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허한 모국어와 마른 나뭇가지 위의 까마귀처럼

이천이십오 번째의 가을. 어쩌면 우리는 한 무리의 단풍, 그리고 낙엽들

<가을의 기도 >


다형(茶兄) 김현승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落葉)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謙虛)한 모국어(母國語)로

나를 채우소서.

.....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百合)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김현승『문학예술』(1956년 4월호) 부분


김현승 시인의 호는 다형(茶兄)이다. 어딘가 그가 살아있다면 일면식도 없는 누군가가 그의 방문을 두드릴 때 반가이 문을 열어주고 따뜻한 차 잔을 끓여줄 것만 같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이 시를 읽어줄 것 같은...

낙엽(落葉)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謙虛)한 모국어(母國語) 같은 11월이다. 인디언식으로 11월은 아직 끝난 것은 아닌 달이라는 의미도 있다는데 그래서인가 뒤로 한 장 더 남은 달력이 묘한 안도감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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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를 돌아본다. 무엇을 하며 살았을까.

내 영혼도 시인의 시에 나오는 것처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건너왔을지 모른다.

무언가를 다 이룰 것 같은 시간과 뜻 모를 열기에 부풀던 시간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따뜻해지던 시간과..... 무미건조한 시간과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것 같은 절망과 무기력한 시간과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혼돈의 시간을 거쳐 그리고 지금은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한 마리의 까마귀처럼 앉아 있다.

창밖에 비쩍 마른 장미나무가 바람을 타고 있다

멀리서 산새소리 들려오고 약간씩 물들어가는 산은 동그란 어깨를 창문으로 드리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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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주여, 가을이 왔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길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놓으십시오.

들에다 많은 바람을 풀어놓으십시오.

....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고독한 사람은 이후에도 오래 고독하게 살면서

잠자지 않고, 읽고, 그리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바람이 불어 나뭇잎이 날릴 때, 불안스레

이리저리 가로수 길을 헤맬 것입니다.


참으로 긴 긴 여름이 지났다. 가을인가 싶은데 추위가 바짝 느껴진다.

당신은 들에 많은 바람을 풀어놓았으리라.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허락하시어 완숙의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

집이 없는 자는 이제 집을 짓지 않으며... 고독한 이는 이후에도 고독한 채로 긴 편지를 쓸 것이며 바람이 불어 나뭇잎이 날릴 때 이리저리 가로수 길을 헤맬 것이라 말한다.

해마다 11월, 만추에 생각나는 두 편의 가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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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이면 늘 가는 곳이 있다.

이천이십오 번째의 가을을 보내는 일종의 의식 같은 것이라고 할까?

내장사 입구 나무벤치들....... 세월이 내려앉은 나무 벤치들을 정리한 모양인지 새로 칠을 한 모양인지 깔끔하다. 사실은 늘 사진에 담아 오는 나무벤치가 있는데 재단장을 해서인지... 그 운치가 제대로 느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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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계단 위 흩어진 나뭇잎들도 찍어오리라 생각했는데 부지런한 스님이 벌써 비질을 하신 모양이다.. 단정하고 단아하고 깔끔한 경내. 수령이 오래된 명물 은행나무 아래로 흙길이 사라지고 새로 무언가를 덮어 씌운 듯하다. 변해가는 것들. 변해가는 것은 그것들만이 아닐 것이다. 해마다 연례행사처럼 그곳을 향하는 나도 변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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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켜가 생긴 나무들, 잎들은 속절없이 말라간다.

잔인하지만.... 오래도록 살아가야 할 나무의 생존 전략인 것을...

우리는 그 마지막 흩날림을 보러.. 그 마지막 춤을 보러 발길을 옮기는 것이고...

흩어지는 잎사귀들 아래 단풍보다 더 고운 옷차림의 사람들이 걷고 있다.

만추.... 어쩌면 우리도 한 무리의 단풍

어쩌면 우리도 한 무더기의 낙엽들............

그렇게 이천이십오 번째의 가을을 보내고 있다/려원


<빨강 수집가의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4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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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도서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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