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에서 들려오는 자기만의 북소리에 귀 기울이기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 우리 앞에는 수많은 새벽이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사소한 일로 삶을 낭비한다. 정직한 사람은 열 손가락 넘게 헤아릴만한 것이 거의 없다. 그래도 행여 손가락이 모자란다면 발가락을 쓰면 될 테고, 남는 것은 하나로 묶어버리면 된다. 간소하게, 간소하게, 간소하게 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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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소로우의 < 월든> 이 법정 스님의 < 무소유 >와 함께 평생 읽어야 할 고전처럼 맹신되던 때가 있었다. 나도 한 때 <월든>의 맹신자 중 한 사람으로 제대로 된 번역서를 찾기 위해 번역자가 다른 <월든>을 모두 빌려서 꼼꼼히 비교해 읽기도 했다.

오랜 시간이 흘러 다시 책꽂이에서 꺼내든 <월든>

나는 그동안 막연히 '<월든>은 매우 좋은 책이다.'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나 보다.

무언가 다른 느낌이었다.

한 권의 책이 분명 책꽂이에 그대로 있었는데.... 그 책을 다시 꺼내 읽는 내가 달라진 것일까?

18세기라는 시대적 한계가 느껴진 것일까? 아니면 지금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이상 추구라는 생각이 들어서일까? 그동안 지나친 맹신을 하고 있었던 것을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1. 숲 생활의 경제학/2. 나는 어디서 살았으며, 무엇을 위하여 살았는가/3. 독서/4. 숲의 소리들/5. 고독 /6. 방문객들/7. 콩밭/8. 마을/9. 호수/ 10. 베이커 농장/11. 보다 높은 법칙들

12. 이웃의 동물들/13. 집에 불 때기/14. 전에 살던 사람들 그리고 겨울의 방문객들

15. 겨울의 동물들/16. 겨울의 호수/ 17. 봄


첫 문장

이 책(이라기보다는 정확히는 이 책의 대부분)을 썼을 때 나는 매사추세츠 주의 콩코드 마을 근처에 있는 월든 호숫가의 숲 속에 집 한 채를 지어 홀로 살고 있었다.


왜 우리는 성공하려고 그처럼 필사적으로 서두르며, 그처럼 무모하게 일을 추진하는 것일까? 어떤 사람이 자기의 또래들과 보조를 맞추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마 그가 그들과는 다른 고수鼓手의 북소리를 듣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듣는 음악에 맞추어 걸어가도록 내버려 두라. 그 북소리의 박자가 어떻든, 또 그 소리가 얼마나 먼 곳에서 들리든 말이다. 그가 꼭 사과나무나 떡갈나무와 같은 속도로 성숙해야 한다는 법칙은 없다. 그가 남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자신의 봄을 여름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말인가?

헛된 현실이라는 암초에 배를 난파시켜서는 안 된다. 푸른 유리를 힘들게 들어 올리고는 그것을 하늘이라 할 수 있는가?


이 문장들은 내가 <월든>이라는 책 한 권을 통해 외우고 있을 정도로 제일 좋아하는 부분이다. 숲에서 들려오는 저마다의 북소리, 북소리의 차이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

그 북소리의 박자가 어떻든, 얼마나 가까운 곳에서 들리든 얼마나 먼 곳에서 들리든 상관하지 말고 오직 자신만의 북소리에 맞춰 인생의 걸음을 옮기라는 말. 모두가 자신의 성장 속도를 무시하고 떡갈나무나 사과나무 같은 속도로 성장할 필요는 없다.

남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자신의 봄을 여름으로 바꿀 필요는 없다는 말에 한때 위로를 받았던 적이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이 문장들을 사랑한다.

여전히 학생들을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같은 테이블에 앉아있다 해서 그 아이들의 성장 속도를 획일화시킬 수는 없다.

창밖의 계절은 모두에게 같을지라도 저마다 가슴속의 사계절은 다를 테니까.


누가 그들을 땅의 노예로 만들었을까? 왜 인간은 한 줌 먹거리로도 충분히 삶을 연명할 수 있음에도 60 에이커나 되는 땅을 부리려 하는가? 뭐 하러 태어나자마자 무덤을 파기 시작하는가?

인간의 고생은 다 잘못된 생각 탓이다. 육신은 때가 되면 땅에 묻혀 퇴비로 변한다. 우리는 흔히 ‘불가피함’이라 불리는 그럴듯한 운명에 현혹되어 재물을 모으느라 평생을 허비한다.

그리스 신화에 데우칼리온과 피라는 등 뒤로 돌을 던져 인간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날 이후 인류는 고통과 근심을 견뎌내는 단단한 심장을 얻게 되었으니,

이는 인간의 육신이 돌과 그 본성을 같이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태어나자마자 무덤을 파기 시작하는 인간들.

소로가 살던 18세기 보다 어쩌면 지금은 더 깊고 더 크고 더 넓은 무덤을 파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무덤이 바로 자신의 것이 되리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한 채.


나이 많음이 젊음보다도 더 나은 선생이 될 수 없고 어쩌면 그보다 못하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은 나이 먹는 과정에서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기 때문이다. 아무리 현명한 사람이라도 인생의 과정에서 절대적 가치가 있는 무언가를 배우지는 못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실제로 늙은이들은 젊은이들에게 줄 만한 중요한 중고의 말을 갖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경험은 부분적인 것에 지나지 않으며 그들의 인생은 처참한 실패로 끝났기 때문이다. 그런 데 그들은 이러한 실패가 개인적인 사유 때문이었다고 믿는 것 같다. 그들은 자신들의 쓰디쓴 경험에도 불구하고 다소의 신념이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예전처럼 젊지 않다.

여기 삶이라고 하는, 아직은 내가 거의 시도조차 해보지 않은 하나의 실험이 있다. 그렇다고 연장자들이 이미 시도해 봤다는 사실이 내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앞으로 무엇이든 가치 있는 경험을 하게 돼 더리도 나는 인생이 그에 대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릴 것이다.

소로우의 말, 삶의 연장자에게 삶의 지혜를 배우라는 보편적 생각을 전복시킨다.

일견 그의 말은 맞기도 하다.

삶은 시도조차 해보지 않은 백지 같은 것, 연습도 반복도 없는 오로지 죽음으로의 진행방향을 가진 삶에 대해 조언을 청한들.... 그것은 조언일 뿐. 방법이 될 수는 없으니까.



인간이 서로의 눈을 잠시 들여다보는 것보다 세상에 더 큰 기적이 있을까? 인간은 짫은 시간 안에 세상의 모든 시대, 아니 모든 시대의 온갖 삶을 살아야 한다.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는 일, 사실 나는 사람을 처음 만날 때 눈동자에서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읽어내곤 한다.

가장 먼저 시선이 마주하는 곳, 가장 꾸미기 어려운 곳.

눈. 서로의 눈을 바라보는 것만큼 더 큰 기적은 없다는 소로의 말에 동의한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의 중요성을 너무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우리가 해내지 못하는 일은 또 얼마나 많은지... 우리는 온종일 기민하게 깨어있다가 밤이 되면 어쩔 수 없이 기도문을 외우고 스스로를 불확실성의 한가운데로 내던져버린다.

사실 원의 중심에서는 반경이 다른 원을 무수히 그릴 수 있음에도 지금 걸어가는 길이 유일한 길이라고 되뇐다. 중요한 사실은 변화란 모두 고려해 볼 만한 기적이고, 그 기적은 시시각각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세상 사람들이 성공적이라 간주하며 칭송하는 삶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왜 우리는 다른 여러 종류의 삶을 희생하면서까지 오직 한 종류의 삶만을 과대평가하는 것일까?


원의 중심에서는 반경이 다른 원을 무수히 그릴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고집스럽게 하나의 지름만을 지닌 원을 고집하려는 것일까.

같은 궤도를 돌다가 조금만 벗어나도 큰일이나 난 것처럼 두려워하는 나약함에 대해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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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스스로 살아갈 방도를 마련하기 위해 숲으로 관심을 돌렸다. 자본이 모이기를 기다리는 대신 나는 이미 가지고 있던 얼마 되지 않는 자본을 들고 마음먹은 바를 곧바로 행동으로 옮기기로 했다. 내가 월든 호숫가로 간 목적은 돈을 들이지 않고 살려는 것도 또는 대단한 희생을 치르며 살려는 것도 아니다. 그저 방해받지 않는 곳에서 사적인 삶을 살아가자는 생각에서였다.

지금 무언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려 한다면 입던 옷 그대로 걸치고 시작해 보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할 일’이나 ‘되어야 할 사람’이지 일을 하는데 필요한 도구가 아니다.

우리는 왜 늘 더 많은 것을 얻으려고만 애쓸 뿐, 적은 것에 만족하는 법을 배우려 하지 않을까?

원시 시대 인간은 발가벗은 채 소박한 삶을 살았다. 인간이 자연에 잠시 머물렀다 가는 체류자에 불과한 존재임을 알려준다. 음식과 잠으로 원기를 회복하고 나면 인간은 또다시 여행을 떠날 채비를 했다. 세상이라는 천막 속에 머물고 계곡을 누비고 평원을 가로질렀다. 하지만 이제 인간은 사용하던 도구의 도구가 되어버렸다. 배가 고프면 과일을 따먹던 인간은 농부가 되었고 은신처를 찾아 나무 밑으로 들어가던 인간은 집의 소유자가 되었다. 땅 위에 정착하고 하늘을 잊어버렸다.

1845년 3월 말, 나는 도끼 한 자루를 빌려 월든 호숫가의 숲 속으로 들어갔다.

.. 소나무가 우거진 쾌적한 언덕으로 호수가 바라다보였고, 숲 속 작은 빈터에는 소나무와 호두나무 새순이 돋고 있었다. 며칠 동안 목재를 베아 알맞은 크기로 잘라 샛기둥과 서까래를 만들었다. 사용한 도구는 작은 도끼 한 자루가 전부였다. 4월 중순경 비로소 집의 뼈대를 올릴 준비를 마쳤다. 판자를 뜯어 쓰기 위해 피츠버그 철로에서 일하는 제임스 콜린스라는 사람의 판잣집을 한 채 사두었다. 집은 자그마했고 지붕이 뾰족이 솟아있었다. 콜린스 부인이 등잔불을 밝히자 지붕과 벽 안쪽을 샅샅이 살펴볼 수 있었다. 집안 살림살이로는 난로 하나, 실크 양산 하나, 그 집에서 태어났다는 갓난아기 하나, 도금 장식한 거울 하나, 마지막으로 어린 떡갈나무에 못을 박아 걸어놓은 신형 커피 가는 기계가 전부였다. 곧 매매계약이 체결되었다. 4달러 25센트

이튿날 아침 6시, 그의 가족을 길에서 마주쳤는데 손에 들린 커다란 꾸러미에 침대, 커피 기계, 거울, 몇 마리의 닭.. 모든 재산이 들어있었다.

그날 아침 나는 당장 오두막을 허물었다. 판자의 못을 뽑고 호숫가로 날라서는 햇볕에 소독하고 뒤틀린 것을 바로 잡았다.


그날 아침, 나는 당장 오두막을 허물었다는 문장에서 한참을 머뭇거렸다

누군가의 터전이 판자와 못을 얻기 위해 사라졌다.

적어도 그 집은 소로우의 도끼에 허물어지기 전에 사람이 살던 곳이었고,

갓난아기의 생이 시작된 곳이었다.

그곳을... 단지 판자와 못을 사는데 드는 비용을 아끼기 위해 허물었노라고 그는 아무렇지 않게 적고 있다.

이 부분에서 소로우의 <월든>도 도구주의적 사고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생각했다.

필요한 재료를 얻기 위해 누군가의 안식처였던 곳을 4달러 25센트를 건네고 합법적으로 파괴한다. 모든 공간에는 흔적이 남아있다. 어쩌면 그 집의 정령 같은 것이 살고 있을지도.

소로는 자신의 오두막을 최저 비용으로 만들기 위해.... 자신이 얼마나 고군분투했는가를 한 챕터에 걸쳐 장황하게 설명해 놓았다.

아무렇지 않게 도끼를 치켜드는 그의 모습과

아무렇지 않게 판자조각과 못 들을 월든호수 근처로 옮겨 햇볕에 말리는 모습이

불편했다.



마침내 5월 초순 지인의 도움을 받아 오두막의 뼈대를 세웠고... 7월 4일부터 살기 시작했다.

가구로는 침대, 탁자, 책상, 의자 셋, 거울, 부젓가락, 장작 받침쇠, 냄비, 프라이팬, 국자, 세슷대야, 나이프와 포크 두 벌 접시 세 개, 컵 하나, 수저하나, 기름 항아리 하나, 당밀 항아리 하나, 옻칠한 램프하나가 전부였다.

우리가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얼마나 쉽게 어떤 특정한 길을 밟게 되고 스스로를 위하여 다져진 길을 만들게 되는지는 놀라운 일이다. 내가 숲 속에서 산 지 일주일이 채 안 되어 내 집 문간에서 호수까지는 내 발자국으로 인해 길이 났다. 내가 그 길을 사용하지 않은 지 5,6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그 길의 윤곽은 뚜렷이 남아 있다..... 마음의 길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세계의 큰길은 얼마나 밟혀서 닳고 먼지투성이일 것이며, 전통과 타협의 바퀴 자국은 얼마나 깊이 패었겠는가!

길을 낸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길만이 아니다.

마음의 길,... 하루에도 수천수만 갈래의 길이 생겨나고

그 길 위에서 길을 잃는다

마음의 길은 무한 확장되기도 하고

어느 순간 막다른 골목에 이르기도 한다

길을 내고 그 길을 걷는다는 것. 그 길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축복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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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바트램이 머클래스 족 인디언관습이라 묘사했던 ‘버스크’

즉 ‘첫 수확의 향연’ 같은 잔치에 대해 설명한다

“버스크를 기념할 때, 마을 사람들은 미리 새 옷, 새 솔과 냄비, 그 외에도 새로운 살림살이와 가구를 마련해 두고 낡은 옷이나 여러 너저분한 물건은 한 군데로 모은 후, 집과 광장과 마을 전체를 깨끗이 쓸고 닦아 쓰레기를 모은다. 그 위에 남은 곡식과 오래된 식량까지 모두 한데 쌓아 올려 불태운다. 그리고 약을 먹고 사흘간 단식을 한 후 마을의 모든 불을 끈다. 단식 기간 동안에는 식욕이든 성욕이든 만족감을 주는 모든 것을 금욕한다. 대사면도 시행되어 모든 죄인이 자기 마을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 버스크‘가 필요할 때가 있다.

무언가 세속의 오물이 덕지덕지 묻어있다는 생각이 들 때.

영혼이 혼돈 속에 있다는 생각이 들 때

인디언 관습처럼 정화의식이 있다면 조금은 개운해질까.



오늘이라는 시간 속에는 어제 내가 더럽히지 않은 더 신성한 여명의 시간이 있다.

내가 숲 속으로 들어간 것은 내 인생을 의도적으로 살아보기 위해서였다. 다시 말해서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들만 직면해 보려는 것이었으며, 인생이 가르치는 바를 내가 배울 수 있는지 알아보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죽음을 맞이했을 때 내가 헛된 삶을 살았구나 하고 안타까워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반드시 필요하지 않다면 체념한 채 살아가고 싶지도 않았다, 깊이 있게 삶의 정수를 받아들이고 싶었다. 삶이 아닌 것은 모두 파괴해 버리고 강인하게 스파르타인처럼 살아가길 바랐다.


삶의 정수를 받아들이기 위해 나는 숲으로 갔다는

키팅 선생의 목소리를 듣는 것 같았다

<죽은 시인들의 사회> 아버지는 그 영화를 매우 좋아하셨다.

아버지는 삶의 정수를 받아들이기 위해 어디로 가셨던 것일까? 어디로 가고자 하셨을까?

어떤 진지한 대화조차 나눠볼 겨를도 없이 아버지는 삶의 정수를 포기하고 너머의 세계로 건너가셨다.

나는 삶의 정수를 받아들이기 위해 어디로 가야 할까?


살아서든 죽어서든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진실뿐이다. 우리가 정말로 죽어간다면 목구멍 안에서 숨이 끊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사지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끼도록 하자. 그러나 살아있다면 해야 할 일을 하도록 하자.

우리가 진정으로 개선하고자 하는 혹은 개선할 수 있는 그 시간은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아니다,

푸리족 인디언들은

”하나의 단어로 어제와 오늘내일을 말하면서, 어제를 말할 때는 뒤쪽을 가리키고, 내일은 앞쪽, 그리고 지금 지나가는 날, 오늘은 머리 위를 가리키는 방식으로 의미의 차이를 나타낸다. “

내 집에는 세 개의 의자가 있다. 하나는 고독을 위한 것이고, 두 개는 우정을 위한 것, 세 개는 사교를 위한 것이다.

나는 지금 숲 속에 서 있다. 바닥에는 솔잎이 깔려있고 , 그 사이로 벌레 한 마리가 꿈틀대며 내 시야에서 숨으려고 애를 쓴다. 나는 왜 이 벌레가 그처럼 겁을 집어먹고 어쩌면 그의 은인이 될지도 모르고 벌레의 종족에게 희소식을 가져다 줄지도 모를 내게서 도망가려 안간힘을 쓰는지 궁금해진다. 그러면서 동시에 내 위쪽에서 나를 굽어보는 위대한 은인이자 지성의 존재를 떠올려본다.


옛날에 사과나무로 만든 오래된 탁자의 마른 판자에서 강인하고 아름다운 벌레 한 마리가 나왔다. 그 탁자는 처음 코네티컷 주에 살다가 후에 매사추세츠 주로 이사를 간 어느 농가 부엌에 60년 동안이나 놓여있었던 것이다. 벌레가 나온 자리에서부터 나이테를 세어보면 알 수 있듯 벌레의 알은 그보다도 여러 해 전 나무가 살아있던 시절에 슬어놓은 것이었다. 찻주전자의 열기 덕에 부화가 되었는지 벌레가 나오기 여러 주일 전부터 판자 갉아먹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날개 달린 아름다운 생명체 하나가 푸르게 살아있는 나무속에서 처음 알의 형태로 슬어있다가 참으로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죽어 말라비틀어진 듯한 삶 속에 던져진, 무수한 동심원을 그린 목재의 나이테 아래서 묻혀 지낸 것이다. 그동안 나무는 점차 잘 마른 무덤을 닮아가고 있었으리라. 또한 지난 수년동안 식탁에 둘러앉아있던 가족들은 나무 갉는 소리에 여러 번 놀라기도 했으리라. 그런데 이런 생명체가 세상에서 가장 변변치 않고 허름한 가구 속에서 어느 날 갑자기 세상 밖으로 나와 마침내 찬란한 여름 생을 즐기게 되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하지만 그것이 바로 내일의 특징이다. 시간의 경과만으로는 결코 새벽을 불러올 수 없다. 어떤 빛인 인간의 눈을 감긴다면 그것은 어둠이나 마찬가지다. 깨어나는 순간이 바로 새벽이 밝아오는 시간이다. 우리 앞에는 수많은 새벽이 기다리고 있다. 태양은 아침에 뜨는 별에 지나지 않는다. <월든>의 마지막 문장


소로의 <월든> 모처럼 다시 읽은 책

솔직히 말하자면 멋있는 문장도 많지만 상당한 인내력이 필요한 책이다.

게다가 단순히, 최대한 단순히 살라던 소로의 주장과는 달리

<월든>이라는 책의 인기에 편승하여 해마다 월든 호수를 찾는 수많은 이들이 가져다주는 관광수입이 그의 후손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지 궁금해진다. 그의 후손들은 최소한의 간소를 외친 소로와는 달리

물질적 풍요 속에 무덤을 파고 살아간 것은 아니었을지.

소로 또한 월든 호숫가의 오두막에서 살아간 기간은 2년 2개월 정도에 불과하다

그 짧은 시간, 8번의 계절이 바뀌는 동안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것이 <월든>에 담겨있다. 2년 2개월의 시간이 주는 삶의 메시지.... 그가 좀 더 오래 그곳에 살았다면 기존의 <월든>을 능가할 책이 새로 탄생되었을지, 아니면 <월든>조차도 무의미하다는 이유로 폐기되었을지 궁금하다.


오래된 사과나무 탁자 속에 박재처럼 살다가 부화되어 나타난 강인하고 아름다운 벌레... 그것이 바로 내일의 모습이다. 이미 죽은 것 같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어린 한 생명이 도래할 내일의 꿈을 꾸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탁자를 갉아대며 거침없이 밖으로 기어 나왔다.


우리 앞에는 수많은 내일이 있다.

우리 앞에는 수많은 새벽이 기다리고 있다.

다만 그 모든 것들은 그것을 누릴만한 가치를 지닌 이들만이 쟁취할 수 있는 것이리라. /려원


<빨강 수집가의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산문집/ 202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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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 수필과 비평사 / 려원산문집 2022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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