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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것들을 보라. 사랑하라.놓지 마라.

언제나 마음을 끌어당기는 것은 살아 있는 것이다

저마다의 일생에는, 특히 그 일생이 동터 오르는 여명기에는 모든 것을 결정짓는 한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을 다시 찾아내는 것은 어렵다. 그것은 다른 수많은 순간들의 퇴적 속에 깊이 묻혀 있다... 한 인간의 존재가 참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점진적일 수도 있다. 저 자신 속에 너무나도 깊이 꼭꼭 파묻혀 있어서 도무지 새벽빛이 찾아들 것 같지가 않아 보이는 어린아이들도 있다. 그래서 그들이 문득 수의를 밀어붙이며 나자렛처럼 일어서는 것을 보면 우리는 의외라는 듯 깜짝 놀란다. 수의란 사실은 어린아이의 배내옷이었던 것이다.

대국적인 견지에서 보면 삶은 비극적인 것이다, 바싹 가까이에서 보면 삶은 터무니없을 만큼 사치스럽다...

그때 나는 몇 살이었을까?

예닐곱 살 쯤이었다고 여겨진다. 보리수 그늘 밑에 가만히 누워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눈을 던지고 있다가 나는 문득 그 하늘이 기우뚱하더니 허공 속으로 송두리째 삼켜져 버리는 것을 보았다. 그것이 내가 처음 느낀 무(無)의 인상이었다.

공(空)의 매혹이 뜀박질로 인도하게 되고, 우리가 한 발을 딛고 껑충 뛰어 이것저것 에로 뛰어가는 것... 공포심과 매혹이 한데 섞인다. 앞으로 다가가면서도 동시에 뒤로 물러나는 것이다. 제자리에 가만히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 어린 시절, 반듯이 누워서 그리도 오래도록 나뭇가지 사이로 물끄러미 바라보았던 하늘, 그리고 어느 날 싹 지워져 버리던 그 하늘의 기억 때문이었을까?

장 그르니에 『섬』 공(空)의 매혹 부분


알제리에서 이 책을 처음으로 읽었을 때 나는 스무 살이었다.,,, 길거리에서 이 조그만 책을 읽고 그 처음 몇 줄을 읽다 말고는 다시 접어 가슴에 꼭 껴안고 마침내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정신없이 읽기 위하여 나의 방에까지 한걸음에 달려가던 그날 저녁으로 나는 되돌아가고 싶다. 나는 아무런 회한도 없이, 부러워한다. 오늘 처음으로 『섬』을 열어보게 되는 저 낯 모르는 젊은 사람을 뜨거운 마음으로 부러워한다.

- 알베르 카뮈


스무 살의 카뮈가 이 조그만 책을 몇 줄 읽다 말고 가슴에 안고... 정신없이 방으로 한 달음에 달려가던 그날은.... 아마도 여름이 아니었을까. 아무런 회한도 없을 그 여름의 저녁.

여름이면 늘 떠오르는 두 사람. 카뮈와 장 그르니에...


장 그르니에처럼 유년시절 마루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던 기억이 난다. 시시각각 변하는 구름들.. 어떤 구름이 다른 구름에 잡아먹히는 것 같은 상상... 또 어떤 구름의 형체에 의미를 부여하던 시간.

하늘과 구름에 대한 기억....... 이제는 갈 수 없는 유년의 시간이다.



에리히 프롬은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에서 “언제나 마음을 끌어당기는 것은 살아있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했다.

여름은 살아있는 것들의 맹렬함이 느껴지는 계절.

이 마음에서 저 마음으로 건너갈 때

마음에 공허가 밀려올 때 나는 항상 무엇으로든 채우고 싶어진다.

하나의 대상(그것이 사물이든 사람이든.. 또 어떤 형태의 것이든)에 집착하다 보면 그 허기가 어느 정도 충족된다.


인간은 자연의 변덕이다. 유일하게 자기 자신을 자각하는 생명체다. 인간은 자기 자신과 과거, 미래를 자각한다. 인간은 본능으로만 살지 않는다. 자연에서 거의 뿌리 뽑힌 존재이며 태어나는 순간부터 삶이 던지는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는 과제를 떠안는다. 어떻게 살 것인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 내가 아는 한 이것은 결국 한 가지 질문이며. 그 질문에 대한 대답도 소수에 불과하다.


태어나면서부터 질문에 대답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살아있는 것은 여전히 마음을 끌어당기고, 그 살아있는 것들이 내가 답을 해야만 하는 질문의 답이 되어줄 것이다.

밤 산책길에 유난히 마음을 잡아끄는 것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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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것들을 보라.

사랑하라.

놓지 마라.

- 더글러스 던-

어둠 속에서 부스스 일어서는 풀들이다.

틈에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풀.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있다.

조명 때문일까. 그들의 당당함에 고개 숙여지던 여름밤의 풍경.

나를 끌어당기는 것... 살아있는 것들이다. 끝없이 사랑해야 하는 것들, 끝없이 내 질문에 답이 되어줄 것들... 세상의 모든 꿈틀거리는 것들../ 려원


<빨강 수집가의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 202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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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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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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