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이름은 빨강> 오르한 파묵, 빨강은 소금기가 남아있는 물고기 같아
<내 이름은 빨강>
나는 어디에나 있었고 지금도 어디에나 있다. 투르가 동생 이레치의 목을 야만적으로 내리쳤을 때, 꿈같은 장관을 이룬 전설적인 군대가 초원에서 전투를 벌일 때, 일사병에 걸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름다운 코에서 반짝이는 피가 흘러내릴 때, 나는 거기 있었다.
.... 나는 인도와 부하라에서 온 두꺼운 종이 위에 가는 붓으로 칠해졌다. 피가 꽃처럼 피어나는 전쟁터에, 미소년들과 시인들이 들판에서 포도주를 마시며 음악을 들을 때는 가장 훌륭한 시인의 카프란 자락에, 천사들의 날개와 여자들의 입술에, 시체들의 상처에 그리고 목이 잘려 피투성이가 된 머리에 칠해지는 것을 나는 좋아한다.
당신들이 던지는 질문을 들었다. 색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고?
색은 눈길의 스침, 귀머거리의 음악, 어둠 속의 한 개 단어다. 수천 년 동안 책에서 책으로, 물건에서 물건으로 바람처럼 옮겨 다니며 영혼의 말소리를 들은 나는. 내가 스쳐 지나간 모양이 천사들의 스침과 닮았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여기에서 당신들의 눈에 말을 걸고 있다. 이것이 나의 신중함이다. 그리고 다른 한 편 동시에 나는 공중에서 당신의 시선을 통해 날아오른다. 이것이 나의 가벼움이다.
나는 빨강이어서 행복하다! 나는 뜨겁고 강하다. 나는 눈에 띈다. 그리고 당신들은 나를 거부하지 못한다.
나는 숨기지 않는다. 나에게 있어 섬세함은 나약함이나 무기력함이 아니라 단호함과 집념을 통해 실현된다. 나는 나 자신을 밖으로 드러낸다. 나는 다른 색깔이나 그림자, 붐빔 혹은 외로움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를 기다리는 여백을 나의 의기양양한 불꽃으로 채우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내가 칠해진 곳에서는 눈이 반짝이고, 열정이 타오르고, 새들이 날아오르고,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 나를 보라. 산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를 보시라. 본다는 것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다는 것은 곧 보는 것이다. 나는 사방에 있다. 삶은 내게서 시작되고 모든 것은 내게로 돌아온다. 나를 믿어라!
입을 다물고 내가 얼마나 멋진 빨강인지 한번 들어보라. 색을 아는 세밀화 가는 인도의 가장 더운 지역에서 온, 최상품의 말린 빨간색 벌레를 절구에 찧어 고운 가루로 만든 뒤. 이 빨간 가루 5디리헴, 비누풀 1디리헴 그리고 로토르 1/2디리헴을 준비한다. 3 오카의 물을 냄비에 담아 비누풀을 넣고 끓인 뒤, 로토르를 물에 넣고 잘 젓는다. 그리고 맛 좋은 커피를 한 잔 마실 동안만큼 끓인다. 그가 커피를 마시는 동안, 나는 잠시후면 태어날 아기처럼 안달한다. 커피가 세밀화가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하고 그의 눈이 반짝반짝해지면 빨간 가루를 냄비에 넣고 나를 만들 때에만 사용하는 가늘고 깨끗한 꼬챙이로 잘 섞는다. 이제 곧 나는 진짜 빨강이 되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농도다. 물을 끓이되 너무 오래 끓야서도 안 된다. 꼬챙이 끝으로 그 물을 떠서 엄지손톱에 발라본다. 아. 빨강이 된다는 건 얼마나 멋진 일인가! 손톱이 붉은색으로 물든다. 냄비를 화로에서 내리고 나를 깨끗한 천에 부어 거른다. 이제 나는 한층 맑아진다. 그리고 다시 냄비에 부어 불에 올려놓는다. 그렇게 두 번을 더 끓여서 거품을 내고 약간 빻은 백반을 넣어 찬 곳에서 식힌다.
며칠 동안 나는 냄비 안에서 아무것도 첨가되지 않은 채 줄곧 기다린다. 그러는 동안 모든 책장, 모든 장소, 모든 물건에 칠해질 것을 상상하고는 이렇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안타깝게 느껴진다. 그리고 정적 속에서 빨강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언젠가 페르시아의 한 도시에서 어느 장님 세밀화가가 기억으로 그린 말 그림 속, 안장 덮개의 장식 그림에 색을 칠하고 있는 수습생 앞에서 장님 세밀화가 두 명이 논쟁을 벌였다
“평생 신념을 갖고 열심히 일한 결과, 자연스럽게 장님이 되는 우리 세밀화 가는 빨강이 어떤 색이고 어떤 느낌인지를 기억하지. 그런데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장님이었다면 지금 이 수습생이 칠하고 있는 빨강을 어떻게 알 수 있나?
기억만으로 그림을 그리는 세밀화가의 물음에 다른 세밀화가가 대답했다.
”훌륭한 의견이요. 그렇지만 색이란 아는 게 아니라 느끼는 거지. “
”그렇다면 자네는 한 번도 빨간색을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빨강의 느낌을 어떻게 설명하겠나? “
”손가락 끝으로 만져보면 그 느낌이 철과 동의 중간쯤 되지, 손바닥에 올려놓으면 뜨거울 테고, 손으로 쥐어보면 소금기가 아직 남아 있는 물고기처럼 느껴지겠지. 입에 넣으면 입 안이 꽉 찰 테고 냄새를 맡으면 말 냄새가 나겠지. 꽃의 향기로 치면 붉은 장미보다는 국화 향기와 비슷할 걸세. “
110년 전베네치아 예술가들은 우리의 전설적인 장인들이 신을 믿었듯이 자신들의 화풍을 믿었다. 베네치아 화가들은 검에 베인 대수롭지 않은 상처를 표현할 때나, 혹은 평범한 마포에 그림을 그릴 때 다양한 톤의 빨강을 사용하는 것을 일종의 불명예, 혹은 저속한 것으로 여겼다. 결단력과 의지가 모자라는 화가들이나 카프탄을 칠할 때 다양한 톤의 빨간색을 쓴다고 했다. 그림자가 드리워진 모습을 표현한 거라는 말은 변명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빨강은 단 한 가지 색이라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빨강의 의미는 무엇인가? “
기억에 의지해 말을 가리는 장님 세밀화가가 물었다.
”색의 의미는 그것이 우리 앞에 있다는 뜻이며. 그것을 우리가 본다는 것을 뜻하지, 보이지 않는 사람에겐 빨강을 설명할 수 없네. “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 이단자, 불신자들은 신을 부정하고자 할 때 신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네. “
”그러나 신은 보는 사람에게는 보이네. 그래서 코란에는 보는 사람과 보지 않는 사람이 절대로 같지 않다고 씌어 있지. “
그 순간에도 견습생은 말의 안장 덮개를 천천히 나로 칠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그림의 검고 흰 부분을 나의 충만함과 힘 그리고 생동감으로 채우는 것은 너무나 기분 좋은 일이었다. 붓이 나를 종이에 퍼지게 할 때는 온몸이 근질거리듯 즐거웠다. 이렇게 내가 칠해지는 것은 마치 이 세상을 향해 ”돼라! “라고 하자마자 세상이 온통 나의 핏빛 색으로 물드는 것과 같은 일이다. 나를 보지 않은 사람은 나를 부인하겠지만 나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P 110~
“ 존경하는 어르신. 진정한 화가와 평범한 화가를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화원장 오스만은 진지하게 대답했다
“진정한 화가와 재능 없고 신앙신 없는 화가를 구분하는 유일한 판단 기준은 없다네. 그것은 시대에 따라 변하지. 그러나 화가가 우리의 예술을 위협하는 악에 대항하기 위해 어떤 윤리와 기법을 따르는가는 중요하지. 나는 오늘 한 젊은 화공이 얼마나 진지한지 알아보기 위해 그에게 세 가지 질문을 던졌네.”
“그 질문이 무엇입니까?”
“새로운 유행을 따라서 자신만의 개성적인 화풍을 가지고자 하고, 다른 화가들과 구분되는 자신만의 분위기를 만들어내려 하고 또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이교도들처럼 그림에 서명을 새겨 넣는 행위를 어떻게 여기는지 알아보기 위해 스타일과 서명에 대해 물었지.”
“그다음 질문은 무엇이었습니까?”
“우리에게 책을 주문한 왕들과 술탄들이 죽고 그 책들의 주인이 바뀌고, 우리가 그린 그림들이 페이지에서 각각 떨어져 나와 다른 시대에, 다른 책 속에서 사용된다면 그것을 그린 화가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이런 문제는 상심하거나 혹은 기뻐하는 것으로 극복할 수 없는 예민한 것이기 때문에 나는 화가에게 시간에 대해 묻곤 한다네. 자네는 화가의 시간과 신이 시간을 이해했나?”
“세 번째 질문은 무엇입니까?”
“세 번째는 ‘눈멈’에 관해 서네.”
“눈이 머는 것의 무엇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눈이 먼다는 건 고요해지는 것이라네. 내가 조금 전에 말한 첫 번째와 두 번째가 합쳐지면 눈먼이 오지. 그림이 가장 심오한 경지에 이르는 것은 신이 어둠 속에서 나타나는 것을 볼 때라네,”
화원장 오스만의 질문을 내게 던져본다.
첫 번째 질문 : 스타일과 서명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자기 만의 스타일을 갖는 것은 중요하다.
천편일률적으로 똑같은 작품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성장하지 못함의 반증이 아닐까
어떤 유행. 어떤 사조, 어떤 동향이 밀려왔다 밀려가더라도
그 모든 것을 자기화시킬 수 있는 능력. 오직 자신의 것으로 체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두 번째 질문 : 시간에 대하여. 화가의 시간과 신의 시간
시간.... 사람에게 시간이란 유한한 것.
오직 자신이 살아있을 때에만 ‘시간’은 유효하다.
이미 이곳에 없는 이에게 ‘시간’은 무의미한 개념이다.
저자의 시간은 오직 그의 살아있음과 상관이 있지만 작품의 시간의 저자의 부재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작품의 시간은 독자들의 시간에 틈입해 들어가는 시간이다.
한 권이 낡아 파본이 되고 흩어지더라도 그 책을 기억하는 독자가 존재한다면
작품의 시간은 죽지 않은 것이다.
나는 그런 작품을 쓸 수 있을까? 아직은 아니다.
아직 나는 유한한 시간의 덫에 갇혀 있고 시간의 늪에서 허덕이고 무언가에 쫓기듯 가위눌리는 시간 속에 살고 있다.
작품다운 작품을 써보지도 못하고 흘러가는 시간의 속도에 공포를 느끼고 있는....
세 번째 질문 : 눈멈의 경지에 관하여
‘눈멈’의 경지를 화원장 오스만은 “고요해지는 것이라네”라고 이야기했다.
나는 아직 고요해지지 않았다
고요해질 수도 없고....
‘눈멈’을 경험할 수도 없다.
내게 ‘눈멈’이란 아득히 먼 나라의 일, 불가능한 일....
도달할 수 없는 일...........
고요을 경험하지 못하는 현대인들의 전형.
나는 빨강이어서 행복하다! 나는 뜨겁고 강하다. 나는 눈에 띈다. 그리고 당신들은 나를 거부하지 못한다.
나는 숨기지 않는다. 나에게 있어 섬세함은 나약함이나 무기력함이 아니라 단호함과 집념을 통해 실현된다. 나는 나 자신을 밖으로 드러낸다. 나는 다른 색깔이나 그림자, 붐빔 혹은 외로움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를 기다리는 여백을 나의 의기양양한 불꽃으로 채우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내가 칠해진 곳에서는 눈이 반짝이고, 열정이 타오르고, 새들이 날아오르고,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 나를 보라. 산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를 보시라. 본다는 것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다는 것은 곧 보는 것이다. 나는 사방에 있다. 삶은 내게서 시작되고 모든 것은 내게로 돌아온다. 나를 믿어라
나는 빨강을 좋아한다. 타오르는..... 군더더기 없는 강렬함.
“나는 기억한다. 지배적이고 당혹스러워서 도리어 아름다운 빨강의 흔적을... 너무나 열정적이어서 공격적인, 너무나 에로틱해서 치명적인, 너무나 거룩해서 부끄러운, 너무나 뜨거워서 차가운, 너무나 매력적이어서 비참한 빨강들이 만들어 놓은 수많은 생의 풍경들을 기억한다.
.....
창가에 서서 놓쳐버린 빨강과 아직 오지 않은 빨강 사이 여전히. 내 안에 존재하는 빨강을 생각한다. 아직 온전히 물들지 않은 빨강을 기억하는 일, 결핍과 허기를 세상의 빨강으로 채우는 일, 그리하여 나는 빨강으로 타오르게 하는 일...
그러므로 그래서 아직 빨강이 아닌 내가
그러므로 그래서 온전한 빨강이 되는 일.
그러므로 그래서 이미 지나간 시간과 지금이라는 시간과 앞으로 다가올 시간을 빨강으로 채우고, 빨강으로 기억하는 일.. ”
『빨강 수집가의 시간』 본문 제1부 빨강의 기억 – 공간의 껍질 벗기기, 채우기, 기억하기 부분
어쩌면 아름다운 날들입니다.
사람들 속에 이글거리는 빨강을 봅니다.
당신과 나 그리고 우리, 익명의 빨강이 모여 온 세상을 빨갛게 달궈왔음을,
세상의 심장이 되어왔음을 깨닫습니다.
빨강이 내 안에서 깨어납니다.
빨강의 박동이 느껴집니다.
이제 당신을 던져야 할 때입니다.
당신의 바깥으로, 당신의 빨강 안으로
8월이다. 극한 폭염과 극한 폭우 사이...벌써 8월이라니....
나는 또 '빨강'처럼 살아야 한다. 나약함이 아닌 단호함으로... 무기력이 아닌 거부할 수 없는 힘으로...
진정한 '눈먼'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 다시 빨강으로.... 빨강 속으로.... 내 안으로... 내 바깥으로..
<빨강 수집가의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4 12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