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고 있어, 무궁하고 무진하고 꽃 같은 것들이
내가 술래,
무궁화는커녕 나무 하나 없는 운동장에서
너희들은 내게 다가온다 한 발 두 발
시치미를 떼며
나는 노래를 부른다 전주도 후렴도 없는 첫 소절이 마지막 소절인
그러니까 반복해서 불러야 해 노래가 끝나지 않도록 놀이가 끝나지 않도록
한 소절이 노래의 전부가 되지 않도록 노래보다는 구호에 가까운 한 문장을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
등 뒤의 인기척
무엇인가 오고 있다
손가락과 손가락이 끊어지는 서늘함
.....
우리들은 달린다
우리가 그어놓은 출발선을 향해
오고 있어,
무궁하고 무진하고 꽃 같은 것들이
- <졸업반> / 김남주 / 2026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당근 보고 왔는데요. ‘경도’ 맞죠?”
영하 2도의 추운 날씨 속 롱패딩과 목도리 등으로 중무장한 30여 명의 나이는 10대부터 30대까지 다양했고 학생, 교사, 자영업자 등 직업도 각양각색이었다. 오후 9시 정각이 되자 이들은 술래 한 명을 뽑았고,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시작했다. 술래가 “무궁화 꽃이~”를 외치자 앞으로 달려 나가던 참가자들은 “피었습니다!”라는 외침에 일제히 멈춰 서길 반복하며 동심(童心)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이후 쫓는 경찰과 쫓기는 도둑으로 편을 나눈 이들은 ‘경찰과 도둑’ 게임을 진행했는데, 뛰어다니며 땀을 흘린 탓에 외투를 벗어던지기까지 했다. 한결 가벼워진 옷차림으로 처음보다 서로를 편하게 대한 이들은 ‘얼음땡’과 ‘마피아’ 게임 등 ‘추억의 놀이’를 이어갔다. 경찰과 도둑이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얼음땡, 마피아 등 학창 시절에 친구들과 주로 했던 놀이를 처음 보는 이들과도 함께 즐기는 이 같은 모임은 최근 중고거래 플랫폼 ‘당근’과 카카오톡 오픈 채팅방 등을 통해 전국 단위로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 신문 기사 부분 발췌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전주도 후렴도 없는 첫 소절이 마지막 소절인
그러니까 반복해서 불러야 해 노래가 끝나지 않도록 놀이가 끝나지 않도록..
어린 시절 누구나 한 번은 해보았을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후렴구 같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누가 처음 지었는지... 알 수 없는 그 여음과 같은
리듬을 따라 부르며 눈을 감고 벽에 기댄 술래의 뒤를 서늘하게 다가가곤 했다.
술래에게 잡히지 않기 위해
술래가 되지 않기 위해..
어릴 적 놀이다.
지금 아이들은 전혀 모를 것 같은 그 놀이를 ‘당근’을 주축으로 모인 사람들이
갚은 밤 익명인체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외친다.
그 놀이의 끝... 흔한 뒤풀이 없이 쿨 하게 저마다의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이들
AI 시대에 아날로그적 놀이를 즐기는 사람들..
그 밤 무엇 때문에 그곳에 모이는 것일까? 단지 놀이를 위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나이, 직업, 가족관계. 경제적 수준, 학력 등등으로 소환되는 ‘우리’로부터 벗어나 끝까지 익명인 것. 같은 시간, 같은 공간 안에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외치고... 아무렇지 않게
다시 세상의 ‘누구’로 돌아간다. 아침이 오면 다시 누구의 무엇이고, 어디의 무엇이 되어....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문장...
끝없이 반복되는 리듬..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 않은 구호 혹은 노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따라 부르던 우리는 운동장을 떠나.... 저마다의 목적지를 향해 달렸다.
그리고 다시.... 또다시 더 많은 시간이 흘러 우리는 다시 또다시 우리가 떠나온 운동장을 향해 달린다
제복, 역할, 능력, 부와 명예.... 군더더기 같은 것들을 내려놓고
우리가 떠나온 곳... 우리가 그어놓은 출발선을 향해 달린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우리들은 달린다
우리가 그어놓은 출발선을 향해
새해에는
우리에게
무궁무진하고 꽃 같은 무언가가
서슴서슴 다가오고 있기를, 다가오기를 소망한다./ 려원
<빨강 수집가의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4 12
<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