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본문 밖의 존재야.

21쪽 분홍 모서리를 찢어 입술에 붙이고 본문 속으로 돌아가

< 입체적 눈물 >

종이 인류


나는 본문 밖의 존재야


서쪽을 바라보는 사내의 눈이 고래처럼 어두워질 때

줄거리 밖으로 튕겨져 나오고 말았지

....

가난한 내 이야기는 사내의 포켓 안에서 더듬거리고

내 눈 속으로 건너온 고래가 잃어버린 문장이 되려 할 때


21쪽 분홍 모서리를 찢어 입술에 붙이고

남은 조각 불어 가슴으로 밀어 넣었지


목차와 목차 사이 깊은 숲이 깨어나는 오늘은

한 권의 눈물을 다 읽고 간 고래의 연안이나

...

다만, 한 번도 소리 내어 읽지 못한 불모지

내 몸의 사막을 흐르는

보라색 잉크 방울에 집중할래


그러니 울지 마

....

유미애 < 입체적 눈물 > 부분


눈물은 입체인가?

나는 본문 밖의 존재야. 줄거리 밖으로 튀어나온...
눈이 가려진 종인 인류, 가위로 두 눈을 벌려준다. 가난한 내 이야기가 포켓 안에서 다듬거리고 내 눈 속, 세상에서 가장 작은 바다로 건너온 고래는 잃어버린 문장이 되려 한다.

21쪽 분홍 모서리를 찢어 입술에 붙이고 남은 조각은 가슴으로 밀어 넣는다.

목차와 목차 사이... 한 번도 소리 내어 읽지 못한 불모지, 몸의 사막을 흐르는 잉크 방울에 집중하는 시간

그러니 울지 마. 찢어진 페이지 속으로 고래가 돌아올 시간


10월의 마지막 날이다.

10월이 31일까지 있어서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아직은 10월이라는 안도를 느끼는 아침이다.

대학시절 전공 서적의 뒷부분엔 꼭 두툼한 appendix가 있었다.

두껍고 무거운 원서의 뒷부분. 그 appendix를 잘라내고 본문만을 들고 다니면 훨씬 가벼울 것이 분명한데도 appendix를 끝내 떼어내지 못하였다.

신기하게도 원서 부록을 의미하는 appendix는 맹장이라는 의미도 지닌다.

돌기, 충수돌기, 맹장.....

끝내 낑낑 거리며 그 두꺼운 원서를 안고 다닌 낮과 밤의 시간은 내게 어떤 의미였을까?

나는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서문도 되고 싶었고 흥미진진한 본문도 되고 싶었다. 당연히 해피엔딩의 아름다운 마무리로 이어지는 마지막 결문이 되기를 바랐다.


갑자기 유미애 시인의 ‘나는 본문 밖의 존재’라는 시 한 줄에 그동안 잊고 있던 나의 위치를 추적해 본다.

관심을 끄는 서문도, 흥미진진한 본문도아닌.... 일상적이고 반복적이고... 그저 그런....

그러나 슬픔의 언덕을 지나온.. 그러다가 길을 잃어버린...

어쩌면 지금은 살아야 한다는 감각만으로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주어지는 모이와 모이를 받기 위해 지속으로 강화된 행동을 보이는 한 마리 새처럼.

소리 내어 읽지 못한 사막, 불모지.

고래 한 마리 제대로 키워보지 못한 눈물 속에서 그냥 걷고 있다.

21쪽 분홍 모서리를 찢어 입술에 붙이고

나머지는 가슴으로 밀어 넣어야지. 아직은 10월이니까.

그러니 울지 마!

다시 본문 속으로 돌아가,

다시 남은 이야기를 써야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고쳐봐야지........ 어쨌든 눈물은 입체겠지만!

아직은 1 0월이니까.

무엇을 하면서 보냈을까........

마음이 스산해지는 계절이 오고 있다./려원


<빨강 수집가의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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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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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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