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살을 맞대고 가자/ 상한 영혼을 위하여

<상한 영혼을 위하여>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 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 고정희


흔들리지 않기 위해, 얼마나 안간힘을 쓰며 살아가는 세상인가...

준비를 위한 준비... 평생을 ‘~~ 을 위한 준비’에 쏟아붓느라 정말 필요한 일은 해보지도 못한 채 인생에서 어느 순간 준비 없이 사라진다.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충분히 흔들렸으니 이제 희망으로 가자! 가 아니다.

충분히 흔들리며(흔들림이 아직 끝나지 않은 채로) 고통에게로 가자고 한다.

가자 고통이며, 살을 맞대고 가자고... 게다가 살을 맞대고까지...

이 시를 쓸 때의 시인의 마음을 읽고 싶다.

‘상한 영혼’을 지닌 자를 위한 시. 어쩌면 시인 자신을 위한 시인지도.


또 이렇게 시간이 간다. 1월의 끝에 와있는 달력을 바라본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보냈는지를...


전적으로 시간에 대한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방식에 대한

그리고 과거와 미래가

하나의 연속된 현재가 되는 방식에 대한....

나는 모든 사람들- 살고 있는 사람, 살아온 사람,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사람들-온 현재에 살아있다고 생각한다.

-에브게니 비노쿠로프


과거도 미래도 존재하지 않는 것.

오직 현재... 지금도..... 현재에서 현재로 건너는 것.

우리 안에 잠복되어 있는 상한 영혼을 위하여 충분히 흔들리면서 저마다의 고통에게로 다정하게 가야 한다.

마음이란 참 간사한 것. 같은 상황 속에서도 극단을 오간다.

어떤 고통을 모면하기 위해, 고통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애를 쓰면 쓸수록 고통으로 발을 내딛게 되는 것

혹은 어떤 고통이든 기꺼이 받아들이겠다 다짐하는 순간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역시나 인생은 역설적이다.

내 안의 상한 영혼을 위하여, 세상의 모든 상한 영혼들을 위하여....... 또 1월이 가고 있고

또 2월이 다가오고 있다. / 려원


< 빨강 수집가의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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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도서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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