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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였던 그 아이는 어디 있을까, 아직 내 속에 있을까

우리는 날마다 빨간 눈동자를 뒤룩뒤룩 굴리며 경쾌하게 웃고 있지만..

나였던 그 아이는 어디 있을까,

아직 내 속에 있을까 아니면 사라졌을까?

파블로 네루다 <질문의 책>


펜과 종이 그리고 공기 한 모금으로 이루어진 여자, 메리 올리버는 자신이 적어도 세 개의 자아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한다.


나는 적어도 세 개의 자아로 이루어져 있다. 우선 과거의 어린아이가 있다. 물론 나는 더 이상 그 아이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아이의 목소리를 멀리서, 가끔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들을 수 있다. 그 아이의 희망 또는 고통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아이는 사라지지 않았다. 나의 기억 속에서 혹은 수증기 자욱한 꿈들의 강에서 아이는 강력하고 이기적이며 암시적인 존재를 드러낸다. 그 아이는 떠나지 않는다. 절대로 지금 이 시간에 나와 함께 있다. 무덤 속에서도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세심한 사회적 자아가 있다. 이 자아는 미소 짓는 문지기다. 시계태엽을 감고 삶의 일상성을 헤치고 나아가며 지켜야 할 약속들을 마음에 새겼다가 꼭 지킨다. 이 자아는 천 가지 의무감에 사로잡혀 있다. 하루의 시간을 가로질러 움직이며, 그 움직임 자체가 과업의 전부인 것처럼 여긴다. 움직이면서 지혜나 기쁨의 나뭇가지를 줍든 아무것도 줍지 못하든, 그런 건 거의 신경 쓰지 않는다. 이 자아가 밤낮으로 듣는 건, 그리고 그 어떤 노래보다 사랑하는 건 시곗바늘의 끝없는 전진, 그 엄격하고 발랄하며 확신에 찬 리듬이다.

날마다 열두 개의 작은 통들이 무질서한 삶을, 그리고 그 무엇보다 더 무질서한 생각을 정리해 준다. 마을의 시계가 울부짖고, 모든 손목 위 얼굴들이 콧노래를 부르거나 반짝인다. 세상이 스스로와 보조를 맞춘다. 또 하루가 지나간다. 규칙적이고 평범한 하루..


창작은 평범함을 부정하진 않는다. 단순히 다른 것일 뿐이다. 그 작업은 다른 관점을, 다른 우서순위들을 필요로 한다. 우리 각자의 내부에는 어린아이도 시간의 종도 아닌 자아가 존재한다. 우리 중 일부에겐 가끔 찾아오고, 나머지 사람들에겐 폭군 노릇을 하는 세 번째 자아. 이 자아는 평범성에 대한 사랑이 식었고 시간에 대한 사랑도 식었다. 영원성에 대한 갈망을 지녔을 뿐이다. 창조적인 사람은 중세 기사처럼 다가올 일에 대비하여 정신적, 육체적 준비를 하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다. 그가 할 모험들은 모두 미지의 것들이기 때문이다. 작업 자체가 모험이다. 예술가는 비범한 에너지와 집중력 없이는 작업을 시작할 수 없으며 시작하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예술에는 중립지대가 없다. 우리의 모든 의식적 규율에도 불구하고 희마하게 빛나는 형상의 아이디어들이 때가 되면 힘찬 날갯짓으로 무질서하고 무모하게, 가끔은 열정처럼 다루기 힘들게 찾아올 것이니 언제든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내 안의 어린아이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대신 사회적 자아... 미소 짓는 문지기처럼.. 나는 늘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었다. 천 가지 의무감에 사로잡혀... 그 일들을 해냄으로써 내 존재 가치와 '쓸모'를 확인하는.... 그러나 내 안에는 메리 올리버처럼 어린아이도 아닌 시간의 종도 아닌...

무질서하고 무모한 일종의 광기 같은 자아,

지극히 정돈된 시간의 태엽에서 밖으로 돌출하려는 자아가 존재한다. 일탈과 혼돈을 견디지 못하면서 늘 일탈과 혼돈을 머릿속으로만 갈망하는 여자. 그 여자가 바로 나다.


2019년 1월 17일 여든세 살의 일기를 마치고 잡초 우거진 모래언덕으로 돌아간 그녀.

메리올리버. 이미 세상에 없는 그녀를 읽는다. 죽을 때까지 함께 일 어린아이를 품고, 평생을 미소 짓는 문지기의 얼굴을 하고... 그러나 무모하고 무질서한 작품의 세계에 뛰어든 여자..

그녀의 긴 호흡을 느낀다.

빠르게 가는 시간이다. 어쩔 줄 모르는 아이처럼 허둥대며 시간에 끌려가고 있다.

그렇게 7월이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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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눈동자를 뒤룩뒤룩 굴리는 세네치오처럼.

우리는 날마다 빨간 눈동자를 뒤룩뒤룩 굴리며 경쾌하게 웃고 있지만 곧 늙게 마련이고 그 웃음 뒤, 어딘가에는 서늘한 죽음이 묻어있다.

어떤 슬픔이 찾아올 때 마법의 주문처럼 세. 네. 치. 오를 외치면 부화하기 전의 노른자처럼 충혈된 눈동자의 그가 찾아올까? ‘곧 노년이다’는 말을 내 귀에 속삭이며 삶의 황혼이 다가오고 있다고 이야기해 줄...

<빨강 수집가의 시간> P364~빨간 눈동자의 세네치오 부분


<아름다운 것>


존 키츠


아름다운 것은 영원한 기쁨,

그 사랑스러움은 늘어만 가고, 결코

무(無)로 돌아가지 않는다. 우리를 위해

나무 그늘의 평온, 달콤한 꿈들로 가득한

잠, 그리고 건강, 그리고 고요한 숨결이 되어준다.

그리하여, 아침마다, 우리

꽃띠를 엮어 대지에 우리를 묶는다.

낙담, 고결한 특성들의

잔혹한 결핍, 우울한 나날들,

우리가 헤쳐나가야 할

온갖 유해하고 어두운 길들에도 불구하고

그래,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어떤 미의 형상이 우리의 어두운 정신에서

장막을 벗겨낸다. 태양과 달,

순진한 양에게 그늘을 베푸는

늙고 난 어린나무들이 그러하고, 녹색 세상과

더불어 사는 수선화들이 그러하고, 무더운 계절에 대비하여

스스로 시원한 은신처를 만드는

맑은 실개천들, 예쁜 사향 장미가 흩뿌려져

꽃향기 진한 숲 속 덤불이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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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담, 고결한 특성들의

잔혹한 결핍, 우울한 나날들,

우리가 헤쳐나가야 할

온갖 유해하고 어두운 길들에도 불구하고

그래,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어떤 미의 형상이 우리의 어두운 정신에서 우리의 장막을 벗겨줄 것들은

모두 아름다운 것들이다.

늦은 오후 성당. 스테인드 글라스를 통해 색이 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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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열두 달 365일을 십자가에 매달린 남자

그의 이름은 예수.

우리를 마주한다

성당 전면을 채우고 있는 그 거대한 십자가. 그리고 그곳에 매달린 남자 예수

처절한 아름다움....

우리가 헤쳐나가야 할 온갖 유해하고 어두운 길들에도 불구하고

그래,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어떤 아름다운 것들, 어떤 처절함이 내 눈의 추함의 장막을 벗겨내고 나를 다시 살게 한다.

성큼 거리며 다가오는 여름.... 그 발걸음 소리 들려오는 아침.

멀리 새들이 운다./려원


<빨강 수집가의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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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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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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