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장막 뒤, 고해성사하듯 느릿느릿 걷는다
어느 고양이의 퇴근
밤산책...
같은 길을 걸어도 밤에는 전혀 다른 길을 걷는 것 같다.
이글거리는 태양이 지나간 자리. 하루 내 달궈진 길이 쉽사리 식지 않는다.
황갈색 고양이의 둥지가 비어있다.
캣맘이 두고 간 약간의 먹이와 물...
이 밤 고양이는 어디로 갔을까?
밤 사냥을 나간 것일까?
주어진 먹이대신 날 것... 사냥 뒤의 짜릿함을 느끼고 싶은 것일까...
불 켜진 아파트.. 수많은 이들이 공유하는 밤이다.
도시의 밤... 누구나 선하게 살고 싶었으나 살다 보면 세속의 때가 묻게 마련인 우리에게 밤은 참회의 시간이다. 가려진 어둠의 장막뒤에서 고해성사를 하듯. 느릿느릿 걷는다.
낮 시간의 고양이... 고양이의 얼굴 표정의 대부분을 지배하는 것은 눈이다. 어떤 언어를 발설하는 눈.
폭염에 지친 나무들.. 그림자가 해쓱하다
낮동안 태양에 지친 풀이 눕고 있다.
김수영의 <풀>을 생각하는 밤이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 김수영, 「풀」
여름으로 가는 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고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밤은 깊어가고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기 위하여
풀이 눕는다. 눕기 시작한다.
누워있는 풀들을 지나 다시 황갈색 고양이의 보금자리로 향한다.
고양잇과 동물들의 큰 매력 중의 하나는 우아한 걸음걸이다.
‘어슬렁거리다’라는 표현 정도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저 걸음걸이의 리듬
걷는 것이 아니라 공기 사이에서 자신의 리듬을 만든다.
신중하고 긴장감이 넘치며 고요하고 정확하다.
눈
고양이의 얼굴 표정의 대부분을 지배하는 것은 눈이다.
고양이의 눈은 뜨는 모양과 빛의 반응에 따라 시시각각 바뀌며 그 눈을 보는 각도에 따라서도 바뀐다. 고양이의 눈으로 시간을 짐작했다는 속설이 있다. 한낮에는 동공이 아주 좁아지고 밤이면 동공이 커지기 때문이다.
이집트인들은 고양이가 석양의 햇빛을 아침까지 눈 속에 담아둔다고 믿었다. 고양이는 밝은 햇빛 속에서는 동공을 수직으로 작게 만든다. 완벽하게 반짝이는 검은 구슬과 칼날 같은 검은 틈 사이에 햇빛이 드나드는 시간이 있다.
... 어떤 언어를 발설하는 눈.. 너의 눈동자는 가끔 터질 것처럼 불온하게 부풀어 오른다. 언제나 비밀스럽고 난해하며 때로 텅 비어 보인다.
길고양이들
발려진 화분과 낡은 담 사이로 소리 없이 출몰하는 고양이들은 이 거리의 주인이다. 사람들은 스쳐가는 타인에게 관심이 없지만 고양이는 자신을 쳐다보는 사람에게 점 더 예민하다. 길고양이들은 언제나 죽음 가까이 살고 있지만, 낡은 전봇대 뒤쪽에서 혹은 컴컴한 주차장의 입구에서 마주친 고양이가 죽음에 가까이 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렇게 많은 길고양이가 태어나고 죽어가지만 길고양이의 시신을 골목에서 발견하는 일은 차에 치여 죽은 고양이의 사체를 발견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 길고양이는 자신의 죽음을 감추는 법을 안다. 언젠가 사라질 준비가 되어있는 존재들, 아무것도 도모하지 않고 다만 사라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은 길고양이들의 삶은 이 도시의 덧없는 리듬을 닮아있다... 소멸할 수 있는 다른 시간 속에 각자 숨어있다.
<너는 우연한 고양이> 부분 이광호
황갈색 고양이 한 마리.. 꼬리를 늘어뜨리고 어슬렁 거리며 퇴근 중이다.
지친 하루의 끝... 보금자리로 돌아오는 고양이의 퇴근은 오늘따라 상당히 늦다. 초과근무라도 한 것일까.
셔터를 눌러야지 하는 사이 어느새 고양이는 짙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나무로 된 칸막 위 뒤, 나무 벤치가 고양이 은신처다.
은신처 밖으로 꼬리만 보인다. 이 여름밤, 밝은 조명을 배경으로 고양이는 늦은 식사 중이다.
누군가 가져다 놓은 석식을... 아무 불평 없이 조용히 먹고 있다.
유난히 오랫동안 천천히 느릿느릿 식사 중이다.
언제든 사라질 준비가 되어있는 고양이, 소멸할 수 있는 다른 시간을 살고 있는 고양이.
어둠을 배경 삼아 드러누운 풀과... 그 어둠을 배경 삼아 아무도 모르게 둥지로 돌아온 고양이.
그래도 너를 볼 수 있어 행복한 시간.
영원과 영원 사이의 순간........... 너는 고양이로소이다. /려원
<빨강 수집가의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4.12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