, 윤색하고, 교묘히 가지를 쳐내는 걸까. 그러나 살아온 날이 길어질수록, 우리의 이야기에 제동을 걸고, 우리의 삶이 실제 우리가 산 삶과는 다르며, 다만 이제까지 우리 스스로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우리에게 반기를 드는 사람도 적어진다. 타인에게 얘기했다 해도, 결국은 주로 우리 자신에게 얘기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P. 242 인생에 대해 내가 알았던 것은 무엇인가, 신중하기 그지없는 삶을 살았던 내가 이긴 적도, 패배한 적도 없이, 다만 인생이 흘러가는 대로 살지 않았던가. 흔한 야심을 품었지만, 야심의 실체를 깨닫지도 못한 채 그것을 위해 섣불리 정착해버리지 않았던가. 상처받는 게 두려웠으면서도 생존력이라는 말로 둘러대지 않았던가. 고지서 납부를 하고, 가능한 한 모든 사람들과 무난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살았을 뿐, 환희와 절망이라는 말은 얼마 지나지 않아 소설에서나 구경한 게 전부인 인간으로 살아오지 않았던가 자책을 해도 마음속 깊이 아파한 적은 한 번도 없지 않았던가. 이 모든 일이 따져봐야 할 일이었고 그러는 동안 나는 흔치 않은 회한에 시달렸다. 그것은 상처받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큰소리쳤던 인간이 비로소 느끼게 된 고통, 그리고 바로 그랬기 때문에 느끼게 된 고통이었다.

에이드리언 아버님의 친구 분이시라면—˝

˝그리고 어머니의 친구이기도 하고.˝

˝그렇다면 이해를 못 하고 계시는 것 같네요.˝ 그래도 그는 내가 전혀 감을 못 잡고 있다는 말을 그나마 달리 표현해 준 셈이었다.

˝그런가요?˝

˝메리는 에이드리언의 어머니가 아니에요. 누나예요. 에이드리언의 어머니는 반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에이드리언은 감당을 못 할 정도로 슬퍼했어요. 그래서 그 이후로 지금까지…… 극복을 못하고 있어요.˝


토니 웹스터는 현실에 순응해 평범하게 살고 있는 노인이다. 어느 날 도착한 지 한참 된 편지 한 통을 발견하면서 그가 안주해 있던 삶의 기반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학창 시절 ’ 데미안‘처럼 놀라운 지성과 겸손을 갖춘 에이드리언 핀을 만나는데 처음에는 선망의 대상이었다가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었다가 결국은 뒤틀린 콤플렉스로 변질된다.

에이드리언에 대한 무제한적 선망이 분노와 증오감으로 바뀐 것은 여자 친구 베로니카가 에이드리언에게 호감을 갖게 되면서부터이고 더 엄밀히 말하면 신사적인 에이드리언이 베로니카와의 교제를 허락해 달라는 편지를 보내온 후부터다.

토니는 두 통의 편지를 썼는데 하나는 토니 스스로가 에이드리언에게 보냈다고 생각하는 편지( 둘 사이의 교제를 쿨하게 허락한다는 내용), 또 하나는 기억하지 못하나 토니가 실제로 써서 발송한 편지(악담으로 가득 찬) 다.

‘사실 마음 한편으론 너희 둘 사이에 아이가 생기길 바라고 있어. 이유인즉 내가 시간이 대대손손 이어지며 복수를 가한다는 걸 굳건히 믿는 인간이라 그래. 그러나 복수의 과녁은 그 조준이 정확해야 하는 법. 너희 둘이 딱 그에 해당된단 말이지.‘ 또 이렇게도 썼다. ‘그러니 너희에게 그런 걸 바랄 수는 없는 노릇. 너희의 양해를 구하며 시어를 동원해 보자면, 순진무구한 새 생명으로 하여금 자신이 너희의 운우지정으로 인한 결실임을 깨닫는 짐을 지운다는 건 불공정한 처사일 테니 말이야.‘

회한 remorse 이란말은 어원적으로 한 번 더 깨무는 행위를 뜻한다. 회한의 감정은 그와 같다. 내가 썼던 말을 다시 읽을 때 나를 깨무는 이가얼마나 그악스러웠을지 상상할 수 있겠는가. 내가 내뱉었는지조차 잊고 있었던 그 말은 가히 고대의 저주처럼 여겨졌다. 물론, 나는 저주 같은 건 믿지 않는다. 그랬었다. 말이 씨가 된다느니 하는 것 말이다. 그런데도 나중에 일어날 일을 명명하는 행위 자체 - 콕 집어 나쁜 일이 일어나길 바라자 실제로 똑같이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것-에는 여전히 몸이 오싹해질 만큼 초자연적인 데가 있다. 저주를 퍼부었던 젊은 시절의 나와 그저 주가 실제로 일어나는 것을 목도한 노년의 내가 느끼는 감정은 사뭇 다르다는 사실. 이는 말도 안 될 정도로 서로 무관하다.



나는 에이드리언에 대해 좀 더 생각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그는 언제나 우리 모두를 합친 것보다 더 명철한 시각을 갖추었던 것으로 보였다. 우리가 호강에 받들려 무풍지대나 다름없는 사춘기를 허우적대며 우리의 타성적 불만이 인간 조건에 대한 본원적 반응이라 믿는 동안, 에이드리언은 이미 거기에서 벗어나 멀리, 넓게 앞을 조망하고 있었다. 그는 인생에 대해서도 남달리 명징하게 받아들였다.


그에 비하면 나는 언제나 흐리멍덩했고, 인생에 내게 던져준 얼마 되지도 않는 교훈에 대해 크게 깨달을 깜냥도 못 되었다. 삶의 현실에 안주했고, 삶이 불가항력에 복속했다. 만약 이렇다면 이렇게, 저렇다면 저렇게 하는 식으로 세월을 보냈다. 에이드리언식으로 말하면 나는 삶을 포기했고, 삶을 시험해 보는 것도 포기했고, 삶이 닥쳐오는 대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난생처음 나는 내 온 인생에 대해 총체적인 – 자기 연민과 자기혐오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한 – 후회의 감정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살아온 하루도 후회되지 않는 날이 없었다. 젊은 시절 알게 된 친구들을 잃었다. 아내의 사랑을 잃었다. 즐겼던 야망을 저버렸다. 인생이 너무 성가시지 않기를 바랐고 성공을 거두었다. 이 얼마나 옹색한 일인가...

평균치, 학교를 떠난 후 나란 인간은 줄곧 그랬다. 대학에서 직장에서 평균치, 우정과 성실과 사랑에서 평균치, 섹스에서도 의심할 여지없이 평균치였다.... 평균치의 법칙에 따르면, 우리는 불가항력적으로 평균치가 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평균치란 말이 메아리쳐 울려 퍼졌다. 평균치 인생, 평균치 진실, 평균치 윤리관...


맨 처음 포드 부인이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을 갖고 있었던 이유를. 부인이 편지에 ’ 추신.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세상을 떠나기 전에 보낸 마지막 몇 달 동안 에이드리언은 행복했다고 생각해 ‘라고 썼던 이유를. 두 번째 간병인이 ’특히 지금은‘이라고 말했을 때의 의미를, 베로니카가 ’ 피 묻은 돈‘이라고 말한 것 까지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볼 수 있었a2던 한 페이지에서 에이드리언이 말하고자 했던 것도

요컨대 b, a1, a2, s, v라는 정수가 포함된 축적은 어떻게 나타낼 수 있을까? a1은 에이드리언, a2는 앤서니(나), b는 아기, s는 사라, v는 베로니카.

책임의 사슬을 보았다. 에이드리언에게 보낸 그 저열한 편지에서 베로니카의 어머니와 의논하라고 채근했던 것이 기억났다. 남은 평생 머릿속에서 맴돌게 될 그 말을 다시 떠올려보았다. ’그래서 예를 들면, 만약 토니가‘. 나는 안다, 이제는 바꿀 수도, 만회할 수도 없음을.


인간은 생의 종말을 향해 간다. 아니다, 생 자체가 아니라, 무언가 다른 것, 그 생에서 가능한 모든 변화의 닫힘을 향해 우리는 기나긴 휴지기를 부여받게 된다. 질문을 던질 시간적 여유를, 그 밖에 내가 잘못한 것은 무엇이었나? 나는 트라팔가르 광장으로 몰려간 한 무리의 얘들을 생각했다. 나는 일생을 통틀어 단 한 번만 춤을 추는 한 젊은 여자를 생각했다. 앞으로도 알지 못하고, 이해할 수도 없을 모든 것들 중에서 내가 지금 알지 못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에이드리언이 규정한 역사를 생각했다. 그의 아들이 나를 피하려고 엠보싱 화장지가 놓인 선반에 얼굴을 들이박던 모습을 생각했다. 나는 프라이팬에 부치던 달걀이 터졌는데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태평하게 휙 하니 내버리던 한 여자를 생각했다. 바로 그 여자가 나중에, 햇볕이 내리쬐는 등나무 아래애서 팔을 수평으로 뻗으며 비밀스러운 제스처를 취하던 모습을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용마루처럼 솟아오른 강의 파도가 달빛에 반짝이며 우릴 지나쳐 기세 좋게 거슬러 올라가 사라지는 가운데, 한 무리의 학생들이 어둠 속에서 손에 든 회중전등 빛줄기를 교차시키며, 고함을 지르며 그 뒤를 따르던 광경을 생각했다. 거기엔 축적이 있다. 책임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너머에, 혼란이 있다. 거대한 혼란이.


나이 듦, 기억, 그리고 후회의 감정을 치밀하고도 정교하게 사유한다. /가디언

우리의 기억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떻게 축적되고, 왜곡되는 것일까?

집단의 역사 속에 개인의 역사(삶)는 묻히기 마련이다.

역사란 결국 개인의 삶(기억)이 뭉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에이드리언 핀이 그토록 집요하게 주장했던 말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다."


우리의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날 때 빚어지는 모순 가득한 확신.

이 놀랍도록 명징한 문구에 전율이 인다.

삶의 시작이 '던져짐'이었듯

삶의 끝도 우리 의지와는 무관하다. 에이드리언은 그 마지막을 스스로 합리적으로 종결하고자 했다.

그의 명징함 속에 느닷없이 개입된 우연(사라, 그리고 둘 사이의 아기)을 그는 견딜 수 없었으리라.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다산책방)의 표지사진은 독일 홀로코스트 기념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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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 없이 희생된 자들, 기계적으로 명령에 복종한 이들. 가해자와 피해자의 기억은 또 어떻게 왜곡되어 왔을까?

그 모든 개인의 기억들이 중첩되고 왜곡되고, 혹은 난도질당하면서 '역사'라는 그럴듯한 이름을 얻기까지

에이드리언의 말처럼 '역사'속에서 한 개인에게 역사적 책임을 전가하기란 참 쉬운 일이다. 야만적이고 잔인한.... 책임의 사슬과 연쇄를...

'그래서, 예를 들면 만약 토니가.'라는 에이드리언 핀의 문장에서

우리는 안다. 지나버린 것들을 이제는 만회할 수도 바꿀 수도 없다는 사실을


줄리언 반스의 소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모든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친절한 소설이 아니다. 독자는 추리소설을 읽듯 하나의 사건과 다른 하나의 사건 사이의 고리를 찾아 연결해 가면서 읽어야 한다. 마치 누더기가 되어버린 기억들을 하나하나 끄집어내어 다시 짜만드는 것처럼...

왜 이 책이 맨 부커상 수상작인지를 다시 확인하게 되는 6월이다. / 려원


<빨강 수집가의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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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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