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가을을 해치며 이 먹먹한 정적을 떠돌아다니는 작은 배.
존밴빌 < 바다 >
그러고 보면 우리는 슬픔의 작디작은 배들이 아닌가, 어두운 가을을 해치며 이 먹먹한 정적을 떠돌아다니는 작은 배.
우리 삶은 출생과 죽음이라는 고정된 양극 사이에 아른거리는 뉘앙스들이다. 여기 우리의 존재라는 그 반짝임은 비록 짧지만 무한히 복잡하여 겉치레, 덧없는 현현, 그릇된 출발과 더 그릇된 마무리로 이루어져 있으며-삶에서는 삶 자체 말고는 아무것도 끝나지 않는다.-이 모든 것이 자신은 자신이지 단순한 등장인물, 자신들이 모인 덩어리가 아니라는 전제에서 발생한다. 문학예술은 그런 복잡성을 표현하기를 바랄 수는 없지만, 스타일 즉 작동하는 상상력의 힘으로 그에 대응하는 복잡성을 구출할 수 있으며 삶과 닮은 상태라는 충분히 설득력 있는 환상을 제공할 수 있다
-자신의 문학관을 피력한 밴빌의 말
밴빌의 나이는 59세였고 < 바다>는 그의 열네 번째 장편소설이었다.
2005년 맨 부커상을 놓고 가즈오 이시구로와 경합을 벌일 때 <나를 보내지 마>가 2만 5천 부 가까이 팔린 반면 밴빌의 <바다>는 겨우 3천 부 조금 넘었다.... 1968년 미국에서 생활하던 중 만난 부인 재닛더넘은 글을 쓰고 있을 때의 그를 가리켜 “. 막 유혈이 낭자한 살인을 마치고 돌아온 살인자”같다고 말했다.
<바다>에서 맥스가 죽은 아내 애나를 떠올리며 이야기하듯, 사람이 남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따라서 어느 정도 알 수 있는 자기 자신을 이야기하는 것 외에는 삶을 이야기할 방법이 없다는 태도에서 밴빌의 모더니스트적 면모가 드러난다.
<바다>는 주인공 맥스가 아내를 잃고 어린 시절 머물렀던 바다를 찾아와 그곳에서 또 하나의 상실의 기억을 떠올리는 이야기다. 상실과 회상. 그런데 두 상실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한 명은 어릴 때 만난 여자아이, 또 한 명은 오랜 세월을 함께 한 부인, 어쨌든 잃어버린 사람이 둘 다 주인공의 삶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그것은 두 여자 모두 맥스가 “나 자신이 아닌 것” 되기 위한 “변형의 매개”였기 때문이다. 나 자신이 아닌 것이 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맥스의 경우 자신의 계급에서 탈출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어린 시절 자신이 좋아하던 아이의 가족이 “신”들로 보였던 것도 이런 계급적 차이 때문인데... 자기 계급에서 벗어나 나 자신이 아닌 것이 되고픈 마음은 훗날 결혼할 여자를 만나 사는 동안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내의 죽음 이후 어린 시절의 바다로 돌아온 맥스는 단지 아내가 죽었다는 사실 때문만이 아니라 자기 변형의 매개가 사라졌다는 사실 때문에 원래 나는 누구이고, 어떻게 달라졌고, 아내가 죽은 지금의 나는 누구인지 살펴보는 자기 탐사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
삶과 죽음 사이의 모호한 시간을 배회하듯, 자신의 뿌리였던 계급과 편입되고 싶었던 계급 사이, 원래의 나와 나 자신이 아닌 나 사이, 과거와 현재 사이의 회색 지대를 방황하며 끝없이 자기의 정체를 묻는다.
- 옮긴이의 말 중에서
제임스 조이스와 사뮈엘 베케트를 잇는 아일랜드 최고의 작가로 평가받고 있는 존 밴빌의 대표작이자 맨부커상 수상작. 유명 작가들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들이 대거 발표되어 '황금의 해'라는 별칭까지 붙은 2005년의 맨부커상은 존 밴빌의 열네 번째 소설인 <바다>를 수상작으로 선정하며, "아련하게 떠오르는 사랑, 추억 그리고 비애에 대한 거장다운 통찰"이라 평했다.
아내와 사별하고 슬픔을 달래기 위해 어린 시절 한때를 보낸 바닷가 마을로 돌아와 자신의 과거와 마주하게 된 미술사학자 맥스를 화자로 한 < 바다 >는, 자전적 경험과 함께 밴빌 특유의 섬세하고도 냉철한 아름다움을 지닌 문체로 슬프고도 아름다운 생의 궤적을 그려낸 소설로, '현존하는 최고의 언어 마법사'로 불리는 밴빌의 명성을 입증한다.
헨리 스콧 튜크, Henry Scott Tuke : Looking Out To Sea
첫 문장
그들은, 신들은 떠났다. 조수가 이상한 날이었다. 아침 내내 우윳빛 하늘 아래 만이 물이 계속 부풀어올라, 마침내 들어본 적이 없는 높이에 이르렀다.... 나는 다시는 수영을 하지 않으려 했다. 그날 이후로는, 새들은 가냘프게 울면서 급강하했다... 그들은, 그날 그 새들은 부자연 스로울 정도로 하얗게 보였다.... 높은 수평선을 허무는 돛은 하나도 없었다. 나는 수영을 하지 않으려 했다. 안 해, 두 번 다시는. 누군가 막 내 무덤 위를 걸어갔다. 누군가가
p 12
그 집 이름은 시더스(cedars)다. 옛날 그대로 왼편에는 여전히 삼나무 물기들이 뻣뻣하게 솟은 숲이 자리 잡고 있다. 타르 연기 때문에 원숭이 빛 갈색이 되어버린 나무의 줄기들은 악몽처럼 엉켜있다.... 내가 여기에 마지막으로 와본 지 50년도 더 되었는데 어쩌면 이렇게 변한 게 없을까. 동시에 실망한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사실 내가 왜 변화를 바라겠는가? 과거의 잡석더미 속에 살러 돌아온 사람이.
P. 16 그래, 사물들은 지속된다, 살아가는 것은 조금씩 퇴보하지만.
p19
나는 스테이션 로드를 따라 걸어가고 있다. 당시, 우리가 어렸을 때에는 삶이 많은 부분이 고요했다. 어쨌든 지금은 그렇게 보인다. 늘 곁에 머무는 고요, 살핌. 우리는 아직 모양이 정해지지 않은 우리의 세계 안에서 기다리며, 그 남자아이와 내가 서로를 살피듯, 들판의 병사들처럼 무엇이 다가올지 지켜보며 미래를 살피고 있었다.
담배를 광고하는 간판이 소금기에 녹슨 경첩에 매달려 바닷바람에 삐거덕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시더스의 대문이 내는 메아리 같았다. 아마 그 아이는 여전히 그 대문을 타고 놀고 있을 터였다. 그것들이 삐걱거린다. 이 현재의 대문이, 그 과거의 간판이, 오늘까지, 오늘 밤까지, 내 꿈들 속에서, 나는 스트랜드 로드를 따라갔다. 과거가 내 속에서 두 번째 심장처럼 고동친다.
닥터 토드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P 21 우리는 햇빛 속으로 걸어 나갔다. 새로운 행성에 발을 내딛는 느낌이었다. 우리 말고는 마우도 살지 않는 행성에... 우리는 집에 도착해서도 차 안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알고 있는 것 속으로 냅다 들어가기가 싫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갑자기 우리 자신에게, 서로에게 낯선 사람들이 되어있었다.... 그 울적한 여름 내내 갈매기들은 하루 종일 우리 지붕 꼭대기를 맴돌며, 모든 게 괜찮은 척, 잘못된 것이 없는 척, 세상이 계속되는 척하려는 우리의 시도를 조롱하는 듯했다.
P 26
“. 이게 뭔지 알아?” 애나는 씁쓸하게 힘을 주어 말했다.
“ 온당치 못하다는 거야. 바로 그거야.”
나는 내 눈이 속을 드러낼까 두려워 얼른 눈길을 돌렸다. 사람 눈이란 늘 다른 사람의 눈이다. 그 안에는 발악하는 미치광이 난쟁이가 웅크리고 있다. 나는 그녀 말이 무슨 뜻인지 안다. 이런 일은 그녀에게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뜻이었다. 우리에게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뜻이었다. 우리는 그런 종류의 사람들이 아니었다. 불행, 병, 이른 죽음, 이런 것들은 선한 사람들, 겸손한 사람들. 세상의 소금에게 일어나는 일이지, 애나에게, 나에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p 26
물이 끓자 주전자의 전원이 저절로 꺼졌다. 안에서 끓어오른 물이 언짢은 소리를 내며 가라앉았다.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었지만 나는 평범한 사물들의 잔인한 자기만족에 놀랐다.이니, 잔인한 것은 아니고, 자기 만족도 아니고, 그저 무심할 뿐이었다.
P 28
토드 씨의 진료실로 들어간 뒤로 나를 에워싼 감정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당혹감이었다. 당혹감. 그래. 공황에 사로잡혀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어디를 봐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느낌. 다른 것도 있었다. 우리가 빠져들게 된 냉혹한 상황에 대한 분노, 꼭 분노라기보다는 일종의 찌무룩한 짜증, 찌무룩한 울화였다. 마치 아주 더럽고 아주 지저분해서 함께 있는 것도 견디기 힘들었지만 그렇다고 벗어날 수도 없었다... 이날부터 앞으로는 모두 속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는 죽음과 더불어 살아갈 방법이 없을 테니까.
P 30
나를 이곳으로 끌고 온 것은 꿈이었다. 꿈에서 나는 시골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겨울이었다. 어스름 녘이었다. 아니면 침침하게 빛이 나는 묘한 밤이었는지 모른다... 나는 지금 내 나이이기도 하고 또 소년이기도 했다. 몸집이 크고 어줍은 소년, 그래 그리고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틀림없이 집이었다.
... 이유는 모르지만 대단히 중요한 여행이었기 때문이었다. 반드시 해야 하고 또 완수해야 하는 여행... 눈이 내리고 날은 저무는데 집에 갈 수 있다는 보장도 없는데, 하나밖에 없는 도로를 따라 겁도 없이 걸어가고 있었으니.,
그것이 꿈의 전부였다. 여행은 끝나지 않았고 나는 어디에도 이르지 못했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냥 걷기만 했다. 다 잃었지만 꿋꿋하게.... 적어도 뭔가를 했다는 확신을 느꼈다.‘
오랜만에 처음으로 밸리레스와 스테이션 로드의 집, 그리고 그레이스 가족, 그리고 클로이 그레이스를 생각했다.
어째서인지는 생각할 수 없지만, 마치 어둠 속에 있다가 갑자기, 소금으로 씻어낸 듯 옅은 빛을 튀기는 햇살 속으로 나선 것 같았다. 그것은, 그 행복하고 경쾌한 밝음은 겨우 1분밖에, 아니 1분도 채 지속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일러주었다.
P 35 바닷가에서는 모든 소리가 얼마나 납작하게 들리는지, 납작하지만 그래도 힘은 실려있다. 먼 데서 들리는 대포 소리처럼.. 모래가 소음기 역할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P38 하긴, 우리의 모든 순간들 가운데. 삶이 완전히, 완전히 바뀌지 않는 순간이 어디 있을까? 그 모든 변화 가운데 마지막, 가장 중대한 변화가 오기 전까지는...
우리는 아버지와 어머니와 나는 매년 여름 이곳에서 휴가를 보냈다. 물론 우리 같으면 그런 식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휴가차 이곳에 왔다.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때 말하던 것처럼 말하는 것이 지금은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매년 여름휴가차 이곳에 왔다.
우리가 세낸 샬레는 나무로 만든 실물 크기 주택 모형보다 작았고. 방은 3개. 천장을 따로 없고 루핑을 덮은 지붕의 경사진 아랫면이 전부였다. 그곳에서
아버지는 벨리모어에서 일했는데 저녁이면 기차를 타고 내려왔다. 말 없는 분노에 사로 잡혀.. 주먹에 꽉 움켜쥔 짐처럼 그날의 좌절을 들고 왔다. 어머니는 작은 목조 주택이 유포가 덮인 탁자에 앉아한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하루가 이울도록 불만을 키워가는 모습을.... 그들 모드 젊었다. 지금의 나보다도 훨씬.....
생각해 보면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모두가 지금의 나보다 젊은것. 심지어 죽은 사람들도 그곳에 있는 그들의 모습, 세상의 유년기에 원한에 사무쳐 소꿉장난을 하고 있는, 나의 가엾은 부모의 모습이 보인다.... 나는 그들을 미워하지 않았다. 아마 사랑했을 것이다. 다만 그들은 나를 방해하고, 미래를 바라보는 내 시야를 흐려놓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을, 나의 투명한 부모를 뚫고 그 너머를 볼 수 있게 된다.
p. 41
내 힘으로 할 수만 있는 일이라면, 나를 망신시킨 부모를 그 자리에서 지워버렸을 것이다. 뚱뚱하고 작고 헐벗은 얼굴의 어머니와 돼지기름으로 만든 듯한 몸을 가진 아버지를 바다의 물보라가 일으킨 거품처럼 터뜨려버렸을 것이다.
P. 44
오늘은 바람이 얼마나 사납게 불어대는지, 크긴 하지만 부드러워 아무런 효과가 없는 주먹으로 유리창을 쿵쿵 두드려댄다. 이것이 내가 늘 사랑해 온 바로 그런 가을 날씨, 광포하면서도 맑은 날씨다. 나는 가을이 자극적이라고 생각한다. 봄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듯이.
p. 48
내 딸 클레어는 내가 눈 속에서 집으로 걸어가던 꿈을 꾼 뒤 여기 벨리레스로 처음 내려올 때 나를 따라왔다. 내가 물에 뛰어들어 자살할 작정이라 걱정했던 것 같다.
p 49
인간 무리로부터 발산되는 뒤섞인 냄새들 때문에 괴로웠다. 아니.. 괴로웠다는 것은 틀린 말일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감지 않은 여자 머리카락에서 나는 갈색의 느낌을 주는 냄새는 좋아하니까. 괴팍한 독신녀인 내 딸은 보통 아무런 냄새를, 적어도 내가 맡을 수 있는 냄새는 풍기지 않았다. 제 엄마와 다른 여러 가지 가운데 하나였다. 내가 오래전 애나에게 끌린 것은 그녀의 야성적인 악취 때문이었다. 그것은 나에게 삶 자체를 졸인 듯한 향기였으며 아무리 강한 향수로도 완전히 가려지지 않았다. 괴상하게도 내 손에서 나는 바로 그 냄새. 애나의 흔적이 남아있다.
p50
내가 기억하는 마을의 많은 부분이 그대로 있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내 눈으로 봐야만 보이는 것이었지만.. 마치 오래전 연인, 세월에 의해 뭉툭해진 이목구비 뒤로 이전의 내가 그렇게 사랑했던 그 날렵한 얼굴 윤곽을 아직도 선명하게 더듬을 수 있는 연인을 우연히 만난 것 같았다. ”바로 저거야! 시더스“
P53
지금 나는 상처하여 상처를 받았으니 응석이 필요하다. 조롱당하는 낡은 시더스를, 사라진 스트랜드 카페를, 루핀스와 필드였던 곳을, 이 모든 과거를 살금살금 지나갈 수 있도록 해줘. 여기서 멈추면 녹아서 부끄러운 눈물의 웅덩이가 될 것 같단 말이야.,
가을 해가 비스듬하게 마당으로 떨어져 자갈들이 푸르스름하게 반짝거렸다. 현관의 제라늄 화분에는 이 계절의 마지막 꽃들, 솔직히 말하면 이 세상의 마지막 꽃들이 높고 무성하게 피어있었다.
p 61
오후의 빛은 이제 더러워졌고 겨울 느낌을 풍겼으며 수평선에는 진창처럼 푸르스름한 구름의 벽이 빽빽하게 쌓여가고 있었다. 파도는 해안선을 따라 자신의 영토를 확보하려고 얌전한 모래밭을 할퀴고 헤적였지만 연거푸 실패했다... 딸아이는 외투에 푹 파묻힌 채 온기를 얻으려고 두 손으로 찻잔을 감싸 쥐고 있었다. 그 아기 같은 손톱, 그 옅은 라일락 빛깔을 보자 마음이 알싸했다. 자식은 언제까지나 자식일 뿐이다.
나는 필드. 샬레, 뒤그넌 가족 이야기를 했다.
˝과거 속에서 사시네요.˝ 클레어가 말했다.
나는 신랄하게 대꾸하려다가 말을 끊었다. 사실 아이 말이 옳았다.
삶, 진정한 삶이란 투쟁, 지칠 줄 모르는 행동과 긍정, 세상의 벽에 뭉툭한 머리를 들이대는 의지, 그런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돌아보면 내 에너지의 많은 부분은 늘 피난처, 위안, 또 그래, 솔직히 인정하거니와, 아늑함, 그런 것들을 찾는 단순한 일에 흘러 들어가 버렸다. 이것은 충격까지는 아니라 해도 놀랄 만한 깨달음이었다. 전에는 나 자신을 단검을 입에 물고 다가오는 모든 사람과 맞서는 해적 같은 사람으로 보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망상이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숨겨지고, 보호받는 것, 그것이 내가 진정으로 원하던 것이었다. 자궁처럼 따뜻한 곳으로 파고들어 거기에 웅크리는 것, 하늘의 무심한 눈길과 거친 바람의 파괴들로부터 숨는 것. 그래서 과거란 나에게 단지 그러한 은둔일 뿐이다. 나는 손을 비벼 차가운 현재와 더 차가운 미래를 털어내며 열심히 그곳으로 간다. 하지만 정말이지 그것이, 과거가 어떤 존재를 가지고 있을까? 결국 과거란 현재였던 것, 한때 그랬던 것, 지나간 현재일 뿐이다. 그 이상이 아니다. 그래도.
P 71
여기 아래, 바닷가의 밤의 정적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그러니까 내 방, 심지어 집 전체의 정적에 내가 그 특별한 것을 가져오는지도 모르겠다는 말이다.
이 정적은 밀도가 높으면서 속이 텅 빈듯하다... 이 정적은 어린 시절 병실에서 알게 된 정적과 같다. 그 시절의 병은 특별한 곳, 동떨어진 곳, 다른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곳이었다
병은 지금 내가 있다고 느끼는 곳과 비슷하다. 어디로부터도, 누구로부터도 멀리 떨어진 곳.
... 그러고 보면 우리는 슬픔의 작디작은 배들이 아닌가. 어두운 가을을 헤치며 이 먹먹한 정적을 떠돌아다니는 작은 배.
P 87
그레이스에게 육감적으로 짓눌리는 환상, 나는 그녀의 악마 연인인 동시에 그녀의 아이였다.
갈망이 솟구쳐 올라 나의 존재의 뿌리까지 삼켜버렸다.
p91
휘발해 버릴 것 같은 느낌이다.... 어린 시절 나는 겨울 저녁이면 라디오 옆에 웅크리고 앉아 해상 일기예보에 귀를 기울이며 뱃사람들이 집채만 한 파도와 싸우는 모습을 그려보았다. 어른이 되어서도 우리의 멋지고 오래된 집에서 애나와 함께 살면서. 가을 강풍이 굴뚝 속에서 신음을 토하고 파도가 하얀 거품을 끓어 올리며 바다의 벽 너머로 밀려올 때면 같은 느낌을 받곤 했다.... 다수의 남자들이 자신의 운명에 실망하여 사슬에 묶인 채 조용히 절망 속에서 시들어가지 않는가.
물론 당신 어렸던 내가 그 간절한 기대 속에서도 스스로 예측할 수 없었던 것들도 있다, 설사 예측할 능력이 있었다 해도. 상실, 슬픔, 음침한 낮과 잠 없는 밤, 이런 놀라운 것들은 예언적 상상의 사진판에는 기록되지 않는 경향이 있다.
P. 94 그러니까 나는 미래를 기대했다기보다는 미래에 향수를 품은 것이다. 나의 상상 속에서 다가올 것이 현실에서는 이미 가버린 것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고대했던 것은 실제로 미래였을까? 아니면 미래 너머의 어떤 것이었을까?
사실 그, 모두가 과거와 가능한 미래와 불가능한 현재가 뒤섞이기 시작했다. 애나가 낮시간의 두려움이 밤의 공포로 이어지던 잿빛의 몇 주 동안 나는 저승에서 살았던 것 같다.
햇빛이 비쳐드는 거실에서 그레이스 부인과 함께 서 있을 때, 또는 영화관에서 클로이와 앉아있을 때, 나는 그곳에 있으면서도 있지 않았고 나 자신이면서도 유령이었으며 그 순간 속에 갇혀있으면서도 어떻게 된 일인지 떠나는 지점을 맴돌고 있었다. 어쩌면 삶의 모든 것이 삶을 떠나기 위한 긴 준비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 끝도 없이 이어지던 시월의 밤에 우리는 어둠 속에 나란히 누워 마치 쓰러져버린 우리의 조각상들처럼 누워, 견딜 수 없는 현재로부터 유일하게 가능한 시제로, 과거로, 머나먼 과거로 탈출을 시도했다... 마치 오래전 함께 살았던 도시의 성벽을 따라 팔짱을 끼고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두 고대인처럼
P101
뛰어, 뛰라고! 오직 하층 계급들... 다른 모든 사람들은 마치 인생이 춤이라도 되는 것처럼..
나는 마치 다른 매체로 뛰어들 듯 애나와 그녀의 아버지 찰리의 수상쩍은 세계로 뛰어들었는데... 나는 이 흥미진진한 심연의 주민이 되어달라는 권유를 에나로부터 받고 있다. 애나가 나에게 제안한 것은 결혼이라기보다는 나 자신의 환상을 실현할 기회였다.
필드에서 전에 함께 놀던 친구들, 이제는 같이 놀지 않게 된 친구들은 나의 탈주에 분개했다. ˝걔는 지금은 품위 있는 새 친구들하고만 하루 종일 놀아요.˝ 어느 날 나는 어머니가 이전 친구 어머니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어머니는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 남자아이는 말이죠, 벙어리예요.˝어머니는 나한테는 왜 그레이스 가족한테 양자로 들여달라고 빌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나는 상관없어.˝ 어머니는 말했다. ˝너를 내 발아래서 빼내달라고 하렴.˝ 그러면서 어머니는 흔들리지 않는 눈, 깜짝거리지도 않는 그 가혹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아버지가 떠난 뒤 자주 나를 바라보던 눈, 마치, 이번에는 네가 나를 배반하겠지, 하고 말하는 듯한 눈이었다. 나도 내가 그럴 거라고 생각했지만.
P105
우리의 여름 세계의 사회구조는 지구라트처럼 확고하여 위로 올라가기가 어려웠다. 휴가용 별장을 소유한 가족이 맨꼭대기였고, 그다음이 호텔에 묵을 여유가 있는 사람들, 그다음이 집을 세내는 사람들, 그다음이 우리였다. 내가 용케도 그 가파른 사회적 계단의 밑바닥으로부터 그레이스 가족 수준까지 올라갔다는 것은 코니 그레이스를 향한 나의 은밀한 감정과 마찬가지로 특별함의 상징, 선택되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선택된 자라는 상징이었다. 신들이 나를 골라 은총을 베푼 것이었다.
p113
내 안에서 섬세하게 균형을 잡고 있던 것이 깨져버릴 것 같아 허리를 폈다, 갑자기 김이 빠져버린 듯 불쾌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흥분은 사라져 버렸다. 어리둥절한 느낌이었고 묘하게 화가 났다. 나의 내밀한 자아가 침해당하고 능욕당한 것 같았다. 신성한 순간은 곤혹스러울 정도로 짧았다. 내 탐욕스러운 눈길 아래서 그레이스 부인은 여자에서 다이몬으로 변했다가 순식간에 한낱 여자로 변해버렸다. 그녀 코니 그레이스는 남편의 아내, 그녀 자식들의 어머니였다가 다음 순간에는 무력한 숭배의 대상, 얼굴 없는 우상, 나의 욕망의 힘이 불러낸 고대의 본원적인 우상이 되었다. 그랬는데 그녀 안의 뭔가가 갑자기 늘어져버렸고 돌연 나는 아찔한 혐오와 수치를 느꼈다.... 그녀는 이제 다이먼 유혹자가 아니라 그냥 그녀 자신, 죽을 운명을 타고 태어난 여자에 불과했다.
나의 혼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에게 빛을 발하는 것은 이이 사라진 것들의 그림자들 사이에서 그 빛이 아무리 퇴색했다 해도 신성한 그녀가 아니라 죽을 수밖에 없는 그녀다.
내 기억 속 그녀 자신의 화신으로 존재한다. 내 기억 속 풀이 덮인 둑에 누워있는 여자와 땅이 이제 그녀의 것으로 간직하고 있는 흩어진 먼지와 마른 골수.. 이 두 가지 가운데 어느 것이 더 현실적인가? 다른 곳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녀는 틀림없이 살아남아 있을 것이다.
p 114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사람은 가지를 치고 흩어진다. 그것은 지속되지 않고 지속될 수 없다. 그것은 불멸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죽을 때까지 죽은 자를 이고 갈 뿐이다. 그런 다음에는 누군가가 우리를 잠시이고 가고, 그런 다음에는 또 누군가가 우리를 이고 갔던 자들을 이고 가고 이렇게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먼 세대들로 이어져간다.
... 나는 애나를 기억하고, 클레어는 애나와 나를 기억할 것이며 그 뒤에 클레어도 사라질 것이고, 클레어를 기억하지만 우리는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겨날 것이다. 그것으로 우리는 최종적으로 소멸한다. 물론 우리 가운데 어떤 것은 남을 것이다. 바랜 사진, 머리카락 한 타래, 지문 몇 개, 우리가 마지막 숨을 쉰 방의 공기에 들어있던 원자 몇 개. 그러나 이 가운데 어느 것도 우리, 지금 우리이고 전에 우리였던 것은 아닐 것이다. 디민 죽은 자의 먼지일 뿐이다.
P 117
내가 신들 사이에 있다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된 것은 칼로 그레이스 때문이었다. 그는 멀리 떨어져 있었고 즐거운 표정으로 무관심한 척했지만 결국 우리 모두를 지배하는 사람처럼 보이는 것, 그는 웃음을 터뜨리는 신, 우리 여름의 포세이돈이었으며 그의 손짓에 따라 우리의 작은 세계는 순순히 그 행동과 몫을 조절해 나갔다.
P 121
관찰하고 관찰당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매일 아침 욕실 거울로 나 자신을 오랫동안 냉혹하게 바라본다는 이야기를 해야겠다. 거울에 비친 모습을 좋아하던 때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나는 나 자신의 패러디에 옆으로 밀려나버렸다. 분홍빛이 섞인 잿빛의 축 늘어진 고무로 만든 핼로윈 가면을 뒤집어쓴 애처롭게 헝클러 진 형체.
P 125
현실인지 상상인지 모르겠지만... 바닷가에서 햇빛을 받으며, 단단하게 융기한 이 판임 같은 모래밭에 앉아 손에 크고 부드러운 파란 돌을 쥐고 있었다. 돌을 내 입술에 갖다 대는 것 같았다. 그 짠맛은 바다의 멀고 깊은 곳, 먼 섬들, 시든 잎들 밑의 사라진 장소들, 생선의 연약한 뼈대. 바닷가에 밀려온 해초, 부패물에서 나는 것 같았다.
물가에서 내 앞의 작은 파도들이 살아있는 목소리로 말을 한다. 어떤 고대의 재난, 트로이의 멸망, 아틀란티스의 침몰된 간절한 목소리로 소곤거린다. 모든 것이 차고 넘쳐, 소금기를 풍기며 반짝거린다. 노 끝에서 물방울이 부서져 은빛 줄기로 흘러내린다. 멀리 검은배가 보인다. 매 순간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다. 나는 그 배에 타고 있다. 너의 사이렌의 노래가 들린다. 나는 거기에, 거의 거기에 이르렀다.
알베르트 에델펠트, <해안에서 노는 소년들>, 1884년
Albert Edelfelt “Boys playing on the shore” 1884 oil on canvas 90 cm × 107.5 cm Ateneum, Helsinki, Finlan
<제2 부>
p133
클로이는 내 기억의 눈앞의 어떤 고정된 거리에서, 늘 초점 바로 너머에서 흔들리고 있다. 내가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과 같은 속도로 뒤로 멀어지고 있다. 하지만 앞으로 나아가 만나려고 하는 대상이 점점 빠르게 작아지기 시작한 이후로는 왜 그 애를 도무지 따라잡지 못하는 것일까. 지금도 길에서 그 애일 수도 있는 누군가를 본다... 똑같은 반구형 이마에 흰색에 가까운 머리카락, 똑같이 저돌적이면서도 묘하게 머뭇거리는 안짱다리 걸음... 그러나 늘 너무 어리다. 너무너무 어리다.... 나를 당황하게 하는 수수께끼는 이거다.
어떻게 그 애는 한순간은 나와 함께 있다가 그다음 순간에는 사라질 수 있을까? 어떻게 다른 곳에, 절대적으로 다른 곳에 있을 수 있을까? 이점을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다...
일단 내가 있는 자리에서 사라지면 그 애는 당연히 허구, 내 기억 가운데 하나, 내 꿈 가운데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클로이는 나와 떨어져 있다 해도 늘 견고하고 고집스럽고 불가해하게 그녀 자신으로 남아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실제로 떠난다. 실제로 사라진다... 나 역시 떠날 수 있다. 본래 있지도 않았던 것처럼 되어버릴 수 있다.
p 137
어린 시절에는 행복이 달랐다. 그때는 그냥 축적하는 것. 뭔가를- 새로운 경험을, 샤로운 감정을- 가지는 것, 그리고 그것을 마치 광택이 나는 기와인양 언젠가 놀랍게 마무리될 자아라는 누각에 올려놓는 일이 중요했다. 쉽사리 믿지 않는다는 것, 그것 역시 행복에서 큰 부분을 차지했다. 자신의 단순한 행복을 완전히 믿을 수 없는 그 행복한 상태말이다.
p 138
애나가 마침내 가버리고 난 뒤 이곳에 머물러왔던 일요일 저녁이었다... 애나가 죽은 뒤로 잡은 속이 텅 비어버렸다... 애나는 자기 병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못하게 했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다고 생각을 했지만, 마지막 단계에 이르기 전에는 그 일이, 그녀에게는 게임이었다는 생각까지는 하지 못하게 했다. 이제 그 게임은 끝났고, 다른 게임이 나에게는 시작되었다. 이것이 살아남은 자가 겪어야 하는 미묘한 일이었다.
p 145
그녀가 서서히 죽어가던 그 열두 달의 가을과 겨울 내내 우리는 바닷가 집에서 두문불출했다. 날씨는 온화하여 거친 날이 없었다. 부서질 것 같지 않던 여름이 눈에 띄지도 않게 한 해의 끝자락에 자리 잡은 안개 덮인 고요에, 딱히 어느 철이라 말할 수 없는 것에 자리를 내주었다.
애나는 봄이 오는 걸 두려워했다. 그 모든 감당할 수 없는 법석과 소란이, 그 모든 생명이 두렵다,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우리 주위에는 깊고 꿈같은 정적, 진흙처럼 부드럽고 밀도 높은 정적이 쌓여갔다.
.. 나는 그녀가 소리도 없이 거대한 낡은 욕조 속으로 마침내 얼굴이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을 때 미끄러져 내려가, 마지막 긴 물의 숨을 쉰다는 상상을 했다.... 생명의 소리들을 찾아 필사적으로 귀를 기울이곤 했다. 물론 내 마음속 더럽고 배신이 가득한 어떤 방의 나는 그녀가 저질러버렸기를, 모든 것을 정리해 버렸기를 그녀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도 그랬기를 바랐다.
P150
나는 늘 둥지와 알 사이의 대비에 놀랐다. 그러니까 아무리 잘 또는 심지어 아름답게 지은 둥지라 해도 어쩔 수 없이 드러나고 마는 우연의 느낌과 알의 완전성, 그 원시적인 충실성 사이의 대비였다. 알은 시작이기 이전에 절대적 결말이었다. 알이야말로 자족 그 자체다. 나는 깨진 알, 그 작디작은 비극을 보는 걸 싫어했다.
호아킨 소로야 , <바다를 바라보는 소녀>, 1910년, 캔버스에 유채, 69x100cm, 개인소장
Niña en la playa, Valencia
p154
클로이와 사랑에 빠지고 있었다. 그것은 이미 이루어진 일이었다. 불안한 행복을 느꼈다. 이 사랑을 반드시 할 수밖에 없다는 걸 아는 사람이 험한 출발점처럼 느끼는 감정이었다... 클로이와 함께한 그 몇 주는 내게 대체로 황홀한 모욕이었다. 클로이는 사람을 혼란에 빠뜨리는 자족적인 태도로 나를 그녀의 신전을 찾은 탄원자로서 받아들였다. 나에게 가장 충실하게 관심을 쏟을 때조차 늘 흠, 자기 몰입의, 부재의 반점이 있었다... 내가 그 애의 눈길에서 그냥 희미해져 결국 투명해져 버리는 시간이 있다는 생각을 견딜 수 없었다.... 냉혹한 조롱이었을까. 아니면 진짜로 텅 빈 순간이었을까?
p158
클로이가 더럽혀지지 않은 상태로 유지되어야 할, 그러니까 지나친 자기 인식, 실제로는 나에 대한 너무 예리한 인식에 의해 오염되지 말아야 할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다름이었다. 그녀에게서 다른 사람의 절대적 타자성을 처음으로 경험했다.
P 172 클로이, 그 애의 잔인함, 한밤의 수영, 그 애가 잃어버린 샌들, 무도장 입구의 그날밤, 신데렐라의 구두. 모두 사라졌다. 모두 잃었다. 상관없다. 피곤하다.
p200
창의 우묵한 곳에 앉아 어두워지는 날을 지켜보았다, 헐벗은 나무들은 지는 해의 마지막 불길을 배경으로 검은색을 호 보였고 떼까마귀 들은 떼를 이루어 선회하고 하강하면서 시끄럽게 밤을 보낼 일을 의논했다. 나는 애나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일부러 그녀 생각을 한다. 하나의 훈련이다. 그녀는 칼처럼 내게 박혀있는데도 나는 그녀를 잊기 시작한다... 언젠가는 캔버스 전체가 텅 빌까?
P201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다. 노스케 테 입숨(nosce te ipsum - 너 자신을 알라). 이 명령은 맨 처음 어떤 선생님이 그 말을 따라 할 것을 요구했을 때부터 내 혀에 재 맛을 남겼다. 나는 나 자신을 알았다, 너무 잘 알았다. 그리고 내가 아는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늘 독특하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으며, 나의 가장 강렬한 소망은 독특하지 않은 어떤 존재가 되는 것이었다.... 나는 애나가 나의 변형의 매개가 될 것임을 즉시 알아보았다.
그녀는 나의 비틀린 곳들을 바로 펼 수 있는 놀이공원의 거울이었다. “ 왜 당신 자신이 되려 하지 않아?” 애나는 우리가 함께 지내던 초기에 커다란 세상을 파악하려는 내 서툰 시도가 안쓰러워 그렇게 말하곤 했다. 그녀가 나 자신을 알라고 하지 않고 나 자신이 되라고 한 것에 주목하라.
너 자신이 돼라. 물론 그 의미는 뭐든 네가 원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었다. 그것이 우리가 맺은 협정이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우리라고 규정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짐을 서로에게서 덜어주기로 한 것이다....
.. 어쨌든 내게 남겨진 문제는 바로 아는 것의 문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이 아니라면 우리는 누구인가? 철학자들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통해 규정되고 우리이 존재를 갖게 된다고 말한다.
장미는 어둠 속에서 붉은가?
들어줄 귀 없는 머나먼 행성의 숲에서 쓰러지는 나무가 우지끈 소리를 낼까?
애나가 아니라면 누가 나를 알 수 있을까? 내가 아니라면 누가 애나를 알 수 있을까?
우리는 행복했다. 아니 불행하지 않았다. 고함, 비명, 날아다니는 접시, 우연한 따귀. 더 우연한 주먹질, 우리에게도 그런 것들이 다 있었다. 싸움이 끝난 뒤 겸연쩍게 웃었다. 우리는 느끼기 위해서 싸웠다. 우리가 자력으로 생겨난 생물들이라고 느끼기 위해서... 나는 그런 생물이었다.
Edvard Munch Girl at the Beach 1896 Aquatint with scraper and drypoint on zinc Munch Museum
p 206
어느 반짝거리던 화창한 아침에 그레이스 부인이 로즈의 머리를 감겨주는 모습을 우연히 보았다.
기억은 움직임을 싫어한다.
사물은 정지된 상래로 유지하는 쪽을 더 좋아한다. 로즈는 허리를 앞으로 구부리고 있고 머리카락은 얼굴에서 늘어져 길고 검은 쐐기처럼 반짝거리고... 그레이스 부인은 파란 공단 드레싱 가운에 파란 슬리퍼를 신고 있다. 가엾은 로지... 나는 그녀 앞에 그런 수식어가 붙지 않는 경우를 생각할 수가 없다. 기껏해야 스무 살이었다. 늘씬하고 허리는 좁고 엉덩이는 길었다. 창백하고 평평한 이마... 비단 같으면서도 음산한 우아함을 지닌.. 한밤중 같은 검은 머리와 그 하얀 피부, 그 가루로 만든 꽃처럼 피어오르는 피부는 아무리 강한 햇빛이나 거친 바닷바람도 더럽힐 수 없을 것 같았다.... 형식상 가정교사였으나 클로이와 마일스에게 로지는 분명한 적이며, 잔인하게 굴 수 있는 장난상대, 조롱의 대상이었다.
p215 :
로즈는 자신이 돌보고 있는 아이들의 아버지를 사랑하고 있었다. 로즈와 그레이스 부인의 대화 가운데... 사랑, 바보 같다. 그레이스 씨 정도만 알아들을 수 있었다. 로즈가 쥐고 있던 손수건과 그레이스 부인의 단단한 종아리 뒤쪽 가늘고 파란 줄 세공 같은 정맥들이다.
로즈와 그레이스 씨.. 그들 사이의 모든 일을 그렇게 수월하게.. 부드럽고 뻔뻔스럽게 감춘 것
이제 칼로 그레이스의 태평함 자체가 범죄적 의도의 증표처럼 보였다. 냉담한 유혹자가 아니라면 어떻게 그렇게 웃음을 터뜨리고 놀릴 수 있을까?
... 그레이스 씨 앞에서 로즈의 온화하고 수줍은 태도는 타락한 수녀의 행동거리처럼 보였다.
무엇에 내몰려 로지는 그레이스에게 고백했을까? 대문 기둥밖과 대문밖 좁을 길에 마일스가 분필로 써놓은 낙서.. RV는 CG를 사랑한다.. 그 낙서 옆의 유치하고 추악한 그림
P218
조수는 해변을 기어올라 모래언덕까지 차올랐다. 클로이와 마일스와 나는 한 줄로 나란히 앉아 말없이 물의 꾸준한 진전을 지켜보고 있었다.... 우리 아래쪽 모래언덕이 우묵하게 파인 곳애 로즈가 두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비치타월 위에 누워 잠들어있었다.
“로즈가 물에 빠져 죽었으면 좋겠어.” 클로이가 그 애 특유의 날카로운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P 220
마지막 말, 이른 아침. 동트기 직전 애나는 의식을 회복했다.
그러니까 나는 걷고 그녀는 혼수상태에 빠져 내 옆자리에 누워있었지만 그럼에도 움직여서 나와 보조를 맞추고 있었다. 단단한 공기 위릃 미끄러져 갈대벌판으로 가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잠을 깨더니 가물거리는 듯한 야간등 불빛아래서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보았다.
나는 경외감과 놀라움이 뒤섞인 감각에 사로잡혔다. 심장이 액체처럼 느릿느릿 쿵쿵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순간을 감당할 수 없어 도와달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애나는 나를 여전히 놀란 표정으로 여전히 의심하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애나는 짐승의 발톱 같은 느낌으로 내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 원숭이 같은 손아귀가 지금도 나를 움켜쥐고 있다.... 내가 평생 지금처럼 이렇게 다급하여 집중하여 그녀를 본 적이 있던가? 그렇게 보는 것만으로도 그녀를 여기에 잡아둘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내가 눈을 움짤이지 않으면 그녀가 떠나지 못할 것처럼... 그녀는 숨을 헐떡거렸다. 숨에서 온화하고 메마른 악취가 났다. 내가 이름을 불렀지만 애나는 자기는 애나가 아니라는 것,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내가 알아야 한다는 듯이. 다시 눈을 떠서 노려보았다. 명령하듯 엄한 표정으로.
“가지 마, 나와 함께 있어.”나는 얼빠진 소리를 했다. 그녀는 초조하게 고개를 저으며
“저 사람들이 시계를 멈춰 세우고 있어.” 가느다란 실 같은 속삭임, 모의를 꾸미는 듯한 목소리였다. “내가 시간을 멈추었어.”:그러더니 다 안다는 듯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웃음을 지었다.
P222
마일즈는 클로이가 있는 곳에 이르자 팔로 어깨동무를 하고 클로이의 머리에 자기 이마를 갖다 댔다. 세상에 등을 돌린 채 서로를 감싸는 두 아이. 이윽고 두 아이는 일어서서 첨벙첨벙 바다로 들어갔다. 기름처럼 매끄러운 바다는 그들의 움직임에도 거의 부서지지 않았다. 두 개의 머리가 희끄무레한 파도 위에서 까닥이며
밖으로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너무 멀어 창백한 하늘과 창백한 바다 사이에서 창백한 점으로 보였다. 이윽고 점 하나가 사라졌다. 그 뒤에는 모든 것이 아주 빠르게 끝나버렸다. 물의 철썩임, 약간의 하얀 물, 주위의 다른 모든 것보다 더 하얀 물, 무관심한 세계가 닫히고 있었다.
p233
. 올해 11월의 빛은 겨울 이상의 어떤 것을 예시하는 듯했다.... 밤이다. 술병을 외투밑에 집어넣고 어떤 웅장하고 보편적인 계시를 기다리며 가로등의 흔들리는 광채아래 서있다가..
멀리 바다에는 빛이 있는 것 같았다. 그 빛들로 다가가려는 결심. 바다로 걸어 들어가 그 빛들을 만날 수 있는 곳까지 헤엄쳐 나아가겠다는 생각. 그러나 발을 헛디뎌 관자놀이를 돌에 찧고 말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의 홈과 깔때기로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p 240
. 베버수어양이 처음으로 내 이름을 불렀다는 사실에 희미하게 충격을 받는다. 그렇다고 내가 그녀를 로즈라고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클로이의 죽음이 자신의 탓이라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나는 클로이가 먼저 물에 잠겼고 마일스가 그 애를 구하려고 뒤따라 들어갔다고 믿는다.
“그 사람들 인생은 박살이 났죠. 칼로가 먼저 동맥류로 가고 코니가 자동차 사고로 갔죠.”
코니는 자살할 사람이 아니에요
그들은 그녀에게 그 일 이후에도 잘해주었다. 그녀가 시더스에 자리 잡을 수 있게 했다.
p 242
“내가 보고 싶은 건 그 사람이에요. 코니 그레이스 부인”
그녀는 다시 안쓰럽다는 듯 나를 흘끗 본다.
“그레이스 씨가 아니었어요. 나하고 말이에요.” 그녀가 말한다
“그 생각은 못했죠?”
나는 그날 나무 밑에, 내 밑에 서서 흐느끼던 그녀를 생각한다. 손에 뭉쳐 쥔 손수건
“ 절대 그레이스 씨는 아니었어요.”
p 242
애나는 동트기 전에 죽었다. 그때 나는 그 자리에 없었다. 아침의 광택이 나는 검은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러 요양소 계단까지 나가 있었다.
그 순간 오래전. 그해 여름 밸리레스의 바다에서 맞이했던 순간을 기억했다. 완벽하게 투명한 물에 허리까지 담근 채 서 있었다. 바다 바닥에 늑골 무늬를 그리고 있는 모래가 보였다. 이질적인 내 발, 그곳에 서 있는데 갑자기 바다 전체가 솟아올랐다. 단순한 파도가 아니라 깊은 곳으로부터 올라온 것처럼 보이는 부드럽게 굽이치는 너울이었다. 마치 저 밑에서 거대한 뭔가가 몸을 흔든 것 같았다. 몸이 잠깐 해변 쪽으로 밀려갔지먼 다시 전처럼 두 발로 섰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저 큰 세상이 또 한 번 무심하게 어깨를 으쓱한 것일 뿐이었다.
그때 간호사가 날 부르러 왔고, 나는 몸을 돌려 간호사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마치 바닷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 같았다.
바다는 쉼 없이 움직인다. 바다는 무언가를 은폐하면서 무언가를 드러내는 존재다.
바다아래로 가라앉는 것들과 바다 위로 떠오르는 것들... 참혹한 바다와 아름다움의 바다, 죽음의 바다와 삶의 바다, 소멸과 생성의 바다... 황홀한 모순이면서 냉소적 모욕 같은 그 바다는.... 결코 쉬지 않는다
단 한순간도 멈추지 않는다. 밀려오고 밀려가기라는 일관된 질서. 그 질서가 도리어 무서운...
맥스. 나 아닌 다른 존재가 되기를 갈망했던 소년 맥스는 코니 그레이스. 클로이. 로지, 애나와의 관계 속에서 끝없이 변화한다. 공식적인 결말로는 애나의 남편이었지만.
그 레이스가의 사람들은 맥스에게는 '신'들이었다. 다른 세계. 너머의 세계에서 온. 사다리를 내려주어 자신을 구원해 줄 신.
상실을 거친 후 다시 돌아온 바다에서 늙은 맥스는 자신을 돌아본다.
삶, 진정한 삶이란 투쟁, 지칠 줄 모르는 행동과 긍정, 세상의 벽에 뭉툭한 머리를 들이대는 의지, 그런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돌아보면 내 에너지의 많은 부분은 늘 피난처, 위안, 또 그래, 솔직히 인정하거니와, 아늑함, 그런 것들을 찾는 단순한 일에 흘러 들어가 버렸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사람은 가지를 치고 흩어진다. 그것은 지속되지 않고 지속될 수 없다. 그것은 불멸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죽을 때까지 죽은 자를 이고 갈 뿐이다. 그런 다음에는 누군가가 우리를 잠시이고 가고, 그런 다음에는 또 누군가가 우리를 이고 갔던 자들을 이고 가고 이렇게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먼 세대들로 이어져간다.
... 나는 애나를 기억하고, 클레어는 애나와 나를 기억할 것이며 그 뒤에 클레어도 사라질 것이고, 클레어를 기억하지만 우리는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겨날 것이다. 그것으로 우리는 최종적으로 소멸한다
누군가가 완전하 소멸한다는 것은 기억에서 조차 잊히는 일이다.
맥스는 애나를 최종적으로 소멸시키지 않기 위하여 떠올리려 한다. 의식처럼, 숙제처럼
기억이란 참 힘이 세다.
이미 사라진 모든 것들이... 기억하는 순간 다시 제자리를 찾는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가슴 한 구석에 잠복되어 있었던 것일까? 뇌의 그늘진 곳에 웅크리고 있었던 것일까?
바다... 난해하고 반전이 있는..... 결국 클로이와 마일스의 죽음에는... 잘못된 정보를 알려준 맥스 자신의 책임이 크다. RV와 CG의 관계가 맥스의 추측처럼 칼로 그레이스 씨가 아니었다는 반전... 그 반전 앞에 다시 책의 중반부로 돌아가서 읽기를 몇 번이고 반복했는지 모른다. 결코 호락호락하게 놓아주지 않는 책, 집요할 정도로 독자를 끌어당기는 책.
존밴빌의 <바다>는 실제 바다와 같은 책이다. 넘실거리고 집요하게 다가오다가 순식간에 잔잔해져 버리는.
수많은 이들의 숨을 삼키고도 아무렇지 않게 밀려오고 밀려가고를 반복한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본래의 질서대로.
그 행간 어딘가에 수많은 움직임들이 숨어있다. 행간에 숨은 집요한 움직임을 읽어내기 위해서는 먼저 바다의 마음이 되어야 했다. 존밴빌이 한 편의 소설을 써 내려갈 때의 모습을 그의 아내는 “. 막 유혈이 낭자한 살인을 마치고 돌아온 살인자”처럼 보였다고 이야기했다. 그의 작품을 읽다 보면 막 유혈이 낭자한 살인을 마치고 돌아온 문학적 살인자의 모습이 보인다.
바다...... 상실과 회한, 탐닉과 조롱, 신들과 신을 동경하는 이들, 무심함, 질서와 무질서....
인생의 바다를 항해하고 있다. 그의 말처럼 슬픔의 작디작은 한 척의 배가 되어. 먹먹한 정적을 떠돌아다니는 배.. 방향 없이, 끝없이..
그러고 보면 우리는 슬픔의 작디작은 배들이 아닌가, 어두운 가을을 해치며 이 먹먹한 정적을 떠돌아다니는 작은 배.
이천이십오 년의 항해가... 마무리되어가고 있다. 그 바다의 끝. 도달해야 할 그 바다의 끝을 생각한다./려원
<빨강 수집가의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4. 12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산문집/ 2022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