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경남신문 신춘문예 수필/절제된 정보, 지적 담론

세상은 이응으로 가득 차 있어./바슐라르적인 대지와 휴식의 몽상을 환기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불을 켜지 않아도 세상이 환한 밤입니다.

잠이 오지 않습니다. 컴퓨터의 전원을 켭니다... 충직한 커서가 나의 명령을 기다립니다.

2026년 1월 2일.... 신춘문예 당선이라는 기적 같은 소식을 올리는 일이 제게도 일어났습니다.

신춘은 영원히 닿을 수 없는 별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글을 쓰면 쓸수록 더 허기졌습니다. 그 허기를 견딜 수 없었습니다. 결핍은 더 극심한 결핍을 불러온다는 것을 매번 실감하면서.... 그렇게 문학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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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에 나오는 문구 중

그가 다른 북소리를 듣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로 하여금 들리는 북소리에 맞추어 걸어가게 하자.

그 소리가 어떻게 들리든, 얼마나 멀리서 들리든 상관하지 말자.

사과나무가 떡갈나무처럼 빨리 성숙하는 것은 그에게 중요하지 않다. 봄을 여름으로 바꾸란 말인가?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문학이라는 거대한 숲, 나만의 북소리를 찾아 헤매었습니다.

다른 이들의 북소리가 얼마나 웅장하고, 얼마나 그럴듯하고, 얼마나 아름다운지에 신경 쓰지 않고...

내 안에서 내 글이 잉태되는 속도를 세상의 속도에 맞추고 싶지 않았습니다.

오직 나만의 속도로....

나의 봄을 누군가의 여름으로, 또 다른 누군가의 가을로, 또 다른 누군가의 겨울로 바꾸고 싶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나를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부질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오직 나만의 속도로 어디선가 들려오는 북소리에 맞춰

보이지 않는 문학의 숲길을 더듬어 걸어왔습니다.

신춘문예 당선은 그 길을 향해 가는 내게 들려온 또 다른 북소리입니다. 어쩌면 붉은 심장의 목소리인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늘 새로운 시작임을 잊지 말라는 각성의 죽비인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오노레드 발자크가 문장 하나를 쓰기 위해 거침없이 마셔 댄 커피의 검은 눈물인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어둠이 내리기 전 네 몫의 햇볕을 따라(carpe diem)는 절박한 조언인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끝없이 손가락으로 커서의 뒤를 쫓으라는 정언명령인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또 어쩌면.... 수많은 어쩌면을 떠올리는 시간

여전히, 아직도 눈이 내립니다. /려원



신춘(新春), 새봄이라는 단어 앞에 마음은 늘 흔들렸습니다. 어린 시설 놓쳐버린 빨간 풍선 생각이 납니다. 돌아보면 나는 한때 철없이 부유하던 빨간 풍선이었으며, 빈약한 언어로 팽창한 빨간 풍선이었으며, 언젠가는 터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어리석은 빨간 풍선이었습니다.


수업이 시작되기 직전 걸려온 한 통의 전화, 낯선 번호가 가슴에 파고들던 찬 바람을 잠재웁니다. 해마다 이맘때면 앓던 신열을 순식간에 내려줍니다. 세상이 온통 찬란해 보입니다. 에드몽 자베스는 ‘쓴다는 것은 기원에 대한 정열을 갖는 일이며 글쓰기는 바닥에 도달하고자 하는 시도’라고 하였습니다. 쓰는 일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그리고 자신을 넘어서는 일입니다. 붉은 심장의 언어를 받아적기 위하여 커서를 좇아갑니다. 커서 끝에서 검은 활자들이 부스스 일어나 군무를 추기 시작합니다. 일어섬과 넘어섬 사이 잉태되는 나의 비루한 글은 늘 마주하는 바닥에 대한 헌사입니다.


경남신문 창간. ‘1946년 3월 1일’이라는 숫자에 가슴이 뛰었습니다. 활자들을 갈색 봉투에 담아 우체국으로 향할 때 이유 없이 설레었습니다. 이제 그 답을 얻었습니다. 말할 수 없는 누군가를 위해 목소리가 되어주고, 볼 수 없는 누군가를 위해 눈이 되어주고, 닿을 수 없는 곳을 향해 내미는 이의 손이 되어줄 그런 글을 쓰겠습니다.

설익은 활자의 간절한 목소리에 귀 기울여주신 심사위원님들, 새해를 알리는 지면에 감히 자리를 허락하신 경남신문사와 관계자분들께도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충만한 기쁨의 산실이었던 아버지의 서재, 나를 각성시키던 타자 소리, 끝없는 불면의 밤, 생의 씨실과 날실 속에 마주한 세상의 모든 인연을 오래도록 기억하겠습니다.

-당선소감


2026 신춘문예 ‘수필’ 심사평/ 송희복 (문학평론가), 한판암(수필가)

절제된 정보 지적 담론 담은 에세이적 수필/ 바슐라르적인 대지와 휴식의 몽상을 환기시키는 강렬한 작품


상상을 넘어선 숫자의 응모작들이 출품되었다. 수필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문학의 전문 영역과 애호가 영역을 이어주는 교량과 통로가 되는 갈래라면 수필만 한 것이 없다. 수필이 신춘문예 경쟁의 장으로서 더욱 확장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최종심에 오른 작품 중 ‘회심’. 회심이 종교 용어지만 종교적인 느낌을 절제한 소중한 글이다. 회심이 기독교적인 회개나 불교적인 참회의 관념이 아니라 일상의 행동 변화라는 데 무척이나 공감이 간다. 문학적 형상을 차분하게 이루어가는 글투와 품새가 나무랄 데 없지만, 낯선 언어와 정조(情調)에 이르지 못해 아쉬웠다.

‘폐사의 꽃’은 경물(景物)에 대한 정치한 묘사력이 기성 작가의 반열에 이미 올라있다고 보인다. 지은이는 어둠 속에서 작은 숨결들이 서로를 비비며 조심스레 자리 잡은 모습을 그윽이 바라본다. 응시와 관조가 눈부신 명상록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하지만 장르적 성격이 온전히 들어맞지 않았다. 동화나 소설로 개작하면 더 좋은 문학적 성취가 예상된다. 이런 제목은 어떨까? 버려진 개, 들꽃이 되다. 이 한 줄의 제목만이라도 다채로운 이야기성을 품을 수 있다.

당선작인 ‘세상은 이응으로 가득 차 있어’는 발상부터가 남달랐다. 틀에 박힌 사사로운 신변잡기에서 벗어나 절제된 정보의 지적 담론에까지 나아간 ‘에세이’적인 수필이다. 정치적인 격랑의 을사년을 보낸 다음에 새해, 새봄(新春)의 희망으로 만날 수 있는 소중한 글이었다. 지난해는 정말 ‘각박’했다. 세상에는 모가 난 ‘기역’과 ‘비읍’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 글을 통해, 우리는 ‘이응’으로 가득 찬 세상에 대한 희망을 걸어볼 수 있겠다. 크고 작은 이응들이 옹기종기 모인 곳에 오래된 미래가 익어가며, 모태의 자궁이나 박물관 옹관묘에서 삶과 죽음이 이응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우리는 감지한다. 바슐라르적인 대지와 휴식의 몽상을 강렬하게 환기하는 산문이다. 세상은 이응인 것과 이응 아닌 것들로 나누어지지 않는다. 이 두 가지 사이에 ‘이응적(的)인 것’도 많이 있다. 이제는 이응적인 것으로 향해 문학적 사색을 개방하면 좋겠다. 당선을 축하하며, 또 정진이 있기를 바란다.


<세상은 이응으로 가득 차 있어>


이응이 되고 싶은 날이 있다. 날 선 모서리들을 잘라내고 온몸을 공처럼 뭉쳐 이응이 되는 상상을 한다. 모진 말을 하지 않으려고 입을 이응처럼 벌리면 이응들이 통통통 쏟아진다. 이응들은 상대방의 청각기관으로 이응이응 들어간다. 이응을 나눠 먹은 사람들은 모두 이응 같은 얼굴이 되어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 이응으로 보고, 듣고, 느끼고 이응으로 이어지는 사람들이 걷고 있다. 지하철이 들어오고 문이 열리고 이응들이 쏟아져 나오고 또 다른 이응들을 싣고 간다.


신생아실에 가득 찬 이응들은 성장하는 이응들이다. 걷고 달리고, 생의 부력으로 끝없이 부풀어 오르는 이응들, 삶의 운율을 만드는 고결한 숨결은 이응으로부터 시작되었으리라. 동그랗게 벌린 아기 입에선 이응의 냄새가 난다. 배내옷 속에 사는 순결한 이응들이 옹알거릴 때 아기들은 이응이응 자란다.


마지막 숨을 몰아쉬던 할머니 입이 이응으로 열리던 때, 아버지는 끝내 이응 같은 눈물을 떨구었다. 수의를 입은 할머니가 낯설었다. 지상에서의 마지막 옷에는 주머니가 없다. 담을 수도 없는 할머니의 이응들은 모두 어디론가 흩어졌다. 온 생을 전력투구한 이의 이응이 세상 속으로, 누군가의 숨 속으로 자연스레 스며들었다. 할머니의 이응은 어쩌면 내 몸 어딘가에도 여전히 존재하리라.


처음의 이응과 마지막 이응 사이, 우리는 날마다 어떤 이응들을 만들며 살아가고 있을까? 어린 시절 빨간 색연필이 만들어 낸 이응들은 자부심의 상징이었다. 학창 시절 내내 문제지 위에 이응들이 뒹굴었다. 옳은가? 옳지 않은가? 이응인 것과 이응 아닌 것들을 선별하는 연습을 하며 세상에 던져졌다. 문제지 위에서만 유효하던 이응들을 세상 틀에 맞춰보아야 했다. 세상의 틀은 이응으로만 되어있지 않았다. 네모, 세모, 마름모, 타원형, 다양한 틀 속에서 마주한 어떤 이응들은 찌그러져 있었고 울퉁불퉁했다. 틀에 맞추기 위해 결국 이응을 버린 이응도 있었다.


유년의 기억 속, 이응처럼 모여 앉은 아이들은 주전자 뚜껑으로 반죽을 꾹꾹 눌러 이응을 만든다. 평면이던 이응이 팔팔 끓어오르는 기름 안에서 일제히 꿈틀거리는 입체가 된다. 이응들의 소란으로 부글거린다. 아이들의 입안에 뜨거운 이응들이 가득 찰 때 목소리도 동그래진다. 장독대에는 수많은 오래된 이응이 있었다. 맑은 날 항아리 뚜껑을 열어두면 이응 안에 하늘이 머물렀다. 태양의 입김으로 장이 익어 가면 장독 안 이응들이 아우성치곤 했다. 한여름의 절정에서 하늘을 품은 이응 안으로 고개를 숙이고 무언가를 꺼내시던 할머니의 등도 이응이었다. 크고 작은 이응들이 옹기종기 모인 곳에서 반들반들 잘 익은 이응을 먹고, 아이들은 이응처럼 동그랗게 자랐다. 오래된 미래가 익어 가고 있었다.


박물관 옹관묘 유적 앞에 멈춰 선다. 옹관묘는 청동기부터 철기시대에 이르기까지 남부지방에서 활용되던 매장 방식이다. 작은 이응에는 어린아이의 시신을, 이응과 이응을 이어 붙인 커다란 이응에는 어른의 시신을 담았다. 땅에 묻지 않고 굳이 이응 안에 망자를 넣어 매장하였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네모난 형태의 관을 사용하기 전 어쩌면 모태의 자궁 같은 이응 안에서 망자가 편히 잠들기를 기원했는지 모른다. 가끔은 모태의 신성불가침한 이응 속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날이 있다. 문이 열리기 전까지, 기나긴 산도를 통과하기 전까지는 아직 형체가 없는 시간이었다. 산고를 겪던 여인의 이응과 눈물이 된 이응과 절규 같은 이응과 끝내 무덤이 된 이응을 생각한다. 옹관묘의 이응과 장독의 이응은 다르지 않다. 장독 안에 잘 익은 이응을 먹고 살아가고, 이응 같은 무덤 안에서 이응처럼 잠드는 것. 삶과 죽음은 이응으로 연결되어 있다.


봄이 오는 길목, 나무 아래에서 나무를 안고 귀를 대면 나무의 몸 안을 통통거리며 움직이는 이응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땅속 깊은 뿌리로부터 나무 꼭대기에 이르기까지 쉼 없이 달려 올라가는 긍정의 소리. 봄을 알리는 찬란한 신호다. 가지 끝까지 단숨에 달려간 이응들이 잠든 나무를 흔들어 깨운다. 이응이 지나간 자리마다 꽃들이 깔깔대며 튀어나온다. 이응들의 맹렬한 춤으로 가득한 여름, 나무는 이응으로 한껏 달아오르고, 가을이 오면 나무엔 이응들이 조롱조롱 매달린다. 건너온 여름만큼, 뜨거움을 견뎌온 이응만큼 저마다의 가을은 풍요로워진다. 한겨울의 나목에는 숨죽인 이응들이 있다. 기다림과 침묵의 이응들, 쏟아지는 눈발 아래 세상은 온통 이응으로 가득 차 있어서 잔뜩 움츠린 이응에 숨을 불어넣으면 이응은 새 희망으로 부풀어 오른다.

세상을 굴리는 수많은 이응이 있다. 대형 탑차, 승용차, 크레인, 유모차, 장바구니, 택배차, 자전거, 여행 가방의 이응들. 용도에 맞게 공기로 몸을 가득 채운 채 탄력 있는 몸을 통통거리며 달려간다. 세상을 지고 달려야 한다면 나는 어떤 이응이 될까? 때로 유모차의 이응이 되었다가 자동차의 이응이 되기도 하고 여행 가방의 이응, 장바구니의 이응이 되기도 한다. 등에 어떤 것을 싣는가에 따라 이응이 된 나의 존재감도 달라진다. 가정이라는 자동차를 굴리기 위해서는 4개의 똑같은 이응이 필요하다. 한 방향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함을 알면서도 다른 방향으로 달려가고 싶을 때도 있지만 그런 마음들을 다독이며 세상을 굴리는 이응들의 질주, 출근길 도로는 늘 보글거린다.


내 안에 웅크린 이응이 견딜 수 없어질 때, 늦은 밤 불 켜진 창들을 바라본다. 네모난 창 속에 점멸하는 불빛 아래, 이응들의 동그란 등이 보인다. 쓰다듬고 어루만지는 이응들, 으응 으응 응응응 바람 속에 이응들의 목소리가 실려 온다. 긍정의 소리, 위로의 소리다. 납작해진 이응에 숨을 불어넣는 시간, 이응 같은 눈물과 웃음, 땀방울로 네모난 틀 안에 갇힌 얼굴들은 그 밤새 이응을 닮아간다. 세상의 아침이 오면 목소리들은 다시 이응으로 발화되고 가슴속 웅크린 이응들이 한 무리의 새처럼 쏟아져 나온다.


이응들의 무덤 앞에 서 있다. 쓸모를 상실한 이응들의 표정은 거의 비슷하다. 생채기 난 이응, 마모된 이응, 눈을 질끈 감은 이응들은 한때 세상 속으로 거침없이 질주하던 꿈을 꾸고 있다. 회사로고도, 무늬도 모두 사라진 검은 얼굴에 무표정, 침묵, 인내, 나른함, 고단한 세월이 앉아 있다. 이응 위에 얹혀있던 것들은 모두 사라지고 오직 이응뿐인 곳에서 이응으로 살아왔던 이야기들만 남아 느릿느릿 세상의 틈을 메운다.


마모된 흔적은 달려온 이응의 시간을 보증한다. 태어난 곳도 다르고 누군가의 생을 지고 달려온 시간도 다르지만, 마지막 종착지에서의 표정은 서로 닮아있다. 켜켜이 쌓여있는 이응들의 무덤에는 오직 땀 흘린 시간의 흔적만이 풍화된 채 남아있다. 세상의 틀과 틈에서 끝내 이응으로 살려했던 몸부림이 존재하는 곳, 바람이 윙윙거리며 지나간다. 나른한 햇살 온몸으로 받으며 입체가 아니어도 이제는 괜찮은 이응들, 더 이상 질주하지 않아도 되는 이응들, 세상이라는 시험지 위에서 틀려도 괜찮은 이응들, 안도의 숨소리 나지막이 들려온다. 여전히 세상은 이응으로 가득 차 있다.


잠이 오지 않는 새벽, 잠들 수 없는 새벽입니다.

하얀 눈이 온 세상을 덮고 있습니다. 세상이 순해집니다.

살아있는 것들을 보라

사랑하라

놓지 마라

-더글러스 던

살아있는 것들을 보고, 사랑하고 그리고 절대 놓지 않겠습니다./려원


<빨강 수집가의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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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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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아르코 문학나눔 우수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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